鶴山의 草幕舍廊房

精神修養 마당

이별의 한 방식

鶴山 徐 仁 2022. 3. 8. 11:39

Opinion :삶의 향기

 

이별의 한 방식

 

중앙일보 입력 2022.03.08 00:25


유자효 시인

 

 

“어머니의 아들로 태어나서 행복했습니다. 먼저 가 계시면 따라가 모시겠습니다.” 아들의 말이 끝나자 “엄마! 엄마!” 하는 딸들의 외침이 이어졌습니다. 마치 우주인들처럼, 방호복을 입고 얼굴을 가린 자녀들이 플라스틱 창 너머서 울부짖는데도 어머니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곁에 있던 간호사가 어머니의 가슴을 두드리며 눈을 떠보라고 외쳤습니다. 간신히 고개를 든 어머니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듯하였습니다.

 

장모님이 위급하니 병원으로 빨리 오라는 다급한 전갈을 저 역시 진료를 받기 위해 가 있던 병원에서 받았습니다. 그날따라 빈 택시는 왜 그렇게 안 보이던지, 네거리를 이리저리 건너며 허둥대던 끝에 간신히 택시를 잡아타고 요양병원으로 달려갔지요. 병원 직원이 막아섰습니다. “저희는 목숨 걸고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직계 자녀 외에는 안 된다는 말에 저는 허망하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부모 임종도 못한 황망한 이별

과학 방역인가, 정치 방역인가

슬픈 이별 속에서 이어지는 삶

 

 

저희집에는 해방 직후에 나온 배화여고 교지가 한 권 있습니다. 아주 낡은 그 책에 장모님의 글 두 편이 실려 있습니다, 단편소설과 수필입니다. 그해 나온 배화 교지에 작품 두 편이 실린 학생은 장모님이 유일해 문예반에서 주도적으로 활약하던 학생임을 알았습니다. 장모님은 이화여대 국문학과에 진학했지요. 고대 법과를 다니던 장인어른을 만나 결혼을 하게 돼 학업을 접었습니다.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고 청운동 부자였던 장모님의 친정은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맏딸을 가난한 집안에 시집보내며 장모님께서 주신 편지를 보았습니다. “성모 마리아상을 바라보며 젖을 먹이며 저렇게 귀하게 자라 달라고 기도했던 네가 이제 시집을 가는구나”로 시작해 “현실 안주는 바로 후퇴이니 우리 딸, 전진 또 전진하기를···”로 끝나는 사랑의 격려 편지였습니다.

 

저희 내외와 처가는 늘 가까이 살았습니다,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도와 제 자식을 키워주다시피 하셨습니다. 제가 KBS 파리 특파원으로 있을 때 장인어른이 지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때 장모님께선 겨우 예순두 살. 위로하느라 모시고 다니던 여행길에서 줄곧 눈물짓던 모습이 떠오릅니다.

 

장모님은 여든 살이 되시자 서예 가르치던 것을 그만두시더니 치매가 왔습니다. 마침내 기억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보고 제 집으로 모셔왔지요. 그러나 배회 증세가 나타나 할 수 없이 주간 보호센터로 모셨습니다. 아침에 보호센터 차에 태워 보내드리고 저녁에 집에서 맞이하는 것이었는데 나중에는 그것도 힘들어하셨습니다. 그때 오래 기다리던 노인요양센터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센터로 모시기 전날, 저는 여느 때처럼 장모님을 식탁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폭 안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왜 안 하던 짓을···” 하시더니 눈물짓는 것이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계신 줄 알았었는데, 아! 장모님은 다 알고 계셨습니다.

 

어렵게 입소한 그 요양원에서 사달이 났습니다. 보행이 불편해지신 장모님이 밤에 화장실 출입이 잦자 낙상 사고를 우려한 요양보호사가 휠체어에 결박한 것입니다. 그때 장모님은 극도의 흥분 상태에 빠져 상태가 악화하고 말았습니다. 외손자가 근무하는 병원으로 옮겨 진정시키곤 요양병원에서 단독 간병인의 보호를 받으며 지냈으나 코로나19 이후 면회가 차단됐습니다. 그런데 그 병원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으니 바로 퇴원해 달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부랴부랴 다른 병원을 수소문해 옮겼는데, 이번에는 그 병원에서 코로나 환자가 발생한 것입니다. 마침내 장모님께도 양성 반응이 나타나고 말았습니다.

 

 

삶의 향기 다른 기사

이전 [삶의 향기]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

 

 

장모님이 돌아가시자 장례는 행정 절차에 따라 치러지게 되었습니다. 가족의 손을 떠나 진행된 절차 끝에 우리는 화장장에서 하얀 뼛가루만 전달받았습니다. 이렇게 기막힌 이별을 겪은 가족들이 우리나라에 8800여 가정, 전 세계적으로는 600여만 가정에 이릅니다.

도대체 방역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과학 방역인지? 정치 방역인지? 코로나 환자의 인권은 무시돼도 되는 것인지? 육친의 임종마저 가로막는 것이 방역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 것인지? 국가가 개인의 인권에 어느 정도 개입할 수 있는 것인지? 이런 의문들이 밀물처럼 밀려들었습니다.

장모님이 돌아가신 뒤, 출국을 준비하던 셋째 딸 내외는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나머지 자녀들도 제각기 하던 일을 시작했습니다. 전염병이 창궐해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하고, 내일은 나라의 명운이 걸린 제20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집니다. 우리의 삶은 이렇게 슬픈 이별들 속에서도 이어져가고 있습니다.

 

유자효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