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여름 과일 한 광주리 (암 8:1-6)

鶴山 徐 仁 2022. 2. 26. 16:40

여름 과일 한 광주리 (암 8:1-6)

 
 
02월 26일 (토)
   
여름 과일 한 광주리 (암 8:1-6)


1.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
2. 그가 말씀하시되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이르되 여름 과일 한 광주리니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니
3. 그 날에 궁전의 노래가 애곡으로 변할 것이며 곳곳에 시체가 많아서 사람이 잠잠히 그 시체들을 내어버리리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4. 가난한 자를 삼키며 땅의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려는 자들아 이 말을 들으라
5.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며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내게 할꼬 에바를 작게 하고 세겔을 크게 하여 거짓 저울로 속이며
6. 은으로 힘없는 자를 사며 신 한 켤레로 가난한 자를 사며 찌꺼기 밀을 팔자 하는도다
 
아모스 선지자가 본 네 번째 환상인 <여름 과일 한 광주리>는 다림줄 환상과 마찬가지로 북이스라엘에 임할 하나님의 최종적인 재앙, 즉 멸망에 대한 경고이자 심판의 임박성을 강조하는 이상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내게 이와 같이 보이셨느니라 보라 여름 과일 한 광주리이니라>(1절). 이것은 내 백성 이스라엘에 끝이 이르렀다는 의미입니다. 끝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케츠>는 여름 과일을 뜻하는 <키츠>와 그 발음이 매우 유사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인내의 한계에 이르셨습니다. 아무리 택하신 백성이라 할지라도 끝까지 자신의 죄를 돌이키지 않으면 결국은 여름 과일처럼 끝장을 내신다는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은 여기서 다시 한 번 결연한 의지를 드러내십니다. <... 내 백성 이스라엘의 끝이 이르렀은즉 내가 다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리라>(2절)하시며 끔찍한 멸망의 그림을 제시하십니다. 노래가 애곡으로 변하고 곳곳에 시체가 널부러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최후 운명이 마치 곧 상할 여름 과일 한 광주리와 같이 된 이유는 뭘까요?






<가난한 자를 삼키며 힘없는 자를 망하게 하고>(4절). <거짓 저울로 속이며>(5절), <힘없고 가난한 자를 신 한 켤레>(6절)로 사고 파는 짓을 하며 사회 정의와 공의를 짓밟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그들은 안식일도 월삭도 다 지켰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저히 형식적이었습니다. 마음으로는 언제 안식일이 지나 다시 밀을 팔고 곡식을 거래할까 하며 돈 벌 궁리만 했다는 것이고 곡식을 팔면서도 저울과 됫박을 속여 부정하게 치부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제 그 모든 부와 여름 과일 한 광주리와도 같은 당시 이스라엘의 모든 영화가 얼마 가지 못해 허망하게 무너지고 다 썩어 버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의 환상입니다. 






하나님의 경고를 하찮게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이런 비극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광주리 가득 담긴 여름 과일을 보며 우리도 모두 깊이 깨달아야 겠습니다. 
 
-<여름 과일 한 광주리> 환상이 어째서 이스라엘의 멸망에 대한 예언이 된다는 것인지 설명해 보십시오.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신 한 켤레>로 살 수 있었던 것은?


-<여름 과일 한 광주리>와 같았던 이스라엘에 대해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심판하겠다고 하셨습니까?
 
주님, 그렇습니다. 무더운 여름에 잘 익은 과일을 따서 광주리에 가득 담아 두면 금방 상하고 썩습니다. 아모스 시대 이스라엘의 모습과 운명이 바로 그랬습니다. 그들은 불의와 부정으로, 거짓과 기만과 악독으로 늘 하나님의 징계를 자초했는데, 이제 그 최후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주님, 옛 이스라엘의 최후에 대환 이런 환상을 보며 이 시대 저희 사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과연 어떤 그림을 보여주실지 심히 두렵습니다. 공의와 정의가 실종된 이 나라의 운명을 위해 저희들 더욱 기도하며 살게 해주시옵소서.
 
   
쉽게 씌여진 시
 
무거운 세상인데, 너무 쉽게 글을 쓰지 않았는가. 마음 아파 무거운 성도들을 향해 너무 쉽게 설교하지 않았나, 깊이 곰삭아 발효된 설교를 하지 않고 발효는 커녕 부패된 설교를 하지 않았나, 무엇보다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이 아니라 얄팍한 지성으로부터 나온 ‘듣기 좋은’ 설교를 하지 않았나 부끄럽습니다. 함민복 시인은 「긍정적인 밥」에서 이렇게 반성했습니다. “시(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덮여 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시드기야왕이 보내어 그를 이끌어 내고 왕궁에서 그에게 비밀히 물어 가로되 여호와께로서 받은 말씀이 있느뇨? 예레미야가 대답하되 있나이다...” (렘37:17)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님의 「쉽게 씌여진 시」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갈 때 
막연한 의미에서 죄인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특정한 부분에서 저지른 죄가
 갑지기 깨달아지고 모든 관심이 거기로 집중된다.
어떤 사람이 “예, 나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압니다. 라고
 쉽게 말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임재 속에 들어가면 
그런 막연한 말로 대충 얼버무릴 수 없게 된다.
우리의 깨달음은 우리가 지은 죄에 집중되고
 이사야가 그랬듯이 우리의 진면목을 개닫게 된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표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특정한 죄를 보여주심’에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으면 죄에 대한 
막연하고 모호한 인식은 사라지고
 특정하게 지은 죄가 집중적으로 조명됩니다.
우리가 그 특정한 죄를 순순히 인정하면 하나님은
 그 죄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죄의 본성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대하시는 방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