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넷 여자 둘' 내무반…여성징병제 노르웨이의 파격 시도
[중앙일보] 입력 2021.05.06 18:00 수정 2021.05.06 18:08
'여성 징병제' 논의가 다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우리나라가 처음 가는 길이라, 여성징병제를 채택한 외국은 어땠는지 살펴보려는 시도들도 많다. 특히 노르웨이가 많이 거론되는데, 여성징병제 논의를 유럽 전역에 확산시킨 나라이기 때문이다. 2013년 노르웨이 국회가 여성징병제를 승인한 뒤 스웨덴ㆍ네덜란드가 뒤따랐고, 독일ㆍ스위스ㆍ오스트리아ㆍ덴마크ㆍ핀란드도 논의 중이다. 노르웨이에선 여성징병제 대신 ‘성 중립적 징병제’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노르웨이는 2016년부터 여성징병제를 시작했다. 사진 노르웨이 군.
노르웨이는 왜 여성징병제를 도입했을까
노르웨이에서도 여성징병제가 순조롭게만 도입된 건 아니다. 여성징병제 논쟁이 가장 뜨겁게 불붙은 건 2013년이었다. 여야 모두 같은 당 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장관끼리도 생각이 달랐다. 찬성 측은 병역은 사회적 의무이므로 남녀 국민 모두 동등하게 지는 것이 원칙 상 맞다고 주장했다. 반대 측은 출산ㆍ육아에 대한 부담이 남성보다 여전히 큰 상황에서 여성에게 병역까지 부과하는 것은 과도하다고 반박했다.
치열한 논쟁 끝에 노르웨이 여론은 여성징병으로 기울었다. 진정한 성평등의 실현이라는 ‘대원칙’에 국민 다수가 공감했다. 국방력 강화를 위해 우수한 여성을 징집하는 게 낫다는 국방부의 논리도 한몫했다. 2013년 6월 노르웨이 국회는 의원 95명 중 90명이 찬성하며 여성징병제를 최종 승인했다.
프랑크 스테데르(Frank Steder) 노르웨이 국방연구원 수석연구원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정치권이 논쟁을 주도했고, 그 과정은 체계적이었다”며 “특히 젊은 여성들이 기회의 평등에 공감했다”고 말했다.
노르웨이, 시작부터 남녀 공용 내무반 운영
노르웨이 여성의 입영이 시작된 건 2016년 여름이었다. 놀라운 점은 노르웨이가 남녀 공용 내무반을 운영했다는 점이다. 노르웨이 군에 따르면 징병된 여성 병사의 63%가 남성과 같은 숙소를 썼다. 보통 남성 4명, 여성 2명으로 이뤄진 방이다. 노르웨이의 과감성에 전세계가 충격을 받았고, 각국 언론사의 취재가 잇달았다.
남성 병사 카스페르 샤바(Kasper Sjavag)는 “처음엔 다들 부끄러워했다. 여자들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정말 몰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처음의 어색함이 사라지고 나니 편안해졌다. 여자애들도 우리처럼 (편하게) 행동하더라”고 싱가포르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그와 같은 방을 쓰는 여성 병사 이네 그림스부(Gine Grimsbu)는 “남자들도 우리를 잘 대해주고 존중한다. 여자들이랑 지내본 적이 없는 사람들도 좀 있지만, 함께 지내는 데에는 문제없다”고 했다.
노르웨이는 남녀 공용 내무반을 운영한다. 사진 Ruptly.
노르웨이가 ‘남녀 합방’이라는 급진적 시도를 한 건 성폭력을 줄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노르웨이 국방부는 “여성과 남성이 같은 방을 쓰면 성별 의식이 희미해지고 동지애가 생긴다”는 연구 결과를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이 방식을 도입한 뒤 성범죄가 줄어드는 효과도 확인됐다. 2010년 조사에선 여성 군인의 20.3%가 성희롱을 당했다고 답했지만, 2016년엔 15%로 줄었다.
노르웨이 여성은 왜 반대하지 않았나
노르웨이 징병제는 우리와 여러 측면에서 상당히 다르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필요 병력 자체가 우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소규모인데다 징병제이지만 입대하려면 입사 시험에 가까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노르웨이 상비군 병력은 2만4000여명(전체인구의 0.4%)으로 우리 해병대보다 작다.
우리의 경우, 남성들은 20세에 신체검사를 받고 심각한 결격 사유가 없는 한 징집된다. 우리나라 2019년 병무통계연보에 따르면 병역판정검사를 받은 19~20세 남성 32만3800여명 중 현역병 입영대상자는 26만3300여명으로 81.3%였다. 병역면제자는 1200여명으로 0.3%에 불과했다.
하지만 노르웨이는 입영 대상연령인 19세 남녀 6만여명 중 8000~1만여명만 징병된다. 의무복무 기간은 19개월이며, 1년만 병영 생활을 하고 나머지 7개월은 우리의 향토예비군 같은 형태로 복무한다.
징병된 병사의 구성은 여성과 남성이 3:7 정도다. 사진 노르웨이 군.
노르웨이는 설문-필기검사-체력검사-건강검진-면접 등 5가지 과정을 거쳐 입영 대상자를 선별한다. 첫 단계 설문은 17세 국민 전체가 대상이다. 사회생활ㆍ건강ㆍ신체조건ㆍ동기부여ㆍ흥미분야 등에 대한 질문 55개로 구성된다. 노르웨이 군은 이 설문을 토대로 약 3분의 1 정도를 선별해 다음 과정으로 넘긴다. 계산ㆍ언어능력을 테스트하는 필기검사, 멀리뛰기ㆍ턱걸이 등 체력검사, 그리고 건강검진은 첫 단계 이후 약 1년 뒤 이뤄진다. 이를 통과해야 최종 입영대상자가 된다.
스테데르 수석연구원은 “노르웨이는 안경을 쓴다거나, 글루텐 알레르기가 있는 등의 사유로도 입대가 불가능하다”며 “최종적으로 전체 대상자의 10~15%만 군복을 입게 된다”고 설명했다.
군대 소집 안 된 징병대상자의 삶
선별 과정에서 걸러져 입영하지 않은 이들은 일반인들처럼 일상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간다고 보면 된다. 대체 복무 제도는 없다. 다시 어떤 기회를 통해 실제로 입영할 가능성도 매우 희박하다. 스테데르 수석연구원은 “입영 심사에서 탈락한 나머지 인원은, 말하자면, 자기가 원하는 대로 계속 지내면 된다”며 “군에서 핵물리학자 등 특수 분야 인원을 선발할 때도 있지만 매우 드문 경우”라고 말했다.
노르웨이에 대체 복무제도는 없다. 입영하지 않는 징병대상자는 일상 생활을 영위한다. 사진 노르웨이 군.
게다가 노르웨이는 양심적 병역 거부 절차가 간소화돼 있다. 양심적 병역 거부 신청만 하면 특별한 심사없이 국가가 승인한다. 또한 징집이 됐더라도 이후 신념이 바뀌었다는 이유로도 양심적 병역 거부를 신청할 수 있다. 2000년까지는 경찰서 등에서 인터뷰로 검증했지만, 이 절차도 폐지됐다. 2012년 이후로는 대체복무 제도도 폐지되면서, ‘시민 보호’라고 부르는 임무로 대체됐다.
양심적 병역 거부자를 포함한 면제자들은 3주 간의 교육과정을 거쳐 한 해 이틀 훈련으로 군복무를 대체하게 된다. 다만, 이마저도 거부하면 벌금형이나 징역 2년 이하의 금고형에 처해질 수 있다. 노르웨이 국방부에 따르면 2017년엔 126명, 2018년엔 162명, 2019년 170명이 양심적 병역 거부를 선언하고 병역에서 면제됐다.
노르웨이의 군 복지 제도
노르웨이군 입대 조건이 까다로운데, 빠져나갈 문은 넓은 이유는 병력을 소수로 유지하기 위한 것도 있지만 복지 국가답게 풍부한 혜택을 부여하기 때문인 점도 있다. 월급은 입대 직후 5400 크로네(약 72만원) 정도로 아주 많은 편은 아니지만, 기타 혜택이 풍부하다. 배우자, 자녀 여부에 따라 추가 수당을 받고, 주택 임대료ㆍ융자, 난방비, 지방세 등의 보조 혜택도 있다. 주 42.5시간제 근무를 준수하고, 산재보험ㆍ장애보장도 하는 등의 복지 제도가 뒷받침돼 있다.
노르웨이는 군 복무를 마친 이들에게 가산점도 부여한다. 이 점수는 대학교ㆍ대학원 입시에 적용된다. 일반 기업의 취업에도 군 경험은 유리하게 작용한다. 스테데르 수석연구원은 “일반 기업 취업 시 직접적인 혜택은 없지만, 노르웨이 기업들은 군 출신을 우수한 인재로 여기고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했다.
이때문에 징병제 국가인데도 노르웨이 군은 취직 선호도 상위권에 올라 있다. 최근 노르웨이 언론 조사에 따르면 IT 계열 학생의 군대 선호도는 전체 직장 중에서 5위이며, 인문 계열에선 11위, 공학 계열에선 13위, 상경 계열에선 15위에 올랐다. 여성징병제가 시행된 2016년 말 병사 만족도 조사에서도 여성은 90%, 남성은 83%가 만족한다고 답했다.
군대 출신에게는 상급 교육 기관을 진학할 때 가산점이 주어진다. 취업 시 혜택은 없지만, 군 경력이 유리하게 작용한다. 사진 노르웨이 군.
노르웨이 여성징병제가 주는 시사점
북유럽 특유의 문화는 여성징병제를 둘러싼 사회갈등을 최소화했다. 노르웨이를 비롯한 스칸디나비아 국가에는 ‘얀테의 법칙(Janteloven)’이라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얀테의 법칙’은 ‘스스로를 특별하거나 대단한 존재로 여기지 말라’는 것으로 평등주의ㆍ공동체주의를 표방한다. 즉 '갈등'을 거칠게 표현하기보다는 공동체 안녕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토론하는 걸 미덕으로 삼는다는 의미다.
한국외대 스칸디나비아어과 김기수 강사는 “북유럽에서 이 법칙은 개인 차원을 넘어 정치적 측면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며 “모든 의견을 존중한다는 원칙 위에 충분한 의견 수렴 과정을 거치므로 사회적 갈등이 줄어든다”고 설명했다.
'자신을 특별한 존재라고 생각하지 말라.' 얀테의 법칙은 북유럽의 행동 규범으로 작용한다. 사진 Poul Krogsgard.
북유럽 특유의 성평등을 향한 열망, 노르웨이 군대의 사회적 위상과 복지, 얀테의 법칙으로 대표되는 노르웨이 문화.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 떨어지면서 노르웨이 여성징병제는 소모적 갈등을 줄이고 제도적으로 안착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정치권이 주도해 초반 어수선했던 여성징병제 논쟁의 실마리를 풀어나갔다. ‘동등한 의무와 권리’, ‘국방력 강화’에 집중해 논의를 진행해 불필요한 논쟁을 차단했다. 박진수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우리의 경우는 일부 정치인들이 충분한 연구 없이 인기영합적 차원에서 여성징병제를 제기하면서 성별 간 사회적 갈등이 확대되고 있다”며 “정책 연구를 수행하는 민관 합동 위원회를 설치하는 등 사회적 갈등을 제도권 내부로 흡수해 숙의를 거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정봉 기자 mole@joongang.co.kr
영상=김지선ㆍ정수경 PD, 김지현ㆍ이가진 인턴
[출처: 중앙일보] '남자 넷 여자 둘' 내무반…여성징병제 노르웨이의 파격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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