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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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교수
입력 2020.08.22 03:16
한국에서는 제국주의 일본에 맞선 독립운동, 그리고 공산당·북한에 맞선 자유민주주의 운동을 한 범주로 묶어서 이해한다. 하지만 현대 한국을 만든 이 두 가지 활동은 때로 충돌한다. 1969년, 서울 서초구 헌인마을에서 그 충돌이 일어났다.
박정희 정부는 소록도 등에 격리되어 온 한센병력자 가운데, 감염성이 없는 음성 환우들을 사회로 복귀시키는 사업을 1961년 시작했다. 그중 일부가 당시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자리 잡았다.
이렇게 시작한 헌인마을에 비극이 발생한 것은 1969년. 한센병력자 환우들의 다섯 자녀가 근처의 대왕국민학교에 입학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들은 보건사회부의 진단서까지 제출했다. 하지만 전교생 부모가 거의 모두 자녀들의 등교를 거부하는 일이 일어났다.
30여 명을 제외한 전교생이 계속 등교를 거부하자, 당시 서울시 교육감은 기자회견에서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한국 나병사 240쪽)이라고 말했다. 헌인마을 주민들이 땅을 제공하면 분교를 만들어서 자녀들을 따로 교육해주겠지만, 그러지 않는다면 다섯 어린이에게 등교 정지 처분을 내리겠다는 것이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31조에 어긋나는 이러한 결정을 보건사회부는 비판했다. 당시 문교부 장관은 다른 학교에 다니던 딸을 대왕국민학교로 전학시켰다. 800여 학생의 학부모들이, "문교부 장관 자녀 중 한 아이만이라도 전학해오면 우리 자녀도 등교시키겠다"고 요구한 데에 따른 결정이었다. 보건사회부 장관, 국립중앙의료원장, 보건국장, 의정국장, 의대 교수 등 다섯 명은 다섯 어린이를 각각 한 명씩 자기들 집에서 기르겠다고 했다.
그럼에도 학부모들이 계속해서 다섯 어린이의 등교에 반대하자, 문교부는 강북구 수유동에 한국신학대학 부속 국민학교를 신설하게 해서 이곳으로 통학시킨다는 결정을 내리고 말았다. 의학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헌인마을의 다섯 어린이는, 가까운 학교로 입학할 권리를 박탈당하고, 직선거리로 30㎞가 넘는 학교까지 통학해야 했다.
이 사건에서 나는 다음 포인트를 주목한다. 우선 "다수를 위해서는 소수가 희생하는 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이라는 서울시 교육감 발언. 이 교육감은 식민지 시대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은 독립운동가였다. 반일 독립운동가와 민주주의자가 반드시 같은 길을 걷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이 사건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이들 5명의 입학이 보류되었다가 재개된 뒤에 재학생 853명 가운데 30여 명이 등교했다는 사실, 문교부 장관이 자기 자녀를 전학시키고 보건사회부 장관 등 저명인사 다섯 명이 다섯 아이를 각기 맡아 기르겠다고 나선 사실, 그리고 27년 뒤인 1996년에 헌인마을 주민들이 동병상련으로 특수학교 설립을 허락해준 사실을 나는 주목한다.
다섯 어린이의 입학은 결국 좌절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주의 원칙에 맞는 정책을 실현하고자 노력한 정부 당국자들, 이들을 믿고 등교한 학생 30여 명과 학부모들, 그리고 자신들과 마찬가지의 소수자들을 진심으로 받아준 헌인마을 주민들의 행적은 민주주의 시민의 모범으로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누군가를 비난하기는 쉬운 일이다. 하지만 그 와중에 시민으로서 법적·도덕적 의무를 다한 사람들을 기억해야만, 그 사건은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교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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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8/21/202008210431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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