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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 최고지도자 알 바그다디 사망…빈라덴과 비교해보니

鶴山 徐 仁 2019. 10. 27. 19:34

IS최고지도자 알 바그다디 사망…빈라덴과 비교해보니

김예윤 기자 ,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입력 2019-10-27 18:03  수정 2019-10-27 19:25    

    


27일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무장 테러조직 ‘이슬람국가(IS)’의 최고지도자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48)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며 2011년 사살된 오사마 빈 라덴과의 비교가 이어지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이슬람 극단주의자로 미국이 같은 액수의 현상금(2500만 달러, 한화 약 293억 6000만 원)을 걸고 추적하던 인물들이다.

가장 큰 차이는 바그다디는 도피생활에 들어간 지 겨우 3년 만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2001년 9·11 테러 배후자로 지목됐던 빈 라덴은 무려 9년 7개월 간 미국의 끈질긴 추적을 피하다 2011년 5월에야 사살됐다. 도피 기간에서 이처럼 큰 차이가 난 데는 든든한 ‘지원세력’의 유무가 꼽힌다. 

빈 라덴의 경우 파키스탄의 ‘딥 스테이트(숨은 권력)’로 불리는 정보부(ISI)의 조직적인 보호를 받았다는 분석이 많다. ISI는 이슬람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한 인사들로 구성돼있어 알카에다, 탈레반같은 이슬람교 극단주의 단체들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왔다. 실제로 9·11 테러 이후 미국이 빈 라덴이 머물던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파키스탄으로 이주했으며 사살 당시 숨어 지내던 곳도 파키스탄 아보타바드다. 미국은 빈 라덴 사살 작전을 위해 특수부대를 투입할 때 파키스탄 측에 이를 통보하지 않았다.



반면 바그다디는 시리아와 이라크 정부 모두와 적대적인 관계였으며 배후에서 지지하는 정부나 세력이 없었다. 그만큼 미국의 조직적인 추적에 대응하는 것도 어려웠으며 빈 라덴보다 은신 생활도 훨씬 어려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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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바그다디는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반면 빈 라덴은 미군에 의해 사살됐다. 이날 CNN과 군사전문매체 디펜스원 등은 국방부 관계자를 인용해 “바그다디가 미군의 군사작전 중 스스로 폭탄조끼(Suicide Vest)를 터뜨려 자폭한 것으로 보인다다”고 보도했다. 아직 백악관 등의 공식 성명은 나오지 않은 상태다. 2011년 5월 1일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은 “미군 특수부대가 빈 라덴이 숨어있던 파키스타 아보타바드 가옥을 급습해 교전 끝에 그를 사살했다”고 발표했다. 당일 오후 대통령과 조 바이든 전 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 등 국가안보회의(NSC) 일원은 백악관 상황실에서 빈라덴이 부인으로 알려진 여성을 앞으로 내세우거나 미군과 교전을 벌이는 등 사살까지 이르는 작전 과정을 생중계로 지켜보기도 했다.

바그다디가 이끈 IS는 빈 라덴이 수장으로 있던 알카에다와 조직 성격 자체가 다르다는 평가도 많다. 알카에다는 특정 지역을 장악한 후 국제적인 테러를 벌인 적은 많다. 그러나 IS는 광범위한 영토를 장악해 국가를 선포한 뒤 법체계, 교육제도, 화폐 등 시스템을 마련했다. 심지어 IS는 필리핀 남부와 같은 무슬림 다수 거주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간주하며 에미르(통치자)를 임명하기도 했다.

김예윤 기자 yeah@donga.com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 





이슬람학 박사 출신… 美 이라크 침공 계기 무장투쟁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력 2019-10-28 03:00 수정 2019-10-28 11:07

    

IS 이끈 알 바그다디는 누구?

이슬람국가(IS) 수괴 아부 바크르 알 바그다디(48)는 1971년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북쪽의 사마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브라힘 아와드 이브라힘.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의 친구이자 최초의 칼리프(이슬람 신정일치 국가의 최고 통치자)였던 아부 바크르의 이름을 가져와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했다. 

바그다디는 사우디아라비아 재벌가 출신인 9·11테러의 주범 오사마 빈라덴과 달리 평범한 가정 출신이다. 바그다드의 한 대학에서 이슬람학으로 박사 학위도 받은 ‘학구파 테러리스트’. 독재자 사담 후세인 정권 시절에 이슬람 신앙을 설교하며 반정부 활동을 펼쳤고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본격적인 무장 투쟁에 나섰다. 그는 한때 미군에 붙잡혀 감옥 생활도 했다. 2010년 후세인 정권 몰락 후 이라크 내 시아파가 득세하자 수니파 무장단체 알카에다의 이라크지부를 맡았다. 2011년 내전 발발 후 중앙정부 기능이 무너진 시리아로도 진출했다. 2014년 6월 IS 건국을 선포하고 스스로를 칼리프로 칭했다.

그는 ‘얼굴 없는 리더’로 불릴 정도로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로이터 등에 따르면 2, 3명의 부인이 있고 가족들도 IS 전사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 후다이파 알 바드리는 지난해 7월 시리아 홈스 인근에서 친정부 무장세력 및 러시아군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카이로=이세형 특파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