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이 전라좌수사로 내정된 것은 파격 그 자체였다.
‘정6품 정읍 현감’에서 6단계를 뛰어올라
‘정3품 전라좌수사’ 가 됐으니 그의 인사를 두고 세간에서는 말이 많았다.
더구나 이순신은 육전에 능한 장수였고 해전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조정 대신들이 이순신의 능력에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했다.
”김준혁 저(著) 「역사는 미래다」 (더봄, 218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전라좌수사였다는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그는 잘해야 변방 사또로 있었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31세 때인 선조 5년 병과로 과거 급제해서
종9품이 돼서 출발 자체도 늦었습니다.
게다가 아부와는 거리가 먼 성품에 파직과 좌천, 백의 종군을 거듭했습니다.
이순신은 자신을 알아본 서애 유성룡의 파격적인 천거로 전라좌수사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이순신은 호남 지역 바다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포구에 사는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푸짐한 음식으로 그들을 대접했습니다.
이순신은 평복 차림으로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했습니다.
백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순신과 하나가 되어 갔습니다.
주로 어업에 종사하던 백성들은 이순신에게 바다의 상황을 소상히 말해 주었습니다.
이순신은 부임하는 곳마다 군영 막사이자 개인 집무실인 ‘운주당’을 만들었습니다.
일종의 아이디어 뱅크입니다.
실제로 운주당에는 부하 장수들부터 말단 병졸들까지 드나들었습니다.
결국 이순신은 이런 정보들을 하나 둘씩 모아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참 스승은 아비의 심정이 있습니다. 그런 아비같은 스승에게 백성들은 마음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