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Faith - Hymn

슬프다 그 날이여 외 1

鶴山 徐 仁 2017. 1. 26. 18:56
1월 26일 (목)
슬프다 그 날이여(요엘 1:13-20)
  
 

13.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내 하나님께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와서 굵은 베 옷을 입고 밤이 새도록 누울지어다 이는 소제와 전제를 너희 하나님의 성전에 드리지 못함이로다
14.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
15. 슬프다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 같이 전능자에게로부터 이르리로다
16. 먹을 것이 우리 눈 앞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성전에서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17. 씨가 흙덩이 아래에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18. 가축이 울부짖고 소 떼가 소란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 양 떼도 피곤하도다
19.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불이 목장의 풀을 살랐고 불꽃이 들의 모든 나무를 살랐음이니이다
20. 들짐승도 주를 향하여 헐떡거리오니 시내가 다 말랐고 들의 풀이 불에 탔음이니이다

 
  
  
 

<제사장들아 너희는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지어다 제단에 수종드는 자들아 너희는 울지어다 ... >(13절).
하나님이 제사장들에게 통회하기를 촉구하신 말씀입니다.
<너희는 금식일을 정하고 성회를 소집하여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민들을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전으로 모으고 여호와께 부르짖을지어다>(14절).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이런 자를 찾고 계십니다. 나로 진노하지 못하게 하는 자, 내가 분을 품지 못하도록 뚫어진 구멍을 가로 막고 서서 <안 됩니다>하는 사람을 구하고 계십니다.
<이 땅 백성은 포악하고 강탈을 일삼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압제하고 나그네를 부당하게 학대하였으므로 이 땅을 위하여 성을 쌓으며 성 무너진 데를 막아 서서 나로 하여금 멸하지 못하게 할 사람을 내가 그 가운데에서 찾다가 찾지 못하였음으로 내가 내 분노를 그들 위에 쏟으며 내 진노의 불로 멸하여 그들 행위대로 그들 머리에 보응하였느니라>(겔 22:29-31).
한 시대의 의인이란 무너진 성을 새로 쌓고, 그 무너지고 뚫린 구멍을 자기 몸으로 막아 하나님의 진노를 그 몸으로 대신 할 자라는 것인데 요엘 시대 유다 사회에서는 아무리 찾아도 그런 자가 없어 결국 하나님이 그 날, 여호와의 날을 발동할 수밖에 없으므로 <제사장들아 굵은 베로 동이고 슬피 울라> <장로들아 성전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성이 무너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큰 위기가 닥쳤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은 그보다 더 큰 위기가 있습니다. 요엘 시대의 유다처럼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는 의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하나님의 진노를 자기의 몸으로 가로막은 자>요 <하나님의 모진 매를 자기의 등으로 대신 맞은 자>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무너진 성을 쌓거나 뚫어진 구멍을 막으려 하지 않습니다. 과거 유다도 그래서 결국은 <그 날> <여호와의 날> <멸망의 날>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마치 의인 열 명이 없어 망했던 옛 소돔처럼 ...

 
  
  
 

-에스겔 22장이 말씀하는 의인은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본문이 제사장들에게 굵은 베옷을 입고 슬피 울라고 한 이유는?
-본문 14절이 말씀하는 <그 날>을 피할 수 있는 비결은?

 
  
  
 

주님, <그 날>이 가까웠다고 합니다. <전능자에게로부터 멸망이 이르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제사장들이 <굵은 베옷을 입고 슬피 울고>, <장로들과 이 땅의 모든 주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마지막 순간 그 멸망을 피할 수도 있음을 오늘 이 본문을 통해 깨닫습니다. 부디 통회하고 자복하는 일에 태만하지 않게 하시고, 심판의 날인 여호와의 날의 두려움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저희 모두가 주님처럼 저희 몸을 던져 이 무너진 성을 새로 쌓고, 뚫린 이 시대의 구멍을 막는 일에 무책임하지 않도록 성령으로 깊이 깨우쳐 주시옵소서.

 
  
   
 

눈은 설교자를 바라보고 있지만

여러분! 교회에서도 열심히 주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람들인지 아는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잘 듣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하나님 말씀을 전해도
너는 떠들어라 나는 안 듣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설교가 그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냥 와서 앉아 있다가 가는 것뿐이다.
눈은 설교자를 바라보고 있지만 마음은 다른 데에 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고 그냥 가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한테 충성은 고사하고
엉뚱한 소리만 하는 사람이 될 수밖에 없다.

-오석득 목사의 ‘주님께 충성하려면’에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에게 가장 무서운 병은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잘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른 소리를 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잘 듣는 사람들은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으로 자신의 모습을 점검해 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런데 말씀을 잘 듣지 못하는 사람들은 엉뚱하게 듣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는 사람은
들을 때 주님께 충성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갑니다.
그러나 잘 듣지 않는 사람은 그러한 마음이 생기지 않기에
시비를 걸거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니가 참 좋아

 

니가 있어서 참 좋아.
니가 함께여서 나는 참 좋아
밝게 웃으며 주위를 사랑하세요.

-도은화 작가

 
    
 
  
 서울이태원교회 지성호 목사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는 것
  
  



1월 25일 (수)
교양 있는 사람이 되려는가, 그리스도인이 되려는가?(골로새서 2:6-10, 3:10-15)
  
 

골로새서 2:6-10

6.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7.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이것은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학문을 따름이요 그리스도를 따름이 아니니라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


골로새서 3:10-15

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11.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이 택하사 거룩하고 사랑 받는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고
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리스도인 된다는 것은 조금 더 공부 잘하고, 예의바르고 교양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으로 교회에 올 때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는 예의 없어 보이는 행동들을 사랑이며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행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가르침과 전통이 우리가 보기에 교양 있어 보이는 삶이라고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오늘 말씀에서 세상의 철학과 전통을 따라 사는 삶은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의바르고 교육받은 모습으로 보이는 것이 있는 척하며 교만한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우리의 본질적 변화를 가져오는데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따라 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사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일을 만나게 돼서 그것이 교양 없어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근거는 아닙니다. 우리 안에는 세상의 교양의 기준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 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님을 따라가기로 결정했다가 세상의 눈들 때문에 그것을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그것 때문에 오셨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죄 때문에 하나님을 따라 살지 못하는 우리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우리에게 충격인 것은 예수님의 삶은 그 당시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의인의 삶의 기준을 깨뜨리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유대인들과 바리새인들이 생각했던 교양 있고 상식 있고, 예의 있어서 의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오늘 말씀에서처럼 새사람을 입는 사람, 날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새롭게 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때로는 나의 생각과 다르고 세상의 기준과 다르더라도 그 형상을 입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제 세상에서 교양 있어 보이려는 욕심을 내려놓고 진정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기를 소망합니다.

 
  
  
 

- 다른 사람에게 교양 있어 보이려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회개합시다.

 
  
  
 

주님!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는데, 나는 세상의 의인의 기준을 따라 사느라 주님을 따라 사는 삶을 포기했던 것을 용서해 주세요. 주님 이제는 날마다 주님의 말씀과 은혜 앞에서 새사람을 입기를 소원합니다. 오늘도 나에게 순종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라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송”(엡1:12)이라고까지 말한다.
그리고 빌립보 교회에게 이렇게 권고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빌1:11)라고.
우리의 존재 자체를 “하나님의 찬송”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더 이상 우리는 죄의 노예도 아니며,
슬픔과 고통의 사슬에 얽매여 있지도 않으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탄식과 한탄과 팔자타령은
찬송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민재 목사의 ‘다윗의 유언’에서-

 
   
 
  
 


기독교는 인간을 찬송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존재를 찬송으로 이해하는 것,
인간에 대한 이처럼 긍정적이고 명랑하고 즐거운 이해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찬송으로 살아가십시오.
즐거운 노래로 살아가십시오.
그럼으로써 삶도 찬송이 되게 하고 노래가 되게 하십시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가 사라지고 어둠이 걷힐 것이며
눈물은 거두어질 것입니다.

 
   
    
 

 

내 팔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해 손 높이 들 때
주님이 우리의 힘이 되어주십니다.

-변정희 작가

 
    
 
  
 신일교회 배석찬 목사
 희망의 밭을 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