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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배지 달고 ‘야당을 야단치는 야당’ 김종인(종합)

鶴山 徐 仁 2016. 8. 27. 15:50

이정훈의 안보마당                    



태극기 배지 달고 ‘야당을 야단치는 야당’ 김종인(종합)

 


 


“수권 정당 되자면서 사드 배치에 반대한다고. 참~”

 

 

이정훈 hoon@donga.com



지난 해 김종인(76) 씨가 더불어민주당 비상대책위원회 대표가 됐을 때 ‘결국엔 팽(烹) 당할 것’이라는 예측이 많았다. 그리고 ‘트로이의 목마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일었다. 이념적으로 맞지 않는 당에 들어갔음에도 칩거를 비롯한 몇 차례의 정치 투쟁을 통해 당권을 잡더니 4·13총선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그의 보수 색채는 상당히 강했기에 그를 ‘여권 세력이 야당의 이념을 바꿔놓기 위해 야당으로 침투시킨 간첩’으로 보는 이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를 ‘고용’한 문재인 전 대표의 인상도 이 지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그의 존재감은 새누리당이 김희옥 전 헌법재판관을 혁신비상대책위원장에 임명함으로써 더욱 두드러졌다. 더민주의 당권을 차지하겠다며 경선에 나선 이들의 존재감은 ‘아예’ 논의할 필요도 없을 지경이었다. 그런 그가 당대표로 참석한 마지막 의원총회에서 당 운영에 불만을 토로하는 이들을 향해, “당(黨)은 지적(知的)만족을 위한 것이 아니다. 집권을 하기 위해서는 관습처럼 해온 것들이 뜻에 맞지 않아도 이해를 해야 한다”고 일갈했다.
8월27일 퇴임을 앞두고 한 공식 기자회견에도 그는 더 민주 강령에 ‘노동자’를 유지한 것은 “정당이 어느 한 도그마에 사로잡혀서 집착하면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야당을 야단치는 야당 대표이자 의원인 것이다. 그러한 그를 퇴임 20일 전인 8월8일 만나러 국회로 갔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그의 사무실 앞에는 수십 명의 막내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터져 나올지 모를 그의 일갈을 받아 적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러한 인파를 뚫고 그의 사무시로로 들어갔다. TV에서 보던 그 얼굴 그대로인데 웃옷 왼쪽 깃에 태극기 배지가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더민주 의원이라면 노란 리본을 달아야 할 텐데….
자리에 앉자마자 김대표는 경험을 토대로 한 의견을 장시간 강하게 설파했다. 때문에 일문일답의 인터뷰가 되지 않고, 기자 역시 모든 지식을 동원해 캐묻고 따지는 토론이 돼버렸다. 이 토론을 통해 추려낸 그의 생각이 너무 정치해 그의 허락을 받아 그가 구슬을 정리해보기로 한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한중 갈등이 세간의 화제인 만큼 그는 외교에 대한 경험과 지혜를 풀어 놓으며 냉정하게 현실을 볼 것을 주문했다.

 

 


제1부, 최초로 한소수교, 한중수교를 밝힌다

 

 


긴박하게 성사된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회담

 

 

나는 북방정책을 추진한 노태우 대통령 초기 보건사회부장관을 하다 1990년 3월19일부로 경제수석을 하였다. 경제수석이지만 나는 국정 전반에 관해 관심을 기울였다. 어느 날 노태우 대통령께 야심차게 추진해온 북방정책에 대해 물어보았더니, “틀은 짜여있는데, 진행이 잘 안 된다.”고 했다. 88올림픽 후 동유럽 국가와는 수교했으나 ‘대어’는 낚지 못한 현실을 짚은 대답이었다.
나는 대통령에게 “소련이나 중국과 같은 거대 국가를 상대하려면 노련하고 능숙한 사람의 조언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반복했었다. 레이건 정부에서 국무장관을 하며 훗날 소련이 붕괴하게 하게 되는 기반을 닦은 조지 슐츠 같은 이가 그런 사람이다. 나는 슐츠와 사적인 대화를 나룰 정도로 가깝게 지내고 있었기에 대통령께 “대소(對蘇)외교를 이끌었던 슐츠 씨를 만나보라”고 권했다.
90년 5월 어느 날 내 의중을 잘 알고 있는 슐츠 씨가 “다음 달 소련의 고르바초프(고르비) 대통령이 나와 스탠포드대 총장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해 스탠포드대에서 강연을 하기로 했다. 한국에 좋은 소식이 있을 수도 있다.”라는 힌트를 주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 62년부터 87년까지 25년간이나 주미 소련대사를 하고 고르비의 외교고문이 된 도브리닌이 비밀리에 서울로 날아왔다. 내 소개로 대통령을 만난 그는 “6월4일 샌프란시스코로 오시면 고르비를 만날 수 있다. 조건은 모든 것을 비밀로 해야 한다. 대통령께서 고르비를 만나러 미국에 간다는 것이 알려지면 모든 것이 취소된다.”라고 했다.
노 대통령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자, 그는 “한국이 경제협력을 해줄 수 있는 사항을 준비해 달라.”고 하고 돌아갔다. 나는 바로 소련을 위한 경제협력방안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언론에 엠바고를 요청해놓고 샌프란시스코로 날아갔는데, 한 언론이 이를 어기고 대통령의 미국행을 보도했다. 갑자기 ‘중인환시리(衆人環視裏)가 된 상황에서 우리는 한소정상회담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데 소련 측은 보도가 된 사실을 문제 삼지 않고 회담 참석자는 각 6인으로 하자고 했다. 우리 측에서는 대통령과 의전수석(노창희), 외무장관(최호중), 외교안보수석 (김종휘), 공보수석(이수정)과 내가 회담에 들어가기로 했다. 약속한 시간을 넘겨 달랑 연필 한 자루만 든 고르비가 마슬류코프 경제부총리, 도브리닌을 비롯한 개인 고문 네 명을 이끌고 호텔 회담장에 들어왔다.

상견례 때 고르비는 나에 대한 보고를 받은 듯, 내가 준비해간 경제협력 파일을 연필로 가리키며 “(파일이) 너무 얇다.”라고 농담했다. 우리는 긴장했었기에 노 대통령은 준비해간 ‘문서에 있는 말’을 읽었지만, 고르비는 자신감이 넘치는 듯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줄줄 풀어놓았다. 그러한 회담을 끝내고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역사적인 한소 정상회담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밝혔다. 노 대통령은 워싱턴으로 날아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회담과정을 설명하고 돌아왔다.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 처음으로 만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이 만남을 주선한 이가 바로 김종인 더 민주 대표였다.

 

 


소련, 경제부총리 통해 수교 밝혀

 

 

한 달여가 지난 7월 20일 소련 측이 “8월2일 모스크바에서 경협회담을 하자. 외교관은 오지 말고 경제 관계자만 와 달라.”라는 전통문을 보내왔다. 내가 회담 준비에 들어가자 외교부는 뭐라도 해야 된다고 생각했는지 ‘슈퍼파워 대응 방안’ 등의 자료를 만들어줬지만, 별 도움은 되지 않았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양국 대통령은 경제협력을 한 후 수교한다고 합의했으나 마슬류코프를 만난 나는 “수교 후에 경협을 해야만 한다.”는 말을 꺼냈다. 그리고 “소련은 대통령이 결정하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한국은 국회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국회는 국민의 동의를 구해야 하니 대통령도 국민의 뜻을 따라야 한다. 우리 국민들은 서로 인정하지 않는 나라끼리 무슨 돈거래냔 의심을 할 수도 있다”는 설명을 덧붙였다. 이어 “경협은 2차 서울회담에서 반드시 성사시킬 것을 약속한다. 한국이 슈퍼파워인 소련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고 부연한 후 고르비의 답을 받아온 후 회담을 진행하자고 버텼다.
다음날 마슐르코프는 ‘한소수교를 경협보다 먼저 해도 좋다’는 고르비의 답을 가지고 회담장에 나타났다. 나는 이를 내가 아닌 소련 부총리 입으로 발표하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날 우리 측이 리셉센을 열기로 돼 있었기에 우리를 수행 취재하고 있는 KBS 팀에게 마슐리코프를 인터뷰해 수교 확정을 받아내 보라고 한 것이다. 마슐리코프는 KBS 카메라 앞에서 한소 수교 사실을 알렸는데 이것이 바로 9시 뉴스로 방영돼,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그해 9월 말 양국은 뉴욕에서 수교협정을 체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력을 기울인 것이 중국과의 수교인데 중국은 더 꿈쩍을 하지 않았다. 중국과의 수교에 관해 정운찬 서울대 교수(총리 역임)등 몇몇 경제학자들이 수교 전 중국을 방문해 ‘한국 경제 개발 모델을 설명했다’며 한중 수교의 가교역할을 자임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그들 때문에 한국과 수교한 것은 아니다. 79년 개혁·개방을 선택한 등소평(鄧小平)은 싱가포르를 모델로 삼기 위해 이광요(李光耀) 총리를 두 번이나 찾아갔었다. 그런 등소평에게 이 총리는 ‘박정희 식 경제개발을 하는 것이 좋다’는 충고를 했다. 민주화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시장경제를 도입해도 경제개발에 성공할 수 있다는 암시를 준 것이다.
그리고 중국은 암암리에 박정희 경제 모델을 연구해 개혁·개방을 추진해 성공시키고 있었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학자들을 초청해 ‘추가할 것이 있는지’ 이야기를 들어본 것이다. 중국에게 박정희 모델은 익숙한 것이었기에, 92년 중국이 한국의 경제개발을 배우기 위해 한국과 수교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른 이야기가 된다.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직후인 8월 20일쯤 노 대통령이 나를 불러 “등소평의 아들로 중국장애인협회장인 등박방(鄧樸方)이 조선일보 방우영 사장을 초정했는데 그 일행에 묻어 비밀리에 중국에 다녀오라. 나와 비서실장만 알고 있겠다.”라고 했다. 나는 ‘중국이 나를 지명한 것은 내가 한소수교에 깊이 관련된 것을 알고, 수교과정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내기 위한 것’으로 추정했다. 북경 조어대에 머물게 되 나는 등소평과 함께 원로회의 멤버로 경제문제를 주로 담당해온 박일파(薄一波)를 만나 2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그는 “한국이 중국에 접근하는 방식은 ‘북경 하늘에 먹구름이 몰려오고 천둥 번개가 쳐도 비는 내리지 않는 형태다.”라고 말했다(사실 북경은 건조지역이라 천둥 번개가 쳐도 비가 내리지 않을 때가 많다).
한국이 급하게 추진하는 방식으로는 한중수교가 이루어 질 수 없다는 말로 들렸다. 한국이 잘 살게 되었다고 중국 보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말라는 의미로도 들렸다. 그리고 중국과 북한은 혈맹관계임을 강조했다. 중국이 북한과의 관계를 상당히 중요시한다고 강조한 것이다. 서울로 돌아온 나는 대통령께 “한중 수교를 서둘지 말자. 당분간 냉각기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보고했다.

 

 


한중 수교 명분 필요로 한 중국

 

 

그리고 1년여가 지난 91년 9월 17일 남북한 동시 UN 가입이 이루어졌다. 임기만료가 가까워지자 노 대통령은 중국과의 수교를 해 북방정책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의지를 강하게 내비쳤다. 등소평과 강택민(江澤民)의 결심 없이 이는 불가능한데, 우리는 두 사라에게 노 대통령의 의사를 전달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슐츠 전장관이 등소평의 초청을 받아 중국을 방문하는 길에 서울에 들리게 되었다. 나는 노대통령에게 이 기회를 이용하자고 말했다. 노대통령은 슐츠와의 면담에서 “중국과의 수교를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슐츠는 “그러면 대만은요?”하고 물었다. 노 대통령이 “중국과 수교한 다른 나라들처럼 단교할 수밖에 없다”고 하자,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북경으로 떠났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나에게 전화로 “오는 11월 서울에서 APEC 외무장관회담을 하지요. 그때 전기침(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선물을 들고 갈 거요.”라고 했다. 11월 서울에 온 전기침은 대통령 단독 면담을 요청하더니 노 대통령에게 “한중 수교 실무회담을 해도 좋다”라고 했다. 중국은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 가입을 했으니 한국과 수교해도 북한을 거슬리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듯 중국은 북한을 의식하고 북한을 자극하지 않을 명분을 찾으려한 것이다. 92년 봄부터 양국은 실무회담을 해, 8월 24일 대사급 수교를 했다.
내가 한소, 한중 수교 뒷이야기를 처음으로 밝힌 것은 강대국의 생리를 보여주기 위해서이다. 강대국의 생리를 알아야 그들을 상대로 한 외교를 잘 할 수 있다. 그들은 국익에 도움이 되거나 명분이 있어야 움직인다. 한중 수교 24년이 지난 지금 양국간 교역은 2274억 달러에 이르렀다(2015년). 중국은 한국의 최대 교역국, 한국은 중국의 네 번째 무역국이 된 것이다. 때문에 우리는 중국과 관계가 좋아졌다고 생각하는데 이는 오산이다. 중국을 잘 다루려면 우리는 중국의 역사와 정치문화를 꿰뚫어 보고 있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시진핑(習近平)이 환대해주니 중국을 너무 우호적으로 본 것 같다. 중국이 립 서비스로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고 하는 것과 중국이 실질적으로 원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중국은 북한이 핵 비확산과 NPT를 위반한 것으로 보고 제재하지만 외교안보상으로는 다른 생각을 한다. 중국의 속내를 알려면 그들의 전략이 드러났던 역사를 살펴야 한다.

 

 


중국은 북한 포기하지 않는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미국은 일본을 어떻게 항복시킬 것인가를 놓고 고민했다. 그때 주목한 것이 만주국에 주둔해 있는 100여만 명의 일본 관동군이었다. 관동군은 노몬한 사건 등을 통해 소련 극동군과 대립하고 있었으나, 41년 체결한 일·소 중립조약 때문에 소련군과 전투를 하지 않아, 고스란히 전력(戰力)이 보존돼 있었다. 미국은 관동군이 일본 본토로 옮겨와 방어선을 치면 일본을 항복시키기 어렵다고 보고, 소련에 관동군을 쳐 달라고 요청했다.
‘약은’ 스탈린은 일·소 중립조약을 이유로 이를 거절하다가,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하해 결정적인 승기를 잡자, 8월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포격을 가했다. 그리고 8월15일 일본이 항복하자 극동군을 만주로 진입시켜 항복한 관동군을 무장해제 하는 영광을 누렸다. 소련은 만주국의 황제인 푸이[溥儀)] 체포해 하바로브스크에 수감하고, 관동군에게 빼앗은 무기는 연안(延安)으로 도주해 있던 중국 공산군에 몰래 공급했다. 스탈린은 이 무기로 공산군이 국민당 군을 밀어붙여 북중국을 차지할 것을 기대했다.
스탈린은 중국을 분단시켜 놓아야 장차 중국을 다루는 것이 쉽다고 봤던 것이다. 그런데 모택동(毛澤東)은 운이 좋았는지 장개석 군을 대륙에서 밀어내고 통일을 해버렸다(1949). 그해 12월 모스크바를 방문한 모택동은 거만하고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소련은 그러한 중국을 견제하려면 만주국을 부활시키는 것이 낫다고 보고, 1950년 푸이를 석방해 중국으로 돌아가게 했다. 모택동은 스탈링의 속셈을 간파하고 돌아온 푸이를 바로 체포해 무순(撫順)전범관리소에 수감해버렸다. 푸이를 중심으로 만주족이 세를 결집할 틈을 주지 않은 것이다.
모든 것이 실패하자 중국의 힘을 소진시킬 마지막 방법으로 스탈린이 선택한 것이 김일성으로 하여금 6·25전쟁을 도발하게 하는 것이었다. 북한군이 공격하자 유엔은 미국 주도로 북한을 침략자로 규정하고 사상 최초로 유엔군을 결성했는데, 이는 소련이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기에 가능했다. 그러한 결정을 내릴 때 말리크 유엔주재 소련대사는 안보리에 불참했는데, 이는 유엔군을 결성하게 하려는 스탈린의 계략이었다.

 

 


통일하려면 똑똑한 외교장관 필요

 

 

그러한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진을 하자 위기를 느낀 모택동은 팽덕회(彭德懷)로 하여금 인민지원군을 이끌고 참전하게 했다. 스탈린이 기대한 대로 중국의 힘을 소진시킬 기회를 잡은 것이다. 6·25전쟁에서 중국군은 36여만 명이 희생되었으나 중국은 힘을 잃지 않아 분열되지 않았다. 그때 위구르와 티베트 등의 독립 노력은 너무 미약했고, 확전을 두려워한 미국은 대만의 반격을 억제했다. 모택동의 그러한 자신감을 75년 7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2차 공산당 비밀대회에서 화려하게 과시했다.
수정주의를 채택한 흐루시초프를 앞에 둔 모택통은 ‘중국이 소련보다 낫다’는 의미로 “동풍이 서풍을 능가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소련 측은 ‘동방에 있는 소련이 서방국가를 능가한다.’는 것으로 이해해 박수를 쳤다. 소련은 중국의 ‘언어 외교’를 간파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기억이 있어 나는 중국과 러시아는 전쟁할 수도 있다고 본다. 그때 중국이나 소련이 가장 먼저 접수해할 지역이 북한이 된다. 북한을 장악해야 중국은 바다를 활용해 소련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거꾸로 소련이 북한을 차지하면 북경이 위태로워진다.
이러하니 중국은 북한이 핵무장을 해도 절대로 북한을 괄시하지 않는다. 그러한 중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과 미국 사이에 있는 인구 5천만에 10만 평방 km의 작은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이러한 우리나라가 살아 나가려면 외교안보를 정말 잘해야 한다. 외교안보는 고도의 전문성을 요하는 분야이기에 국민 대중이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고도의 전문가들이 책임을 지고 해나가야 한다. 이러 점에서 사드 배치를 놓고 이러저러한 이야기가 나오는 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종횡무진, 역사에서 전쟁으로, 경제에서 외교로, 경험에서 지혜로, 김종인 대표의 이야기는 거침이 없었다--사진 조영철 차장

 

 


제2부 더민주, 受權정당이 되려면 외교안보 제대로 알아야

 

 

 

 


슈퍼파워인 미국 경시하면…

 

 

외교안보와 관련해 한 가지 더 한심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90년 8월 2일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해 1차 걸프전이 일어났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에서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다국적군 구성에 들어갔다. 안보리에서 그러한 결정을 할 때 소련과 중국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전세계가 이라크 응징에 동참하게 된 것인데 노태우 정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주사파인 NL계열이 주도한 반미(反美)시위가 너무 거셌고, 미국이 한국이 불공정 무역을 한다며 301조 적용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미국도 그것을 봤는지 한국에 파병 요청을 하지 않았다.
다국적군에 참여하는 나라가 42개국이 된 91년 1월 17일, 미국은 이라크를 치는 ‘사막의 폭풍’ 작전을 시작했다. 소련과의 경협 문제에 몰두해 있던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긴박하게 변화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대한민국이 당당히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자리 잡으려면 이라크 파병에 동참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 대통령을 찾아가 “6·25전쟁 참전 16개국 가운데 12개국이 파병했는데 우리는 왜 안 보내느냐?”고 물었더니, “외교부와 국방부가 가만히 있어서 그래. 당신이 나서서 분위기를 좀 만들어봐.”라고 했다. 그 길로 노재봉 총리를 찾아가 “한국군 파병 분위기를 만들자”고 했더니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그리고 서동권 안기부장에 전화를 걸었더니 “우리가 왜 참전해?”하고 반문을 하더니만, 곧 동의하고 외교장관, 국방장관 외교안보수석, 경제부총리를 불러 같이 회의하자고 했다. 회의장에 온 이상옥 외교장관은 “그레그 주한미대사의 요청이 없었다”, 이종구 국방장관은 “한미연합사령관의 요청이 없었다”는 요지의 설명을 했다. 나는 두 장관에게 다시 한 번 미국의 진의를 알아봐 달라고 했다. 두 장관이 각각 미국대사와 연합사령관을 만난 뒤 이라크 파병을 논의하기 위한 대통령 주제 회의가 열렸다. 그 자리에서도 두 장관은 종전과 같은 말을 되풀이 했다.
답답한 마음에 나는 외교장관을 향해 “그레그 대사를 만났을 때 그가 했던 말을 그대로 전해달라”고 했다. 이장관은 “헤어질 때 그레그 대사가 한국은 일본처럼 되지 말라는 말을 했다”라고 했다. 그때 일본은 미국의 파병 요청을 묵살하고 130억 달러를 내는 것으로 넘어간다는 결정을 한 다음이었다. 나는 “똑똑히 봐라. 미국의 진심이 무엇인지…. 우리는 전투부대도 아닌 수송기 5대에 의료지원단을 보내는 것인데 왜 못 보내느냐”고 강하게 주장해 회의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대통령이 이라크 파병을 결심한 것인데, 한국군이 사우디에 도착한 이틀 뒤 쿠웨이트를 점령한 이라크군을 격퇴시키는 사막의 폭풍 작전이 종료되었다.
아슬아슬하게 한국은 전쟁에 참전한 국가가 된 것이다. 이러한 참전 덕분에 91년 7월 노태우 대통령은 건국 후 처음으로 국빈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91년 9월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게 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우리나라는 정말로 노련하고 똑똑한 외무장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거듭한다. 통일, 통일하는데, 통일한국이 친미국가로 있으면 중국이 좋아하겠는가. 통일한국이 친중노선을 걸으면 미국이 발끈할 것이다. 그러니 미국과 중국은 불편이 초래될 수 있는 통일에 찬성하지 않는다. 중국과 미국을 아우르는 노련하고 똑똑한 외교장관이 있어야 우리는 통일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외교안보는 국내 아닌 외국 상대하는 것

 

 

사드 배치는 우리정부만의 의사가 아니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해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이뤄진 ‘약속’이다. 국내 문제가 아닌 외국과의 문제인 것이니, 우리 정부는 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외국을 상대로 한 이러한 ‘약속’을 놓고 국내에 불필요한 분란은 만드는 것은 말 어리석다. 약속을 어기면 우리의 생존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왜 생각하지 못하는가. 수권(受權)정당이 되겠다는 생각이 있으면 외교안보에 대해서 경솔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중국과 미국의 힘을 정확히 보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북한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달라”고 할 때마다 중국은 “피를 같이 한 너희도 하지 못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우리가 풀지 못한 우리 문제를 외부인 중국이 풀어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 자체가 문제이다. 우리는 중국의 국익이 무엇인지, 그러한 중국을 다룰 수 있는 친구가 누구인지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한다.
반미를 외치면 국민지지가 많을 것으로 보는 정치인들이 적지 않는데, 이들은 미국에 대항했던 일본의 변신을 잘 보아야 한다. 패전의 역사가 있어 일본 엘리트들은 가슴 깊은 곳에 반미를 하고픈 욕망이 숨어 있다. 1980년대 일본 경제가 세계 최고를 구가하자 일본에서는 ‘노 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아키오 모리타)’등이 출간되는 등 반미정서가 노골화됐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을 환율 조작국으로 걸어 일거에 일본 경제를 멈춰세웠다. 지금 일본이 말하고 있는 ‘잃어버린 20년’이 나오게 한 것이다.
그런데도 일본은 전략 수정을 하지 않고 가다가, 중국이 G2로 부상하는 위기를 맞았다. 그러한 중국은 팽창 의지를 내비치며 아시아를 냉전으로 몰고 가고 있다. 그러한 때 아베가 나타나 반중(反中)을 위한 친미를 선택하자, 비로소 미국은 환율을 풀어주었다. 그래서 시작된 것이 ‘아베노믹스’인데 잃어버린 20년이 너무 길었고 후쿠시마 사고까지 겹쳐 일본은 불황을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일본을 보며 우리의 대미 외교를 점검해야 한다.
나는 독일에서 공부했으니 독일의 일도 예로 들겠다. 1972년 미·중 교류로 데탕트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서독은 동독과 군축협상에 들어갔다. 그런데 76년 베트남 통일을 시작으로 인도차이나 반도가 공산화되면서 다시 냉전 기운이 유럽을 덮었다. 그러한 때 소련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일원인 동독에 핵탄두를 탑재한 SS-20 중거리 지대지 미사일을 배치했다. 그러자 NATO 회원국인 서독의 슈미트 총리는 미국과 협의해 중거리 핵미사일인 퍼싱-2의 서독 배치를 결정했다.

 

 


포용적 경제하면서 통일로 가야

 

 

그 바람에 미국과 소련이 하던 중거리핵협상(INF)이 중단되고 서독에서는 퍼싱-2 배치에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지만, 슈미트 정권은 안보와 관련된 것이라며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박근혜 정권도 한미상호방위조약에 근거한 사드배치를 결정했으니 이를 원점으로 돌릴 수가 없다. 설령 더민주당이 2018년 집권하게 되더라도, 이는 되돌릴 수 없는 미국과 한국간의 약속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약속이 무너지면 한국 안보와 번영의 근간인 한미동맹이 무너질 수 있다. 퍼싱-2 사태를 겪은 서독이 15여년이 지나 통일 했듯이, 사드 사태를 치른 대한민국이 얼마 후 통일할 수도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북한 경제는 매우 취약하고, 중국은 거듭된 성장으로 G2선까지 갔다. 이것이 국제정세라면 그 속에서 우리의 해법을 찾아가야 한다. 그래서 나는 경제 민주화와 조화(調和)경제를 주장한다. 민주주의가 중우(衆愚)정치로 가지 않은 것은 의회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있기 때문이다. 시장경제는 경쟁을 인정하는 자유를 추구한다. 그런데 완전경쟁은 ‘승자 독식’의 약육강식을 만드니, 힘이 없는 이들은 살아남기 어렵다. 그래서 자유 속에서도 평등을 강조하는 것이다.
완전한 평등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공산주의자들도 절대로 완전한 평등을 만들지 못한다. 그래서 포용적 경제를 하자고 나는 주장한다. 시기와 질투가 일어날 정도의 경쟁은 허용하되, 그 경쟁이 지나쳐 싸움이 일어날 정도의 자유는 허용하지 말자는 것이다. 공권력을 투입하지 않아도 되는 범위까지의 자유와 경쟁은 용인하되, 그 이상은 있는 자가 내놓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프러시아를 강국으로 만들어 독일을 통일하고 숙적 프랑스를 격파해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프러시아의 왕 빌헬름 1세를 독일황제로 취임시킨 이가 비스마르크 총리이다. 그는 프러시아 경제를 발전시켜 국민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 노련한 안목으로 국제정치를 주물렀다. 그가 하도 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빌헬름 1세의 세자도 아버지에게 “비스마르크가 마음대로 한다.”고 고자질을 했다. 그러나 빌헬름 1세는 “그가 내가 하는 것보다 더 잘 하니 나둬 보자.”하며 기다려주었다. 인재를 인정해준 빌헬름 1세의 안목이 독일 통일과 독일의 영광을 만들었다.
지금 독일이 잘 나가는 것은 2차 대전 후 독일 체제를 만든 아데나워와 엘하르트 때문이다. 엘하르트는 아데나워 총리 밑에서 경제담당 장관을 했는데, 두 사람 사이는 매우 나빴다. 주변에서는 아데나워에게 “엘하라르트를 자르라”고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아데나워는 “어쩌냐. 그가 경제를 잘 하고 있고 국민이 그를 원하고 있는데….”하며 기다려주었다. 덕분에 전후 독일경제는 부흥했고 엘하르트는 아데나워 후임 총리가 되었다. 그때 사람들은 엘하르트가 무소속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알았다. 기민당의 아데나워는 당적(黨籍)이 아니라 능력을 보고 엘하르트를 선택했던 것이다. 이처럼 중요한 것이 인재를 보고 포용하는 지도자의 안목이다.

 

 


受權정당이 되려면 변해야 한다

 

 

우리 상황은 휴전이지 평화가 아니다. 경제발전을 50~60년 했다고 안보를 잊고 한미동맹을 잊는다면, 통일은커녕 우리의 미래도 암울해진다. 외교와 국방은 정부가 하는 것이고, 한 번 결정되면 고치지 못하는 것이다. 외교 안보는 국민이나 야당이 아니고 외국이 상대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외교 국방문제를 놓고 너무 오랜 시간 논란을 만드는 것은 국익에 도움되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비스마르크와 같은 대가(大家)다. 그러한 대가가 있어야 경제를 성장시키면서 국민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
우리 당에서는 비스마르크와 같은 주장을 내놓은 이와 그들을 알아보는 이를 내놓아 국민을 사로잡아야 한다. 그래야 수권정당이 될 수 있다. 또 하나 한국의 외교안보 전략은 오는 11월에 있을 미국 대선 결과를 보고나서 정립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미국이 어떤 방향으로 갈 지 알아야 우리의 전략을 세울 수 있다. 외교 안보는 국민의 안위가 걸린 문제이므로 중구난방(衆口難防)으로 달려가게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존에 영향을 끼치는 나라가 어떻게 가는지 정치하게 살펴보면서 해야 한다.
안으로는 포용적 경제로 경제민주화를 이뤄 단합을 이루고 밖으로는 외교를 잘해 통일의 기회를 잡아야 한다. 통일은 예고를 하고 오지 않는다. 어느 날 소리 없이 찾아온다. 그 기회를 혼란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만들지 않으려면, 우리 당은 외교와 경제에 대해 밝은 눈을 가진 이를 찾아내야 한다.



이정훈 에 대해

hoon@donga.com 주간동아 편집장과 논설위원 등을 거친 동아일보 기자. 묵직하고 심도 있는 기사를 많이 써 한국기자상과 연세언론상,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과 정보 원자력 우주 해양 산악 역사에 관심이 많고 통일을 지론으로 갖고 있다. 천안함 정치학, 연평도 통일론, 한국의 핵 주권, 공작, 발로 쓴 반동북공정 등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