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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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향기] 신동기 박사의 "간절한 필요가 창의를 낳는다"

鶴山 徐 仁 2014. 9. 23. 21:03
간절한 필요가 창의를 낳는다
신동기

유목민족은 성을 쌓지 않는다.
정주는 안주를 낳고 안주는 안락을 낳고 안락은 결국 죽음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칭기스칸이 고비사막을 건너 서하 지역을 점령했을 때 처음으로 성곽과 마주쳤다.
질풍 같은 속도와 무자비한 용맹을 자랑하는 몽골군도 처음 대하는 성곽에는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성곽을 처음 대하는 만큼 당연히 공성 무기 같은 것도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말이 달리는 속도로 유라시아 대륙을 마음껏 유린한 칭기스칸에게 성곽 하나로 시간을 허비한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다.

칭기스칸(1155년경-1227년)은 서하의 왕에게 고양이 천마리와 제비 천마리를 바치면 철군을 하겠노라고 알린다.
서하의 왕은 너무 가벼운 철군 조건에, 서둘러 제비 천마리와 고양이 천마리를 잡아 칭기스칸에게 바친다.
칭기스칸은 고양이와 제비 꼬리에 솜뭉치를 달아 그 솜뭉치에 불을 붙여 고양이와 제비들을 다시 놓아준다.
고양이와 제비들은 자기들이 살았던 성안으로 부지런히 찾아간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성 안 이곳저곳에 불이 오르기 시작한다.
서하의 병사들이 불을 상대하면서 칭기스칸군을 동시에 맞서기에는 무리였다.
서하의 성은 칭기스칸 군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춘추시대(BC771-BC403년)와 전국시대(BC403-BC221년) 내내 춘추5패와 전국7웅 강대국에 모두 들었던 제나라지만 한 때는 연나라의 공격을 받아 70여개 성 중에서 거와 즉묵이라는 2개 성만 제외한 나머지 성을 모두 빼앗겼던 적이 있었다.
제나라는 지금의 산뚱반도 지역이고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주변으로 제나라와 연나라는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
즉묵성을 이끌던 대부가 싸움에서 죽자 사람들은 전단이란 인물을 받들어 장군으로 삼았다.
전단은 여러 가지 계략을 써서 연나라 군기를 흐트러지게 하면서, 즉묵성의 제나라 사람들은 더욱 전의를 굳게 다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포위를 벗어나기 위한 기발한 아이디어를 짜낸다.
붉은 비단으로 소 옷을 만들어 거기에 오색의 용무늬를 놓아 천마리의 소에다 입힌 다음 칼과 창을 소뿔에 묶어메고, 꼬리에는 기름을 부은 잘 마른 갈대 다발을 묶게 한다.
그리고 성벽에 소가 빠져나갈만한 구멍을 뚫은 다음 한밤중에 소 꼬리의 갈대 다발에 불을 붙여 그 구멍 밖으로 소를 쫓아 내보냈다.
천마리의 소 뒤는 힘센 장사 5천명이 따랐다.
꼬리에 불이 붙자 놀란 소는 미친 듯이 연나라 진중으로 돌진한다.
한밤중 폭풍 같은 소떼 출연에 기겁을 한 연나라 병사들은 방향을 잡지 못하고 허둥거리고, 이 틈을 타 제나라 병사들의 살육전이 전개된다.

살아남은 연나라 병사들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운 어둠 속에서 정신없이 도망갔다.
승세를 탄 제나라 병사들은 연나라 군사들을 모두 쫓아내고 제나라의 70개 성을 다시 되찾는다.
제나라 양왕은 전단에게 봉토를 지급하고 그를 안평군이라 부르게 했다
 
한 시가 급하게 서진을 해야 하는 칭기스칸이나, 깜빡거리며 꺼져가는 촛불과 같은 조국을 되살리지 않으면 안되는 전단의 절박함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만들어 낸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