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사들은 앞으로 20년간 비행기를 늘리면서 연간 2만5000명씩 총 49만8000명의 조종사를 추가로 고용해야 할 것임. 특히 항공시장이 급성장하고 있는 아시아에서는 조종사 19만2300명이 필요할 것으로 예측됨.’
지난 8월 31일 항공기 제작사인 보잉이 공개한 분석보고서 중 아시아 관련 부분을 간추린 내용이다. 세계 6위(항공운송 순위) 수준인 한국의 항공기 수는 2003년 286대에서 601대(2013년 4월 기준)로, 10년 만에 두 배 이상 증가했다.
하지만 조종사 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종사 공급 체계는 여전히 부실한 실정이다.
현재 국내에서 조종사를 육성하는 기관은 ▶군 교육기관(사관학교 및 장교 과정) ▶항공운항 관련 대학 ▶민간 교육기관 등 세 곳이다. 이 중 조종사가 가장 많이 배출되는 곳은 군(軍)이다. 2012년 12월 31일 기준, 전체 항공사 조종사 4515명 중 군 출신(1922명)이 가장 많다. 항공사에서 자체 양성한 조종사가 그 다음(1363명)이며 그 외 민간 경력자 604명, 외국인 581명, 기관사(조종사 지시에 따라 엔진·전기·유압 등을 조종하는 승무원) 출신이 45명이다.
전문가들은 “조종사 공급이 군 출신 인사 위주로 이뤄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한 항공 전문가는 “소령급 조종사를 키우는 데 비용이 120억원 정도 든다. 그런데 민간 항공사로 가기 위해 정년 전에 희망 전역하는 조종사가 많다. 민간에서 우수한 조종사를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이 없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2011년 공군본부가 홍재형 당시 민주당 의원에게 제출한 국감 자료에 따르면 2006년부터 2010년까지 5년간 전역한 공군 조종사 613명 중 598명이 민간 항공사로 이직했다. 향후 공군 전투기 감소로 인해 전체 공군 조종사 수가 줄어들 것으로 보여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현재 550여 대인 공군 전투기는 2020년께 350~400대쯤으로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항공사에 취업할 수 있는 사업용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은 많다. 지난해 507명이 따는 등 사업용 자격증을 가진 인원은 총 1만91명에 이른다. 하지만 여기에는 허수가 많다. 전역한 조종사들의 수도 여기에 포함된다. 2003년 국내 최초의 저가 항공사인 ‘한성항공’을 설립한 뒤 현재는 조종사 훈련원을 운영 중인 이덕형 아시아조종사교육원 대표의 말이다.
“운전면허증을 땄다고 모두 버스 기사가 될 수 없다. 사업용 자격증을 따는 사람 중에서도 나이가 많은 사람, 범죄 이력이 있는 사람, 조종사 전역자 등은 항공사에 취업할 수 없다. 이런 사람들을 고려할 때 대략 75% 이상이 허수라고 볼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중간 교육 체계’가 미흡하다는 점이다. 사업용 자격증을 딴 뒤에도 항공사에서 원하는 숙련된 조종사가 되기 위해선 추가 교육이 필요한 게 현실이다. 보통 200시간 정도를 비행하면 사업용 자격증을 충분히 딸 수 있다(민간 교육기관 이용 시 비용 4000만~6000만원, 기간 1년~1년6개월 소요). 하지만 저가항공사라도 취업하기 위해선 실제로는 최소 500시간이 필요하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적게는 300시간, 많게는 700시간 가까이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를 좁힐 수 있는 통로는 크게 세 갈래뿐이다. ▶추가 비용을 들여 민간 교육기관을 통해 비행하거나 ▶교육기관에 교관으로 취업하거나 ▶항공기 사용 업체(항공사진 촬영 업체 등)에 취직하는 방법뿐이다. 민간 교육기관은 9곳(훈련기 44대)이 운영 중인데, 공항 이용에 제약이 많고 영세한 탓에 감당할 수 있는 수요가 얼마 되지 않는다. 항공대·한서대가 위탁경영 중인 울진 비행훈련원도 있지만 2010년 7월 개원 후 항공사에 취업한 인원은 44명뿐이다. 항공사들이 자체 인력 양성을 하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줄어들고 있다. 이호일 전 아시아나항공 운항본부장은 “항공사도 기업이다 보니 많은 비용을 들이려 하지 않는다. 실제로 2010년 이후 자체 조종사를 양성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자격증 따는 데 보통 6000만원 들어
이렇다 보니 매년 200명 정도의 조종사 희망자가 1억원이 넘는 비용을 들여 미국 같은 항공 선진국에서 자격증을 취득한 후 현지 취업을 통해 비행시간을 쌓고 있다. 최근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조종사 교육을 받고 있는 김동진(28·경기도 남양주시)씨는 “부양가족이 있어 외국에 갈 순 없고, 자격증 취득 후 교관을 할 생각인데 쉽지 않은 게 사실이다. 시간·돈을 다 걸었는데 미래는 불투명하다”고 말했다.
중간 교육 체계의 부실이라는 ‘빈틈’을 이용해 불법 소지가 있는 민간 교육기관도 나오고 있다. 서울 서초동에 있는 한 민간 조종사 교육원은 항공기 사용 사업승인도 받지 않은 채 영업을 하고 있다. 직접 방문해 문의하자 “사업용 자격증을 따려면 6000만원 정도 든다. 올해 안에 등록하면 10% 할인도 해주고 분납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불법 운영’에 대해 묻자 교육원 대표는 “정식으로 영업하는 게 아니며, 평소 알던 아이들을 교육생으로 등록해 시험 삼아 일부 교육만 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국토교통위원회 소속인 오병윤 의원(통합진보당)은 “항공산업은 국가전략산업이자 경제 원동력이다. 저가 항공사를 지원하고 교육기관의 교육과정 현실화를 통해 숙련 조종사 양성을 위한 생태계를 조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항공공사 경영전략팀 정민철 과장은 “국토부와 항공공사에서도 심각성을 깨닫고 있다. 유휴 지방 공항을 교육에 활용하는 등 해결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