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5시30분 서울 중림동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사장회의실. 약속 시간을 30분 넘긴 하성용(62) 사장이 뛰어오다시피 들어왔다. “아이고 미안합니다. 늦지 않으려 서둘렀는데 (경북) 예천에서 오다보니….”
그는 지난 12일 이라크와 초음속 경공격기 T-50IQ(T-50의 이라크 수출 모델) 24대의 수출 계약을 체결한 주역이다. 아직 정세가 불안한 이라크에서 8㎏이 넘는 방탄조끼를 입고 최고위 인사들을 만나 T-50IQ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다닌 결과였다.
이날 오전엔 회사에 들러 업무를 챙긴 뒤 강원도 원주 와 예천 공군기지를 돌고 부랴부랴 상경했다. 이라크와의 수출 계약 성사에 큰 힘이 됐던 공군에 고마움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그의 에쿠스 승용차의 이날 운행 거리는 472㎞.
“이라크에 수출키로 한 T-50IQ는 T-50을 개조한 경공격기다. T-50이 세계 유일의 초음속 훈련기라면 T-50IQ는 여기에 레이더와 미사일·폭탄·기총을 장착해 훈련기로도 쓰고 유사시 공격기로도 사용 가능한 전투기라고 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에 우리 기술로 만든 초음속 항공기를 첫 수출한 것이라면 이라크에는 전투기급 항공기를 처음 수출한 셈이다. 중동 지역에 우리 항공기의 수출 교두보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 더욱 의의가 있다.”
KAI는 지난해 T-50의 인도네시아 수출에 앞서 프로펠러 훈련기인 KT-1을 동남아시아(인도네시아, 2001년 17대)와 유럽(터키, 2007년 40대), 남미(페루, 2012년 20대)에 판 적이 있다. 이번 계약 성사로 두 차례의 전쟁 이후 한 대의 전투기도 없는 이라크에 미국의 F-16과 함께 우리 전투기가 들어가게 됐다. 무엇보다 앞으로 수출을 확대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는 데 하 사장은 의미를 두고 있다.
KAI는 이라크와의 협상 과정에 사운을 걸다시피 했다. 세계 각국은 차세대 경제성장 동력을 항공산업으로 꼽고 있다. 자연 이라크는 치열한 경쟁의 무대 중 하나였다. 항공 선진국으로 꼽히는 영국(HAWK-128), 체코(L-159), 러시아(YAK-130)도 수주 전쟁에 뛰어들었다. 2011년 말라키 이라크 총리 방한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했던 상황이 지난해 이라크 현지 언론에 체코(L-159) 훈련기로 결정됐다는 보도가 나온 이후 급변했다. 이전까진 잘 만나주던 이라크 관리들이 면담은 물론이고 전화마저 피했다. 그래서 무조건 찾아갔다. 구걸하듯 기다리기 일쑤였다. 거의 포기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가 막판 뒤집기에 성공했다.
- 반전의 계기는.
“이라크 사람들은 한국에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1970년대 중동에서 건설 붐이 일었을 때 한국 근로자들의 근면함과 꼼꼼함에 좋은 인상을 받은 것 같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다 보니 T-50에 대한 견제가 심했다. 우호적이었던 말라키 총리마저 생각이 바뀌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5월 박근혜 대통령이 말라키 총리에게 친서를 보낸 게 분위기 전환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평가한다. ‘계약은 양국의 단순한 상업적 거래가 아니라 우호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결정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 방탄조끼까지 입고 바그다드를 누볐다던데.
"이후 분위기 변화가 감지됐지만 여전히 쉽지 않은 게임이었다. (경쟁국 쪽에선) 항공기 성능에 문제가 있다는 험담도 있었고, 납기일을 맞추지 못할 것이란 주장도 있었다. 섭씨 40도에 육박했지만 8㎏이 넘는 방탄조끼를 입고, 양쪽에는 기관총으로 무장한 병력을 대동하고 바그다드 시내를 누볐다. 총리 면담을 위해 기다리며 방탄조끼를 벗었더니 와이셔츠와 양복이 땀 범벅이 됐고, 구깃구깃해져 거의 노숙자와 다름이 없었다. 이라크가 위험하다며 경쟁사들은 방문을 꺼리는데 내가 목숨을 내놓고 다니다 보니 감명을 줬던 것 같다. 여기에 방위사업청과 공군의 지속적인 지원과 관심이 큰 힘이 됐다. 대한민국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인터뷰 내내 항공산업의 가치를 역설했다. 자동차의 본고장인 미국이 일본과 유럽·한국에 안방을 내주고도 항공산업만큼은 철저히 지키는 전략을 펴는 이유도 높은 부가가치와 최신 기술이 적용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정부도 지난해 27억 달러(약 3조원)였던 국내 항공산업시장이 2020년엔 200억 달러(약 21조원)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현재 1만 명인 항공산업 종사자도 7만 명으로 늘어 일자리 창출에 기여할 것이란 예상이다. 이런 예상이 실현되면 우리나라는 2020년 세계 7위권의 항공산업 국가로 도약하게 된다.
현재 KAI는 세계 유일의 초음속 훈련기인 T-50 계열 항공기와 초·중등 훈련용 프로펠러 훈련기 KT-1, 기동헬기 수리온 등을 생산하고 있다. T-50은 당초 훈련기로 개발됐지만 현재 에어쇼에 활용되는 T-50B, 기총과 미사일을 갖춘 TA-50, 레이더와 폭탄·미사일 등을 장착한 경공격기 FA-50 등으로 개조해 ‘로(LOW)급 전투기’로 발전했다. 대형 전투기와 민간 여객기를 제외하곤 모든 제품 생산이 가능한 포트폴리오가 구축됐다.
- 우리나라 항공산업 수준을 평가한다면.
“세계 12번째로 초음속기를 개발한 나라다. 군수산업 선진국에 속하는 이스라엘이나 대만도 항공기 개발을 시도했지만 좌절했다. 우리 주력 전투기인 KF-16을 대체하는 중급 전투기 개발 기술도 보유하고 있다. 최종 심의 단계에 있는 보라매사업(KFX)이 추진되면 훈련기·소형 전투기·중형 전투기를 우리 기술로 만들어 운용하는 나라가 된다. 그렇게 되면 정비 시간이나 경비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 육군에 납품하고 있는 수리온에 이어 소형 공격헬기나 해상작전 헬기 제작 기술도 이미 보유하고 있다. 세계 최고 수준의 F-15 전투기 날개와 아파치 헬기 동체도 우리가 만들어 납품한다. 우리 국민이 매일 이용하는 보잉-787 드림라이너와 A-320에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부품(날개, 동체 일부)이 들어간다. 한 해 8억 달러가량 수출한다. 아직 걸음마 단계지만 속도가 붙고 있어 그야말로 전망이 밝다.”
- 기술은 최고 수준에 근접했다는 얘긴데.
“그렇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이미 70년대 중반부터 항공산업의 전망을 밝게 봤다. 삼성·현대·대우가 사천·창원·서산 등에 대규모 공장을 지어놓고 수많은 시행착오와 막대한 예산을 들여 기술 축적을 해왔다. 매년 적자를 봤지만 기술 개발에 소홀하지 않았다. 그러다 90년대 후반 외환위기를 겪으며 구조조정 차원에서 삼성·현대·대우의 항공 계열사들을 모아 설립된 게 KAI다. 30년 넘게 적자를 보며 투자한 기술이 이제야 빛을 보게 된 셈이다.”
고려대 법대를 나온 그는 재무 전문가다. KAI 부사장 시절이던 2011년에는 채권단에 의해 운영되던 ㈜성동조선에 위기 관리 사장으로 갔다. ‘비행기 회사’(KAI)가 정상화로 접어들자 배를 만들려고 외도를 했다. KAI 재무 이사 시절 돈 빌리러 다니던 모습을 금융권 관계자들이 눈여겨보고 있다가 그에게 선박제조 회사를 맡긴 것이다.
- 법대 출신인데 어떻게 항공회사 사장이 됐나.
“KAI의 탄생과 인연이 있다. 개인적으로 헌법학자가 되고 싶었다. 석사 과정까지 마쳤다. 77년 9월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도교수님이 고혈압으로 갑자기 돌아가셨다. 이듬해 대우중공업 자금부에 입사해 재무담당과 총무담당 이사를 했다. 99년 KAI가 설립되면서 대우 쪽 대표로 KAI에 왔다. 처음 왔더니 통장에 잔액이 없더라. 다들 어려운 상황이라 회사를 합치며 자본을 투자하기로 했는데 여의치 않았다. 은행문이 닳도록 다니며 빌었다. 구조조정을 하며 T-50이 완성돼 회사 상황도 좋아졌다. 올해 1조 9000억원 매출에 1200억원 흑자가 날 것으로 보인다. 회사가 정상화되면서 경영 부문에서 인정을 받았다. 2010년 부사장을 하다 2년 동안 조선소 사장을 하고 지난 5월 사장이 됐다.”
인터뷰 중간에 계속 휴대전화 벨이 울리고, 문자와 카카오톡 메시지가 날아왔다. “많이 바쁜 것 같다”는 질문에 “화장실 갈 시간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연말인 요즘 그는 친구들로부터 “의리 없는 놈” “건방져졌다”는 농담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사장으로 온 지 6개월이 지났지만 아직 임직원들과 회식도 못했다고 한다. 국내외 거래처 담당자들과의 회의와 식사 약속이 줄을 잇고 있어서다. 매출도 늘고 항공산업이 호황을 누리고 있어 사업에 관한 한 고민이 없을 것 같지만 그렇진 않았다. “우리나라 조선업이 발달한 이유는 현대·대우·삼성·STX 등 세계 초일류 기업들이 국내에서 경쟁을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세계 제일이 됐어요. 그런데 KAI는 고군분투하고 있어요. 종업원들에게 시야를 해외로 돌려 경쟁하라는 주문도 하고 있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어요.”
인터뷰는 온풍기를 꺼 한기까지 서린 회의실에서 1시간30분여 동안 진행됐다. 인터뷰를 마친 그는 ‘의리 없는 놈’이란 친구의 전화를 받으며 다시 비행기를 팔러 갔다.
글=정용수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951년생
●경북고, 고려대 법학과 졸업
●대우중공업 재무·인사·노사·총무 담당
●한국항공우주산업 경영지원본부장, 부사장
●성동조선 대표
●현 한국항공우주산업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