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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 文化參考

[스크랩] 고구려 말기 고구려의 서쪽경계

鶴山 徐 仁 2012. 11. 25. 13:36

時契丹李盡忠反叛,其將孫萬榮寇陷河北數州,河內王武懿宗擁兵討之,畏懦不敢進

구당서

거란이진충이 난을 일으켰을때 손만영으로 하여금 황하북쪽의 여러 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게 했다. 이에 하내왕(산서성 서남부)무의종이 병사를 거느리고 토벌하러 갔으나 용기가 없고 거란군이 두려워 감히 진격하지 못했다.

 

 

우적도라는 남송시대 고지도를 보면 요 택이라는 지명이 나온다. 거란은 고기록에 원래 요택사이에 거주했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이 진정 거란의 원거주지 요택인지 의심스러웠는데 구당서를 보면 그것이 맞다는 생각이 든다.

거란의 난때 출동한 당나라사령관은 바로 하내왕이다. 아직도 거란의 영주를 요녕성으로 생각하는 국개학자들은 지도를 잘보고 뉘우치길 바란다. 측천이 바보인가? 거란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하내왕을 출동시키게!!! 요택이 왜 중요하냐면 이세민이 도망친 곳도 요택이고 고구려와 당나라의 접경지대도 바로 요택이기 떄문이다.

 

고구려가 망한후 당은 고구려의 산서와 하북일부를 차지했다. 그리고 거란은 요택에서 그 동북쪽까지 땅을 얻어 거주하게 되었다.

契丹賊帥孫萬榮寇河北,命懿宗為大總管討之。軍次趙州,用聞賊將至冀州,懿宗懼,便欲棄軍而遁

구당서

거란군 장군 손만영이 하북을 공격하자 의종으로 하여금 대총관으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조주에 가게했다. 그러나 적군이 기주에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는 의종이 겁에 질려 군대를 버리고 도망했다.

 

기주는 청나라떄 기록을 봐도 고기주는 산서성 서부임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이 요와 송 고려의 시대에는 청장하동쪽으로 바뀐다. 당나라시대에는 기주가 여전히 산서성 서부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주는 기주의 남쪽으로 지금도 조주는 하북성서남부와 산서성동부일대이다. 거란군이 사실상 하북과 산서일대를 거의 장악한 것을 알수 있다. 거란이 이렇게 빠르게 산서일대까지 장악한 것을 보면 고루하신 국개학자님들은 거란의 영주가 요녕성이라고 하는 주장이 설득력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孫萬榮別帥何阿小攻陷冀州

구당서

손만영의 별동대장군 하아소가 기주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契丹首領李盡忠、孫萬榮反叛,攻陷營府。默啜遣使上言:「請還河西降戶,即率部落兵馬為國家討擊契丹。」制許之。默啜遂攻討契丹, 

突厥諸部落來降附者,多處之豐、勝、靈、夏、朔、代等六州,謂之降戶。默啜至是,又索此降戶及單于都護府之地,兼請農器、種子。則天初不許,默啜大怨怒,

구당서

이진충과 손만영이 군대를 일으켜 영주부를 함락하자 묵철이 사신을 보내 말하길 하서(황하서부)에 항복한 땅을 되돌려주면 내가 거란을 공격해주겠다 하였다. 이에 측천이 응하였고 묵철이 거란을 공격했다. 옛날에 돌궐여러부락이 당나라에 항복했을때  풍 ,승,

령,하,삭,대등 6개주에 많이 살았다. 그것을 항복한 백성이라 불렀다. 묵철이 말한 항복한 땅이 바로 이것이다. 묵철이 당나라를 도왔으니 선우도호부를 설치하고 동기구와 종자까지 내놓으라고 하니 측천이 짜증나서 싫다고 했다. 이에 묵철이 대노하였다.

 

손만영은 697년에 죽었다.

 

돌궐이 요구한 6주는 위와 같다. 장안바로 근처까지 요구한 것이다.

 

默啜攻陷定州,刺史孫彥高死之,焚燒百姓廬舍,遇害者數千人。魏王承嗣卒。庚子,梁王三思為內史,狄仁傑為納言。九月,建昌王攸寧同鳳閣鸞台平章事。默啜攻陷趙州,

697년구당서

묵철이 정주를 함락시켰다. 중략 묵철이 조주를 함락시켰다.

突厥默啜寇靈州鳴沙縣,靈武軍大總管沙吒忠義逆擊之,官軍敗績,死者三萬。丁巳,突厥進寇原、會等州,掠隴右牧馬萬餘而去。甲申,募能斬默啜者,封授諸大衛大將軍。丙戌,以突厥犯邊,京師亢旱,令減膳徹樂。

706년구당서

묵철이 령주 명사현을 침공했다. 중략 돌궐이 원과 회등여러주를 공격했다.

 

돌궐은 거란을 멸망시키고 힘으로 6주를 차지했다. 돌궐이 발해와 당사이에 끼여 당이 발해를 토벌할 군대를 보내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돌궐의 위세를 짐작할수 있다.

 


  靈州大都督府 隋靈武郡。武德元年,改為靈州總管府,領回樂、弘靜、懷遠、靈武、鳴沙五縣。二年,以鳴沙縣屬西會州。貞觀四年,于回樂縣置回、環二州,並屬靈武都督府。十三年,廢回、環二州,靈州都督入靈、填二州。二十年,鐵勒歸附,於州界置皋蘭、高麗、祁連三州,並屬靈州都督府。

구당서

령주대도독부는 수령무군이다. 무덕원년 령주총관부를 두었고 명사현이 있다. 무덕2년에 명사현을 서회주로 속하게 했다. 정관4년 회락현을 회 ,환두주에 설치했다. (?) 령무도독부에 속하게 했다. 중략 정관20년 철륵이 귀부하자 주에서 경계를 고란,고려,기련3주에 설치했다. 령주도독부에 속하게 했다.

 

기련의 현재위치 

 

 

고란의 현재위치 

 

명사현의 현재위치

 

구당서만 제대로 읽어봐도 고구려의 서쪽 경계를 찾을수 있었다. 그런데 그 어떤 서울대 국사학자도 관심이 없었던것 같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이보다 앞서, 방현령(房玄齡)이 죽을 때에 표문(表文)을 올려 동정(東征)을 간하기를,
“고구려가 가령 신절(臣節)을 어겼다면 마땅히 주벌(誅罰)할 것이요, 백성을 침요(侵擾)하였다면 토멸(討滅)할 것이며, 또 장차 중국의 걱정거리가 될 수 있다면 제거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 가지 조건이 하나도 없는데 이제 부질없이 중국을 괴롭혀서 안으로 전대(前代)를 위해 치욕을 씻고 밖으로 신라를 위해 원수를 갚는다면, 이 어찌 얻는 것은 작고 잃는 것이 큰 것이 아니겠습니까? 원컨대, 폐하께서는 고구려가 스스로 허물을 고쳐서 바다를 넘어 올 병선(兵船)을 불사르고 응모(應募)하는 무리들을 파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제(帝)가 듣지 않았더니, 이때 와서 제가 붕(崩)할 적에, 유조(遺詔)하여 동정을 파하게 하였다
기유년 신라 진덕 여주 3년, 고구려 왕 장 8년, 백제 왕 의자 9년(당(唐) 태종(太宗) 정관(貞觀) 24, 649)
 
 
정관24년은 어떤해냐면 바로 당태종 이세민이 꼴까닥 하던 해이다. 죽기전 유언을 남겨 다시는 고구려를 침공하지 말라고 했다. 호되게 당하고 양만춘의 화살에 맞아 죽게 되면서 천자국 고구려에 대항한 바보같던 짓을 그때가서야 후회한 것이다.
결국 이세민이 죽을때 당과 고구려가 일종의 평화분위기로 가면서 자연스럽게 령주일대를 두나라의 경계로 삼고 더이상 침공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매국노 앞잡이 역할 하느라 바쁘시는 국개학자님들과 일부 추종하는 바보들이 구당서를 읽어보지 않았으니 고구려의 경계에 대해 알리가 있겠는가!!!
당서에 보면 돌궐의 동쪽경계를 흑룡강에 흘러가는 어떤 강이라고 했다. 최치원이 말하길 발해와 돌궐이 만리의 벌판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그러나 두개의 기록은 고구려의 서쪽경계가 아니라 발해의 경계에 대해 기록된 것이고 고구려의 경계는 정확한 기록을 나도 못 발견했다.
그러나 오늘 구당서의 령주 명사현에 관한 기록에서 바로 고구려의 서쪽경계를 찾게 된것이다.
 
추가로 고구려의 서쪽경계는 바로 돌궐과 접했기에 돌궐의 땅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한때 고구려는 서량이 있던 감숙성과 흉노가 있던 천산일대와 토욕혼까지 차지했으나 유연의 발흥과 돌궐에 밀려 많은 땅을 잃었다. 그러나 돌궐이 당나라에 망하고 고구려 연개소문은 당태종이세민을 추격해 서주까지 진격했으니 이때 고구려와 당이 령주일대를 경계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의 령주일대 점령은 바로 서량이 고구려의 식민지요 고창국이 고구려의 4군중하나라는 주장에 지대한 증거로 제시될수 있다.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TwTs/48 원문주소

 

 

출처 : 자신의 맑은영혼을 위하여
글쓴이 : 松林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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