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 선교장 누구에 의해서 어떻게 조성되었나 2012/10/30 12:59 | 추천 0 ![]() | |
http://blog.chosun.com/sschung5/6678013 ![]() ![]() ![]() | ||
강릉 선교장은 오죽헌과 더부러 강릉 관광의 백미다. 강릉에 간 사람치고 선교장과 오죽헌을 보지 않고 온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과연 이 거대하고 아름다운 선교장을 보고서는 놀라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어떤 경로로 지어졌는가를 아는 사람은 아주 드물다.
선교장은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민간고택 가운데 최초로 국가지정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주요 민속문화재 제 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래서 막대한 국가예산의 지원을 받으면서 그 실체가 보수 보관되고 있다.
선교장은 알려진대로 전주이씨 한 파인 효령대군파에 속하는 전통적 민간 고택이다. 선교장 이야기를 하려면 먼저 오죽헌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오죽헌의 외손이 바로 선교장을 연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리적으로도 선교장과 오죽헌은 아주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오죽헌은 물론 이율곡의 탄생지이고, 율곡의 어머니인 신사임당의 친정이다.
오죽헌을 먼저 개장한 사람은 강릉 향반 최치운이었다. 최치운과 아들 최응현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응현의 사위 이사온에게 오죽헌을 물려주었다. 이사온 역시 아들이 없어서 사위 신명화에게 물려주었다. 신명화 역시 아들이 없어서 사위 권화에게 물려주었다. 권화의 아들이 권처균이다. 신명화가 낳은 네명의 딸들 중에서 둘째가 신사임당이고, 신사임당이 낳은 아들이 이율곡이니, 이율곡과 권처균은 이종사촌이 된다. 오죽헌은 바로 권처균의 호이다. 안동 권씨 권처균은 자신의 호를 이 집의 당호로 하였다. 그래서 이 집이 오죽헌이 된 것이다. 처균과 율곡은 참으로 친하게 지냈다. 권처균의 증손자가 귄시흥이고, 권시흥의 딸이 바로 선교장을 연 안동권씨부인이다.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이 안동권씨 부인은 처녀시절에 충주 사는 전주이씨 집안에 시집을 갔다. 전주이
충주향반 이주화는 효령대군의10대 손으로, 벌써 두 명의 아내를 여위고 40대 중반의 나이였다. 그런 그가 오죽헌을 운영중이던 강릉 양반의 딸인 안동권씨가의 처녀에게 세번째 장가를 든 것이다. 물론 이주화에게는 죽은 전처들이 낳은 여러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안동권씨는 이주화의 사이에서 두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내번과 이태번이 그들이다. 바로 효령대군의 11대 손이다. 간단히 효령대군의 10대 손인 이주화로부터 지금 선교장을 운영하고 있는 이강백까지 계대의 표를 제시해보겠다.
효령대군 ㅣ 이주화(10대,1647-1718)) ㅣ 이내번(11대,1703-1781) ㅣ 이시춘 (12대,양자) ㅣ 이후 (13대) ㅣ 이용구(14대) ㅣ 이회숙(15대) ㅣ 이근우(16대, 1877-1938, 양자) ㅣ 이돈의(17대,1897-1961) ㅣ 이기재(18대) ㅣ 이강륭,이강백(19대)
위의 도표는 장남만을 적고 아들들과 딸들은 제외하였다. 한국적인 가문의 흐름은 일반적으로 장남중심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충주에 살고 있는 효령대군 10대 손 이주화에게 시집간 강릉 오죽헌의 안동권씨 색시가 낳은 이내번은 1781년까지 살았으니, 그의 사후 24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안동권씨 부인은 남편과의 사이에 얻은 두 아들(전주 이씨)이 스무살이 되기 전에 과부가 되어 버렸다. 그래서 그녀는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인 강릉 오죽헌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남편의 전처들이 낳은 아들들이 많아서 재산의 상속을 기대할 수 없었고, 충주라는 낯선 데서 남편 없이 살아가기가 막막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출가외인이라 천정인들 그들을 맞아 줄 턱이없었다. 그래서 권씨부인은 아들 형제와 함께 지금의 선교장 인근(지금의 북촌 저동, 방해정 자리) 거처를 잡아 정착했다. 그러나 그녀는 친정을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11대 이내번은 염전 경영을 해서 경제적으로 크게 일어서기 시작했다.조선시대에는 염전사업이 큰 이권을 낳았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왕손 사후 5대가 지나지 않은 왕족에 대해서는 관리진출이 엄격히 제한되어 있는 왕족들에게 생업으로 이 염전사업을 전매사업으로 허락하고 있었다. 언동권씨의 죽은 남편 이주화도 남한 강변 충주에서 염전사업으로 치부를 했던 것이다. 안동권씨부인과 아들 이내번 형제는 이주화의 생시에 보고 배웠던 염전사업을, 자신들도 역시 왕족이기 때문에 강을에서 시작했고, 큰 호수와 좋은 모래밭을 가지고 있던 강릉에서 이 사업은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내번은 홀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시면서 염전사업으로 큰 재력가가 되었다. 국가 시책에 의해서 왕족이 없던 강릉에서는 이내번 모자 이외에는 염전사업을 허가받을 만한 사람들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내번은 어머니가 노화로 사망하자, 지금껏 모아놓은 돈으로, 강릉 8명당의 으뜸으로 꼽히던 선교장 일대의 딸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땅을 사들이고 나서 한 삼년 반쯤 지나서 집을 지었는데, 강릉 양반집의 전형인 ㅁ자형 기와집이었다. 이내번은 자신의 가문을 높이기 위해서 당시 경국대전의 증보판인 속대전에서 규정하던 공명첩을 사서, 비록 실직은 아지지만, 나라가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벼슬을 받았다.공명첩은 납속을 통한 실권 없는 벼슬의 허락이었다. 실권은 없지만 나라의 공식적인 벼슬이기 때문에 가문이 크게 향상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내번은 왕족의 한미한 후손으로 전락한 자신의 가문을 크게 높이고 싶었던 것이다. 이내번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의 직첩을 받았고, 아비 이주화는 가선대부 이조참판의 직첩을 받았으며, 어미 안동권씨는 정부인의 직첩을 받았다.
12대 이시춘은 아들이 없어서 대를 잊지 못하던 이내번이 배다른 어미에게서 낳은 형 이중번의 아들을 양자들인 사람이다. 이시춘은 삼남일녀를 두고 일찍 죽었다.
13대 이후는 시춘의 맏아들로서, 아홉살 때 선교장의 땅을 마련한 할아비 이내번이 죽고, 열 살 때 자기를 낳은 아비 이시춘마저 죽었다. 이후는 어린 두 동생과 과부가 된미를 봉양하면서 너무나 큰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가정적인 불행이 덮친데다가, 강릉 향반들의 시기와 질투를 감내해야하는 어려움이 겹친 것이다. 왕족임을 내새워 염전사업으로 크게 일어선 뜨내기들을 그들은 고운 시선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이후 삼형제는 고립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이후는 자신의 가문을 일으켜세우기 위해서 쉰살이 되어서까지 무려 세번이나 과거에 응시하였다. 그러나 좋은 스승이 없었던 그는 결과 끝까지 과거 급제를 못한다. 그야말로 돈만 많은 시골 촌 선비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러한 외로움은 그가 오히려 선교장의 확장과 염전 사업과 영농사업에 전력투구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이후는 결국 중년에 만석군이라는 칭호를 들었다. 그의 부는 상당히 불어나 있어서 누구도 그를 감히 쉽게 대하지 못했다. 그의 땅은 북으로는 양양까지, 남으로는 삼척 울진까지 뻗어 있었다. 강릉에서는 이 땅을 다 관리할 수 없어서 북쪽으로는 주문진에, 남쪽으로는 삼척에 관리소를 두었다. 그는 선교장, 즉 배다리 동네집을 환골탈퇴시켜서, 산교장 뒤산 소나무숲 속에 팔각정을 짓고, 배다리골 입구에 인공호수를 파고 선교쟝의 또다른 상징인 활래정을 지었다. 서교장으로 들어가려면 경포호에서 흘러어는 강을 건너야하기 때문에 배다리골 즉 선교장이란 말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은 선교장 앞은 메꾸어져 평지가 되었다. 이후는 원래 이름이 이면조였다. 동생인 이 승조와 이항조가 서른을 넘기자 말자 죽어, 그는 많은 조카들을 떠안았다. 그래서 그는 선교장에 많은 방을 만들 필요성를 느꼈다. 선교장이 일자의 긴 형태로 바뀐 동기가 여기가 있었다. 이후는 자신의 자식들 뿐만아니라, 조카들까지 분가를 시키지 않고 한집에서 살게 했다. 선교장이 300칸 대저택이 된 이뉴는 이후의 이런 자식사랑 조카사랑에서 시작한 것이다. 조카도 자식이다라는 조선의 윤리를 그는 몸으로 실천했던 것이다.
14대인 이용구와 이의범은 이후의 아들로서, 둘다 과거에 급제하였다.아비의 한을 풀어준 것이다. 이용구는 과거에 급제했지만 선교장의 부를 다스리기 바빠서 38세까지 출사하지 않고 선교장에 머물면서 서별당과 연지당을 지었다. 서별당은 사랑채라고 할 수 있고, 동별당은 안채라고 할 수 있는 건물이다. 그리고 동생 의범의 가족을 위해 건물 바깥앞에 외별당을 지었다. 강릉 선교장을 형에게 맡긴 이의범은 한양에 60칸 대저택을 짓고 살았다. 비록 벼슬은 낮았으나, 선교장의 막강한 재력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들 형제는 강릉과 한양을 오르내리면서 형제애를 과시하면서 아름답게 살았다. 선교장 사람들은 결코 높은 지위를 탐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조상들이 조성한 재산을 더욱 불이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더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제애와 조상숭배에 가문의 총력을 기우렸다.
15대 이회숙과 이회원은 이용구의 아들이다. 그러나 이의범은 아들이 없어서 절손되었다. 그래서 이회원이 양자를 갔다. 이회숙과 이회원 역시 약관의 나이에 과거에 급제한다. 그래서 그들은 강릉 선교장을 떠나 한양에서 뿌리박고 살게 된다. 그러나 강릉 촌양반인 이들에게는 나라의 큰 벼슬이 주어지지 않았다. 큰 벼슬을 하려면 대대로 한양에서 살아오면서 사직에 큰 기여를 하고 있는 소위 한양 벌족들과 혼인을 맺어야 하는 것이다. 재력과 왕족의 피를 가진 이회숙 이회원은, 소위 경화벌족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이회숙은 좌의정을 지낸 유홍의 9대손으로 한양의 대표적인 벌족이던 기게유씨집안에 장가를 들었고, 희원은 5대에 걸쳐 판서를 내고 있는 반남박씨 집안에 장가를 들었다.
16대 이근우는 선교쟝의 중흥기를 이끈 가히 중시조라고 할만한 인물이다. 이회숙에게는 대를 이릉 아들이 없었다. 동생 이회원의 두 아들 근우와 명우 중 근우를 양자로 들였다. 이근우는 사도세자 능의 참봉이 되었다. 그들은 결코 높은 벼슬을 탐하지 않았다. 왕손으로서 최소한의 벼슬만을 지켰다. 이근우는 참봉노릇을 하면서 집 개념의 선교장을 장 개념으로 바꾼 장본인이다. 장이란 모든 것을 그 구역 내에서 해결하는 인간삶의 집단적인 어떤 영역을 의미한다. 조선에는 없는 300칸 대 저택으로 바꾼 이가 바로 이근우이다. 그는 활래정을 창덕궁의 부용정을 본따서 중건하였으며, 소실을 위한 소실댁을 솟을 대문 옆에 짓고(지금은 헐리고 없다), 노비들응 위한 거처를 지었다. 모든 것을 영역 내에서 해결하는 장의 개념을 그는 실천에 옮긴 것이다. 강릉관아의 객사인 임영관의 문 이외에 일제에 의해 해체되어진 거대한 객사건물의 잔해건재들을 모아와서 자신의 선교장 건립에 투입하였다. 강릉객사의 문은 강원도에서 고건물로는 유일하게 국보가 되어 있다. 이근우는 선교장의 영역을 배다리골로 제한하지 않고, 경포호까지 확장했다. 왕족으로서 국가관이 뚜렷했던 이근우는 일제하에서 사그러져 가는 민족애를 되살리기 위해 동진학교를 선교장 안에 차려서 은근히 민족교육을 시켰다. 몽양 여운형과 성재 이시영선생이 강사로 특별 초청될 지경이었다. 일제의 압력으로 이 학교는 폐쇄되었다.
17대 이돈의는 이근우의 장남으로 장릉 참봉을 맡았다. 장릉 참봉은 산교장 사람들의 떼어놓은 몫이었다. 강릉 영월 주변에 장릉을 지켜줄만한 왕족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참봉이 말직이지만, 비명에 억울하게 죽은 조상의 능을 지킨다는 긍지와 그런 일로 인한 다른 왕손들의 숭배의 염도 기대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근우의 차남 이경의는 보성전문학교 법학부를 졸업하였고, 삼난 이현우는 경성치과의전을 졸업하고 개업하였다.
18대 이돈의 아들 이기재는 민선 강릉시장으로 출마하여 당선하였고, 부인 성기희는 경기여고와 경성여자의학전문대학을 졸업하였다. 성기희는 션교장으로 돌아와 관동대학 교수를 역임하였다. 이현의의 아들 이기서는 고려대학교 부총장을, 이기웅은 출판사 열화당을 운영하고 있다.
19대 이강륭은 이기재의 장남으로 조흥은행장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선교장은 차남 이강백에 의해서 관리되고있다. 이강백은 노모인 성기희의 병환이 깊어지자 서울 생활을 접고 선교장으로 돌아와 형 이기재를 대신하여 장원의 관리에 전념하면서 노모의 최후를 보살폈다. 그는 여러 지원기관의 후원을 끌어와 중사랑과 서별당, 외별당을 중수하고, 창고와 곳간을 복원하였다. 선교장 사람들은 조상이 남긴 재산을 조금이라도 더 차지하려고 송사를 벌리고 그런 짓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한 핏줄로서 조상의 재산은 공동의 재산이라는 생각을 뿌리깊이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놀아운 일은, 이들은 효령대군의 10대 안동권씨와 11대 이내번의 무덤이 있던 곳을 확장하여 이후의 모든 조상들의 무덤을 한군데로 모아 묘를 썼으며, 집단적으로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산교장 후손들은, 자신들을 푸대접했던 10대 이주화의 선조들 즉 6대 이경두, 7대 이성, 8대 이광호, 9대 이집, 십대 이주화의 묘소를 6대 이경두의 묘소 인근인 음성지역으로 집중시켰다. 이경두는 왕손은 5대까지 벼슬길에 나가지 못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칙에서 벗어난 6대였기 때문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선 이들의 첫 조상이었다. 사실 이들은 안동권씨 부인이 시집을 갔던 이주화 이외에는 선교장 사람들과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었던 전주이씨 집안이다. 그러나 결국 선교장 후손들이 이들을 전부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선교장은 집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다. 이 집을 이룩한 전주이씨 집안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 아듬답다. 아니 어느 것이 더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 안에 들어가 사는 사람들이 아름다우니 그 집도 아름답게 250여년간 변모해 갔는지도 모를 일이다. | ||
|
'歷史. 文化參考'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58년전 8월10일 독도의 기적 (0) | 2012.11.21 |
---|---|
대한민국 국보 (0) | 2012.11.18 |
일본과 친일파들이 숨기고 있는 대한제국의 진실 (0) | 2012.10.28 |
[스크랩] 독도가 우리 영토임을 증명하는 빼도 박도 못할 일본 증거 나왔다 (0) | 2012.10.24 |
[최보식이 만난 사람] "日, 대마도가 한국땅이라는 사실 감추려고…" 충격 / 조선일보 (0) | 2012.09.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