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想像나래 마당

[스크랩] 다시 돌아오지 않는 오늘을 위하여-연휴묘사

鶴山 徐 仁 2011. 5. 17. 20:07

누구나 자신이 언제 생을 다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은 분명히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

더구나 우리 나이가 되면 이 사실은 분명하다.

그래서 지금 살고 있는 이 날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의 인식이 새삼스럽다.

그래서 누구나 하루 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자신의 인생을 값어치 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누구나 혼신의 힘을 다
쏟고 있다.

나의 경우, 그것은 물론 소설을 쓰는 일이다. 여기에 두 말은 절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소설가라 해서 문을 닫아 걸고 소설만을 쓰는 것은 아니다.

대외활동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원고지와 싸움을 하여야 한다.

하지만 소설을 써가면서도,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여러가지 단체 모임에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인간의 향기를 맡을 수 있고 지금 쓰고 있는 소설의 체온을 유지할 수 있다. 고독한 공방에서의 창작은 숨통이 죄어질 수 있다.

해가 바뀌면서 시작한 장편소설 <겨울골짜기>가 한 3의 2정도 진척되고 있다.

하루 온종일 작업해도 에이포 용지 두 장 정도 나가기가 쉽지 않다.

신문도 봐야하고, 나의 경우 옛 직장에서 하던 버릇대로 영어 불어 공부도 조금씩 해야한다. 그것들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놔두려니 너무 아깝기 때문이다.어디 써먹을 데도 없는 공부이다. 정년한 사람에게 무슨 그런 쓰임새가 있겠는가. 그저 내가 하는 공부이다.TV도 조금씩 봐야하고(나는 cnn과 tv monde5를 조금씩 듣는다), 노래 연습도 조금씩 하고 싶다. 누가 나보고 노래부르라고 하지 않지만, 누군가를 생각하며 노래 부르면 즐겁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해야하는 일은 하루 만보를 걷는 일이다. 남들은 골프장에 가서 건강을 다지지만 나에게는 그럴만한 금전적인 여유와 시간이 없다.하루 만보를 걸으려면 좀 부지런을 떨어야 한다. 나는 주로 집 앞에 있는 한강의 강변을 걷거나, 집 가까이 있는 남산을 걷는다. 그래서 저녁은 주로 사 먹고 그 길로 걷기를 하는 것이다. 두 시간을 죽어라 걸어야 만보가 겨우 된다.

치솟는 혈당과 혈압을 잡으려면 만오천보를 걸으라고 하지만, 정말 어렵다. 만오천보를 걸으면 불면증은 없어진다.

죽기를 결심하고 혈당과 혈압과 싸운다. 한번 크게 당한 적이 있지 않았는가. 병상에서 눈을 떴을 때, 귀에 들려오는 병명과는 달리 사지와 오관이 제대로 돌아 몇번이나 사지를 움직여보고 눈을 감았다 떠보고 하던 때가 언제나 새삼스럽다. 절대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다.그것은 오직 절식과 운동밖에 없다.

장편만 쓸 수는 없다. 중간 중간 청탁오는 단편을 쓰지 않을 수 없다. 청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원수가 된다. 

그리고 중요한 일은 경조사에 가는 일이다. 특히 마로니에 경조사에는 제일먼저 나타난다.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이 일, 사명감과 즐거움으로 하고 있다.

아내의 직장 관계로 36년 이상 반 자취 반 매식으로 살아가다 보니, 이제는 이골이 나서 아내가 곁에 있으면 오히려 답답할 정도이다.아내가 귀가해도 이식이나 삼식이가 되어 눈총을 받을까봐 매식을 한다. 가로수길, 이태원, 인사동, 삼청동길, 민자왕십리역사내 식당가, 청량리 로테호텔푸트코드, 한남동 먹자골목, 신사동먹자골목, 신세계 식당가, 현대백화점 식당가 등에서 주로 사먹는다.

5월 5일은 어린이날, 내가 어쩌면 가장 기다리는 날인지도 모른다. 아주 어린 나이의 어린이가 10년도 훨씬 전에 몸에 암에 생겨 부모가 아주 죽을지경으로 안타까와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나는 수술비를 지원해 주었고, 그 어린이는 생명을 구했다. 그 어린이가 지금은 초등하교 5학년이 되었다. 아주 예쁘게 잘 자랐다.이 순간까지 이 가정과 우리 부부는 어런이날이 오면 단 한번도 걸르지 않고 점심을 먹었다.

그래서 나는 괜찮은 식당을 좀 많이 아는 편이다. 이들 가족을 위해 언제나 식당을 예약해 놔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에는 삼청동길에 있는 <민들레영토>를 택했다. 비싸지 않으면서도 깨끗했고, 분위기도 좋았다. 그 어린이의 부모가 올해는 조영남 디너쇼 티켓 두장을 구해서 선물로 주었다.

5월 6일은 조선일보 수석논설위원을 하는 분과 점심을 같이 했다. 이분과는 사석이 처음이다.수십년 전에 문학담당을 했는데 그 때 나에 대한 기사를 여러번 쓴 적이 있었다. 수십년이 지난 이제서야 나는 그분에게 식사나 한번 하자고 했더니 아주 감사했다. 그분이 최근에 쓴 매화 이야기와 목련이야기는 신문기시답지 않는 향기를 가지고 있다. 

5월 7일은 토요일인데도 집사람이 대학원 강의가 있다면서 공주로 내려갔다. 나는 이때를 이용해서 온종일 문인협회에서 청탁받은 단편소설 <아버지와 아들>을 써내려갔다. 오후에 아내를 마중하러 나가 돌아오는 길에 가로수길에 들러, 단골로 다니는 커피스미스에서 차를 마셨다. 그리고 신장개업한 카사미아 호텔에서 저녁을 먹었다. 그렇게 비싸지 않았다.

5월 8일은, 어버이 날이라, 처가에 들러 올해 아흔에 드신 장모에게 큰절을 드리고 노래를 불러드렸다.<그네>와 <그대 있음에>를 좋아하신다. 네분의 부모님 중에서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다. 새벽에 서재에 걸려 있는 어머니 영정을 보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불렀더니 눈물이 쏟아졌다. 특히 그 구절 중에서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 하셨네...>를 부르니 더욱 눈물이 쏟아졌다. 가난한 공부원의  아내로 우리를 키우시느라 너무나 큰 고생을 하셨다. 연세대 박사과정에 있는 아들이 카네이션바구니를 사왔다. 미국 캔트 대학박사과정에 다니는 둘째녀석은 전화를 걸어와 기계음으로 <어머니 마음>을 불러 주었다. 내가 걱정을 하면, 이놈들은 언제나 죽는 한이 있더라도 대학선생이 되고나서 장가를 가겠단다.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그러나 내가 어쩌겠는가.

 밤에 조영남 디너쇼를 보로갔다.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비와 화계장터, 그리고 홍도야 울지마라등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 그가 불렀던 노래를 불렀다. 쌍스러운 만담과 육자베기 유행가를 부르는데 골치가 아팠다. 이런 쇼를 2십만원이 훨씬 넘는 돈을 주고 보러 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나는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다들 자식들이 어버이날 즐기시라고 사준 표를 들고 온 사람들 같았다. 그러나 조영남 특유의 구수한 맛도 있어서 겨우 자리를 끝까지 지킬 수 있었다. 

5월 9일은, 아내가 어렵게 시간을 조정하여 강의를 빼고 서울에 있었다. 그래서 이태원 프랑스 식당으로 가서 마르께와 다미엥을 만났다. 우리는 거기 가면 언제나 홍합요리를 즐겨 먹는다. 불어로 <moule,물> 이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프랑스 요리로 프랑스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요리이다. 비싸지 않다. 2만원만 주며 먹을만큼 준다. 다미엥은 한국인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분명 프랑스인이다. 입양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요리 전문가로 한국어를 배우고 싶다는 말을 여러번 하였다.

오전에는 경복궁 민속박물관으로 ,누구의 전언대로 국보 300 여 개를 총천년색 사진과 함께 해설해 놓은 책이 있다하여 그것을 사러 갔다. 그리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박물관을 둘러보았다. 전시품들이 내용이 아주 풍부해졌고,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

연휴를 보내면서 아내에게서 밥을 얻어 먹을 수 있는 기회를 이용하여 단편을 탈고하고 장편소설을 적극적으로 진척 시켰다. 맨날 6.25  소설만 쓰다가 젊은이들의 연애 소설을 쓰려니 힘이 겹으로 들었다. 나의 대학 생활이 자꾸 생각이 났다. 그러나 무대가 오늘날이라 주인공들의 연애심리가 많이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래 더 어려웠다.

나는 어머니 생각을 하면서 노영인 씨에게 전화를 해서 여성동문들에게 점심을 한번 사고 싶다고 했다.어머니 일주기가 조금 전에 지났다. 내 아픈 마음이 많이도 가라앉았다. 여성동문들은 멀리 대구에서 나의 슬펐던 날에 나를 잊지 않으셨다. 작은 정성이라도 보이고 싶었다. 

10일은 부처님 오신날이다. 예년과 같이, 길상사에 가서 점심을 먹으려다 시간이 늦어 집앞에 있는 미타사에 들러 절밥점심을 먹었다. 내가 일년간 번 돈의 아주 적은 부분이라도 부처님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쌀봉지를 사고 초를 샀다. 그리고 약간의 헌금도 하였다. 하지만 나는 불자가 아니다.오후 2시반쯤 길상사에 들렀더니 공양시간이 끝이나서 할 수 없이 커피와 한과를 먹었다. 쌀봉지를 부처님에게 올렸더니 웃으시는 것 같았다. 본당에 방석 위에 앉아서 한참을 참선을 하다가 나왔다. 삼선교까지 걸어내려왔다.  저녁은 가로수길에 가서, 마침 스쿨푸드식당의 창가에 자리가 있어서 기분좋게 저녁을 먹었다. 다시 스미스커피에 들러 커피를 마셨다. 이 두 식당은 최근 빠리에서 발간된 여행가이드<기드 뚜리스디끄>에 등재가 되었다. 주로 절은이들이 오지만 우리같은 사람이라고 입장불가는 아니다. 

연휴때 그래도 단편 <아들과 아버지>를 탈고 하여 놀고만 지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은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인식이 요즈음처럼 절실하게 가슴을 채우는 경우가 없다. 5일간의 연휴 전번부는 날씨가 화창하였으나 후반부는 줄곧 비가 내렸다. 비를 맞으며  다리 아프다는 아내를 달래면서 미친듯이 쏘다닌 것이다. 오늘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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