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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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연(一然)

鶴山 徐 仁 2009. 2. 21. 09:44

1. 일연선사의 생애

속성 김(金).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일연 호는 무극(無極)·목암(睦庵). 시호는 보각(普覺). 탑호는 정조(靜照)이다. 경상북도 경산에서 출생했다. 1214년 9세에 전라도 해양(현 광주) 무량사에 들어가 대웅(大雄) 밑에서 학문을 닦다가 1219년 승려가 되었다. 1227년 승과에 급제하고, 1237년 삼중대사, 1246년 선사, 1259년 대선사가 되었다. 1261년 왕명으로 선월사 주지가 되었다.
 
1268년 운해사에서 대덕(大德) 100여 명을 모아 대장경 낙성회(大藏經落成會)를 조직, 그 맹주가 되었다. 1277년(충렬왕 3) 운문사(雲門寺) 주지가 되어 왕에게 법을 강론, 12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고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1284년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궁궐에서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열었다. 탑과 비는 인각사에, 행적비는 운문사에 있다.
 
저서 《삼국유사(三國遺事)》는 한국 고대 신화와 설화 및 향가를 집대성한 책으로, 고대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그 밖에 《어록(語錄)》 《계승잡저(界乘雜著)》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조도(祖圖)》 《대장수지록(大藏須知錄)》 《제승법수(諸僧法數)》 《조정사원(祖庭事苑)》 《선문점송사원(禪門拈頌事苑)》 등이 있다. [출처 : 백과사전]
 
보각국사 일연스님이 경상도 경주의 속현이었던 장산군(章山郡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에서 태어난 것은 고려 희종(熙宗) 2년(1206)이다. 이름은 견명(見明)이었으나 뒤에 일연(一然)으로 바꿨다. 자(字)는 회연(晦然)이며, 호(號)는 목암(睦庵)이다. 아버지 김언필(金彦弼)과 어머니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벼슬을 하지 않았으나 국사의 덕으로 좌복야를 증직받았으며 어머니 역시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에 봉해졌다.
 
 어머니 이씨는 해가 삼일 동안이나 계속 집에 들어와 자신의 배를 따스하게 비춰주는 태몽을 꾸고 스님을 잉태하였다. 그래서인지 일연스님은 어려서부터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몸가짐과 예절을 갖춤에 있어서도 매우 단정하였다. 아홉 살이 되던 해인 고종 1년(1214)에 스님은 벌써 세속을 벗어나려는 뜻이 있어 해양(海陽 : 지금의 광주지방)의 무량사(無量寺)로 들어가 공부를 시작하였다. 장성하면서 친구간에 쓸데없는 농담은 나누지 않았고 품성이 가식할 줄 모르며, 매사에 매우 차분하고 진지하였다. 군중에 둘러싸여 있어도 그들과 어울리지 않고 마치 홀로 있는 것처럼 처신했고 신분이 높아질수록 더욱 겸손할 줄 알았다. 까닭에 배움에 있어 스승에게 배워서 깨쳤다기 보다는 '不由師訓 自然通曉(스승의 가르침없이 자연히 통해 깨닫는다.)'라는 말처럼 터득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열네살이 되어 비로서 설악산 진전사(陣田寺)로 출가하여 대웅장로(大雄長老)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설악산 대청봉이 바라다 보이는 궁벽한 골짜기에 자리한 이 절은 신라의 선승 도의(道義)가 은거하던 곳으로 나말려초(羅末麗初)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가지산문(迦智山門)이 연원한 곳이다. 이렇게하여 일연스님은 가지산문과의 길고도 깊은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 뒤 여러 곳의 선문(禪門)을 방문하면서 수행하였다. 까닭에 그의 명망은 이미 스물두살 이전에 널리 알려졌으며, 많은 사람들의 추대로 구산문 사선(九山門 四禪)의 우두머리가 되기까지 하였다.

 1227년에는 승과의 최고 시험인 선불장(選佛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이른바 장원급제에 해당하는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당시 스물두살의 젊은이였던 일연스님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현풍의 비슬산 보당암(琵瑟山 寶幢庵)으로 옮겨 수행에 몰두하기를 계속하였다.

 이후 9년이 지난 1236년에 이르러 몽고의 침입이 남방에까지 미치게 되자, 스님은 중생들의 병화를 덜어주고자 문수(文殊)의 오자주(五字呪)를 염하면서 감응을 빌었다. 문득 문수보살이 현신(現身)하여 "무주(無住)에 가 있다가, 다음해 여름이 되면 다시 이 산의 묘문암(妙門庵)에 거처하라."고 하셨다. 이에 곧 보당암의 북쪽 무주암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에서 항상 "生界不減 佛界不增(생계, 즉 현상세계는 줄지 아니하고 불계, 즉 본질적인 세계는 늘지 아니한다.)"는 구절을 참구(參究)하다가 깨달음을 얻어서 "오늘 곧 삼계(三界)가 꿈과 같음을 알았고, 대지가 작은 털끝만큼의 거리낌도 없음을 보았다."고 하였다. 이 해에 나라에서 삼중대사(三重大師)의 승계(僧階)를 내렸다. 그 뒤 1246년 다시 선사(禪師)를 더하였다.

 일연스님이 비슬산에서 수행에 몰두하던 20여 년의 시기를 두고 소극적으로 잠적한 시기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이다. 이 시기 일연스님의 나이 20, 30대에 속하던 때였고, 철저하게 자기 충실에 몰두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 시절 그는 꿈속에서라도 세속에 가지 않겠다는 신념으로 수행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비슬산에 살았던 관기(觀機)와 도성(道成), 두 성승(聖僧)의 미덕을 찬양한 다음의 시는 당시 일연스님 자신의 모습을 여실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풀뿌리와 약초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베가 아닌 나뭇잎이로다. 솔바람 쏴쏴 불고 돌길은 험한데, 해 저문 저 숲길로 나무를 해서 돌아온다. 밤 깊고 달은 밝아 그 아래 앉았으면, 상반신 시원스레 바람따라 나는 듯하고, 떨어진 자리에 가로 누워 자노라면, 꿈길에도 세속에는 가지 않는도다. 구름따라 놀던 풍류는 두 암자나 묵었지만, 산 사슴만 오르내릴 뿐 인적은 드물다.
 
 일연스님은 1249년 남해로 거처를 옮겨서 10년을 살았다. 그의 나이 마흔 네 살에서 쉰 여섯 살에 이르는 시기였고 아직 몽고의 약탈이 계속되고 있던 때이다. 이 때 당시 실권자인 최이(崔怡)의 처남으로 중앙 정계에서 물러나 남해에 은거, 남해분사대장도감(南海分司大藏都監)을 맡아 대장경을 간행하고 있었던 정안(鄭晏)이 남해에 정림사(定林社)를 세우고 일연스님을 청한 것이다. 이에 일연스님은 대장경 간행 사업에 3년 정도 참여하게 된다.

 1256년 여름, 일연스님은 남해에 있는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으로 거처를 옮기고 한가한 틈을 얻어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 두 권을 써서 1260년에 간행했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 책은 일연스님의 사상을 알아 볼 수 있는 귀한 문헌이 되고 있다. 한편 1259년에는 대선사(大禪師)의 승계를 제수받기도 하였다.

 일연스님은 몽고의 침입이 계속되는 동안 남쪽의 포산, 남해, 윤산 등지에서 전란을 피하면서 수행에 전념하다가 1261년 원종의 청을 받아 강화도의 선월사(禪月寺)를 주재하기 시작하면서 설법을 하였고 이때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 知訥)의 법을 잇게 되었다.

 이후 일연스님은 남쪽으로 돌아가기를 여러 차례 청하여 마침내 4년후인 1264년 경상북도 영일군 운제산에 있던 오어사(吾漁寺)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에 비슬산 인홍사(仁弘寺)의 만회(萬恢)가 그 주석을 양보하였으므로 인홍사 주지가 되어 후학을 가르치게 되었다. 1268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명을 개경에 초청하여 해운사(海雲寺)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大藏落成廻向法會)를 베풀었던 때, 일연스님으로 하여금 그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이때 일연스님은 그의 물 흐르는 듯한 강론과 설법으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11년 후인 1274년 인홍사를 중수하고 경내를 확장한 후 조정에 아뢰자, 원종은 사액(賜額)을 내려 인흥사(仁興社)로 바꿨으며 친필로 제액(題額)을 써서 하사하였다. 이때, 비슬산 동쪽 기슭의 용천사(湧泉寺)를 중창하고 불일사(佛日社)로 삼았는데, 그의 『불일결사문(佛日結社文)』은 이때 쓰여진 것으로 생각된다. 1277년 충렬왕 3년부터 일연스님은 왕의 명에 따라 다시 청도의 운문산(雲門山) 운문사(雲門寺)로 옮겨가서 그 곳에서 1281년까지 살면서 일연스님은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다. 이 절은 가지산파의 학일(學一)이 명성을 날린 곳이기도 했다.

 일연스님이 운문사에 있던 1281년 6월, 동정군(東征軍)을 격려하기 위해 경주에 온 충렬왕이 그를 불러 그의 가까이 있게 하였다.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간 일연스님은 왕의 존경을 받았지만, 몽고의 병화로 불타버린 황룡사(黃龍寺)의 황량한 모습을 그 곳에서 보았으며, 또한 뇌물로서 승직(僧職)을 구하는 불교계의 타락성을 보게 되었다. 이듬해 가을 왕의 부름으로 개경으로 가 광명사(廣明寺)에 머물렀다.

 어느날 늦은 저녁에 어떤 사람이 방장밖에 서서 "잘 오셨습니다."라고 말하기를 세 번하거늘, 밖을 보니 아무도 없었다. 이듬해 봄에 왕께서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우리 선왕께서 모두 석문에 덕이 큰 이를 왕사(王師)로 삼고, 또 덕이 큰 이를 국사(國師)로 삼았으나 부덕한 과인만이 홀로 인자한 은덕을 입으니, 이 어찌 올바른 일이라 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온 나라와 더불어 함께 누릴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우승지(右承旨) 염승익(廉承益)을 보내어 윤지를 받들어 합국존사(闔國尊師)의 예를 행하고자 청하였다. 일연스님이 표를 올려 굳게 사양하니 왕이 다시 사신을 보내어 청하기를 세 번에 이르렀다. 이에 상장군(上將軍) 나유(羅裕) 등에게 명하여 국사(國師)에 봉했으니, 스님의 세납 일흔여덟이 되던 1283년의 일이다. 이 때 그는 국왕에게 선을 설하기도 하고, 신하들에게서 예를 받았다.
 
 이듬해 3월 국존으로 책봉되어 원경충조(圓經沖照)라는 호를 받았으며, 4월 왕의 거처인 대내(大內)에서 문무백관을 거느린 왕의 구의례(衣禮 : 옷의 윗자락을 끌어 올리고 절하는 예)를 받았다. 그러나 곧 노모의 봉양을 위해 왕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대궐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 왔다. 한 나라의 스승으로 추앙받던 78세의 노령 고승이 노모에게 바친 극진한 효성은 진정 아름다운 것이었고,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 않았다. 스님이 목암으로 자처했던 것도 효성이 지극한 진존숙(陳尊宿)을 흠모했기 때문이다. 진존숙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고향인 목주로 거처를 옮겨 밤을 지새며 삼은 짚신으로 어머니를 모셨던 중국의 고승이다. 일연스님이 『삼국유사』에서 「효선편(孝善編)」을 설정하고, 진정(陳定)과 그 노모에 대한 애틋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며, 부모의 은혜를 갚기 위해 석불사(現石窟庵)과 불국사(佛國寺)를 창건했던 김대성(金大成)의 효행 등을 기록했던 뜻도 헤아려 볼만 한 것이다. 이듬해 1284년에 노모가 돌아가자 조정에서는 경북 군위군 화산의 인각사(麟角寺)을 수리하고 토지 100여경(頃)을 주어 국사의 만년을 편안히 돌보았으며 근시(近侍) 김용검(金龍劍)에게 수즙(修葺 : 지붕이나 바람벽 등의 허술한 곳을 대거나 이어서 손질함)하게 하였다.

 일연스님은 이 절에서 구산문의 승려를 두 번이나 모아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개최하였는데 당시에 보기드문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다. 일연스님은 그 후 1289년 6월 병이 들자 7월 7일 왕에게 올릴 글을 쓰고 시자에게 명하여 상국 염공(相國 廉公)에게 길이 감을 고하였다. 이 날 밤에 한자 둘레만한 큰 별이 방장(方丈)에 떨어졌다.
 
 8일 새벽 세수 목욕하고 일어나 앉아 무리에게 "오늘 내가 갈 것이다. 중일(重日)이 아닌가?" 하니 "아닙니다."라고 대중이 말하였다. "그럼 좋다."하고 승려로 하여금 법고(法鼓)를 치게 하고, 스님은 선법당(禪法堂)에 이르러 선상(禪床)에 앉아 인보(印寶)를 봉하고 장선별감 김성고(掌選別監 金成固)에게 명하여 거듭 봉하기를 마치고 "마침 천사(天使)가 와서 노승의 말후사(末後事)를 보이었다."고 하니, 한 승려가 나와서 물었다. "석존(釋尊)께서 학림(學林)에서 시멸(示滅)하시고, 화상께서는 인령(麟嶺)에서 귀진(歸眞 : 참모습으로 돌아감, 즉 마치심)하시니 서로 많고 적음을 떠났는지 미심합니다." 스님은 주장을 쳐들었다가 한 번 내리치시고 이르기를 "이미 많고 적음을 떠났다." 승려가 나아가 이르기를 "이러한 즉 이제와 옛이 응하여 떨어짐이 없건만 분별하고 명변하는 일은 당장 눈앞에 있습니다."고 하였다. 스님은 또 높이 주장을 내리치고 말했다. "분별하고 명변하는 일은 눈앞에 있다." 승려가 나아가 이르기를 "삼각(三角)의 기린(麒麟)이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니, 하늘에 남은 조각달이 파심(波心)에 나타났습니다."라 하니, 스님은 "다른 날에 돌아오면 또 상인(上人)과 거듭 한 마당 희롱하리라."라고 하였다.
 
 또 어떤 승려가 말했다. "화상께서 백년 뒤에 바라는 바가 무엇입니까?"라 하니 스님이 "이와 같은 일은 곧 쉬게 됨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또 어떤 승려가 물었다. "화상이 세상에 계셔도 없는 것과 같고, 몸을 보기를 몸이 없는 것과 같이 하시니 세상에 머물러 큰 법의 수레바퀴를 굴림에 무슨 방해가 되겠습니까?"라 하니, 스님이 "곳에 따라 불사(佛事)를 하는 것이다."라 하셨다.
 
 이와 같이, 제자들과 선문답(禪問答)을 한 뒤 스님이 말씀하셨다. "여러 선덕(禪德)은 날마다 이를 알려라. 아프고 가려운지, 아프고 가렵지 아니한지 모호하여 분변하지 못한다." 이에 주장을 높이 쳐들어 한 번 내리치고 말했다. "이것이 아픈가?" 또 한 번 내리치고 말했다. "이것이 아픈가 아니 아픈가 시험삼아 분변하여 보아라."하고 문득 자리에서 일어나 거처하던 방으로 돌아가 금강인(金剛印)을 맺고 돌아가니 다섯 빛 광명이 방장의 뒤에서 일어나 곧기가 깃대와 같고, 그 끝의 빛나고 빛남이 타오르는 불꽃과 같았다. 그 위에는 일산과 같은 흰 구름이 있어 하늘을 향해 사라져 같다. 그의 나이 84세, 법랍 71세였다.

 일연스님은 나이가 80이 넘어서도 총기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으며, 남의 가르침에 조금도 싫증내거나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일연스님의 비문을 지은 민지(閔漬)는 이러한 것이 지극한 덕과 자비를 갖지 않고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선도(禪道)에 정진하면서도 장경(藏經)의 편람에 힘썼고 따라서 제가장소를 연구하고 심지어 유가경서(儒家經書)와 같은 외학(外學)에도 널리 섭렵하여 백가의 제설(百家諸設)을 함께 이해했다. 일연스님은 불도에 몸담은 이래로 약 50년간 선두적인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에 스님이 처하던 곳마다 모두들 다투어 따르며 경외하였다.

 문인이 유장(遺狀)과 인보(印寶)를 가지고, 승전(僧傳)으로서 돌리니 왕께서 매우 슬퍼하시어 판관후(判觀候) 서사(署事) 영척(令倜)을 보내어 식종의 예(飾終之禮)를 폈다. 또 안렴사(按廉使)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감호하게 하였다. 그 해 10월에 인각사 동쪽 언덕에 탑을 세웠으며, 시호는 보각(普覺)이고, 탑호(塔號)는 정조(靜照)이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혼구(混丘)와 죽허(竹虛)가 있다. [출처 : http://www.ingaksa.org/]
 
 
2. 학문과 사상
생존시 일연은 국사에까지 봉해졌던고승으로 존경을 받았지만, 오늘날 그는 선승으로써가 아니라 오히려 사가로 이름이 더높다. "삼국유사"는 그를 유명하게 해준 사서이다. 이 책에는 그의 일생의 노력이 응결되어 있다. 젊은 시절부터 수집한 수많은 자료를 토대로 이책의 집필이 가능했지 때문이다. 본격적인 찬술이야 만년에 했다고 하더라도 마음을 발하고 자료를 모은 것은 일생의 정진이었던 것이다. 이책의 저술시기와 관련해서는 가섭불연좌석조의 "지금 지원(至元)18년 (1281)"이라는 연대가 주목된다.

  이해에는 충렬왕 7년으로 76세의 일연이 운문사에 살고 있을 때의 일이고 직접 경주를 방문했던 시기에 해당한다. 따라서 운문사에 주석하고 있던 70대 후반의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책에 인용되어있는 운문사와 관련된 진양부첩등의 여러 문적은 아마도 그가 이절에 살면서 직접 확인한 자료일 것이다. 그리고 가섭불연좌석조에는 1238년 (고종25년) 황룡사가 불타기 이전의 일연자신의 답사기가 포함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보이는 일연의 직함중에는 "국존원경중초", "인각사주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삼국유사가 인각사에 주석하던 만년에 이르기까지 집필되고 있었을 것임을 짐작케 해준다.

  삼국유사 5권은왕력(王曆),기이(紀異),흥법(興法), 탑상(塔像),의해(義解), 신주(神呪), 감통(感通), 피은(避隱), 효선(孝善)등의 9편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같은 체제는 특이한 편이고 유사(遺事)라는 책 이름 또한 색다른 것이다. 이 책의 편명중에는 중국의 3종 고승전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는 것도 있으며 의해, 감통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왕력, 기이, 피은, 효선등은 중국의 고승전에는 없는 판명이다. 따라서 이 책의 체재가 고승전의 형식을 따른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과도 다른 자유로운 형식을 취하고 있다.

  삼국유사는 체제있게 서술된 역사서인가 그렇지 못한가하는 논의가 있다. 불용의한 하나의 만록으로 본 경우가 있는가 하면 미완성일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와는 반대로 "불교사로서 주도한 용의와 완전을 구하려는 작품", 혹은 " 뚜렷한 체계적 의식으로 쓴 처음과 끝이 일관된 종교사" 라는 주장도 있다.

  삼국유사는 책이름에서 의미하듯 유사적인 성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유사란 사가의 기록에서 빠졌거나 자세히 드러나지 않은 것을 드러내 표현한 것이다. "삼국유사"는 "해동고승전"등의 기존 사서에 대한 보족의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책을 야사나 만록의 정도로 평가하는데 선뜻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보족의 부분을 완전히 하려했던 각고의 노력과 강한 역사 의식이 스며있기 때문이다.

  삼국유사에서는 곳곳에 사가로서의 일연의 노력이 보인다. 사료의 발굴과 수집, 현지 답사에 의한 유물 유적에 대한 관찰, 사료의 검정, 인용전거의 명시, 객관적 서술을 위한 배려 등은 역사가의 노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연은 전국을 두루 여행 다녔다. 젊은시절부터 거의 만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여행자료수집을 위한 현지 답사였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승려의 여행은 수행의 한방법이고 보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료수집에 쏟은 일연의 열정은 남달랐는데 역사가의 노력이 바로 그것이다. " 삼국유사"에는 많은 자료가 인용되어 있는데 일연이 현지에서 직접 찾은 자료가 적지 않다. 금석문,고문서,사지,설화 등이 그것인데 직 접접하지 않고는 구할 수 없는 자료가 대부분이다.
 
  일연은 "삼국유사"의 서술에서 객관성을 유지 하려는 노력을 했다. 즉 인용된 사료와 저자의 의견과를 구분하여 서술하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고 지적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판단이 쉽지 않은 경우 "알 수 없다"거나 "의심스럽다"는 등의 방법으로 서술함으로써 사료의 원형을 그대로 전하려는 노력이 보인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삼국유사에는 일연의 역사가로서의 노력이 반영되어 있지만 또한 이책은 역사서로서의 한계와 문제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일연은 몽고의 침략과 그후의 부당한 간섭을 목격했었고, 몽고의 병화에 불타 버린 황폐한 현장도 목격했고 고통받는 사람들의 참상도 알고 있었다. 그는 시대적 난파의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역사 전통의 유구성과 신성함에 대한 새로운 이식을 통해 민족의 자주정신을 강조 하고자 했다. 그는 많은 설화적인 자료에 주목했는데, 유사에 수록된 사화는 신이한 내용이 많고 불교의 영험설화가 적지 않다. 일연은 설화를 통해서 상징적 의미를 전달하고 영험담을 통해서 신앙심을 고무시키고자 했던 뜻을 갖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화들 중에는 인간의 삶이나 존재에 대한 깊은 통찰과 의미있는 함축을 담고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리하여 무엇이 우리들의 삶에서 더 소중한 것이고 의미있는 것이지를 일깨워 주고 있다.
  또한 일연의 안목은 다양한 문화를 향햐 열려있는데 그것이 곧 문화사가의 안목이라고까지 말하기는 어려워도 그무렵 유교사관에 젖어든 사람들과도 다름점이 있었다. 특히 그의 눈길이 기층민의 삶을 따듯한 애정으로 감싸고 있었음 또한 유학자들과는 구분되는 것이였다.

3. 유적지
(1) 인각사 :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화북리 화산에 위치하고 있는 사찰로, 절 입구에 깎아지른 듯한 바위가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기린이 뿔을 바위에 얹었다고 하여 절 이름을 인각사(麟角寺)라 하였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10년(서기 1284)에 일연성사가 중창하고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http://www.ingaksa.org/)
 
(2) 보각국사비 : 고려에서는 國師 涅槃後에는 반드시 비를 세워서 그 공덕을 찬양하여 후인들에게 지침이 되게 하였다. 이 碑文의 擇者인 閔漬는 마음을 전하고 골격(骨格)을 얻음에 지혜의 태양이 황혼에 들려는 것을 다시 돌리어 神光을 發하여 우리나라를 비추는 자가 있는데 오직 우리의 國尊일 뿐이다.라 하여 一然의 공덕을 높이 찬양하였다.
 
(3) 보각국사 정조지탑 : 인각사의 본전인 극락전 오른쪽 마당가에 지대석까지 온통 드러내고 서 있는 탑이 보각국사탑, 즉 일연스님의 부도이다. 전체 높이는 약 2.42m이다.
  일제강점기에 일인들에 의해 도굴되어 화북3리 (속칭 둥딩마을) 뒷산 부도골, 비명에서 말하는 '인각사의 동쪽 언덕'에 넘어져 있던 것을 고로면 사무소로 옮겼다가 1962년에 다시 인각사로 옮겨 복원한 것이다.

4. 얽힌 이야기
(1) 연보
 고려 후기의 승려, 초자는 회연(晦然), 호는 무극(無極), 목암(睦庵), 속성은 김씨(金氏), 이름은 견명(見明),  장산(章山 ;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 출생,
  1214년(고종1년) 해양( 陽 ; 지금의 광주로 추정) 무량사(無量寺)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고 19년 출가하여 설악산 진전사(陳田寺)의 고승 대웅(大雄)의 제자가 되어 구족계를 받았다. 여러 선문(禪門)을 방문, 수행하였고 27년(고종 6년) 승려과거시험인 선불장(選佛場)에서 장원인 상상과(上庠科)로 급제한 뒤 포산(包山 ; 현재 대구시 현풍(玄風)의 보당암(寶幢庵)의 주지로 있으면서 참선에 몰두하였으며 '삶의 경계는 소멸이 없고, 부처의 경계는 더함이 없다(生界不滅 佛界不僧)'라는 말을 참구하여 깨친바가 있다.

  37년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고 46년 다시 선사(禪師)를 더하였고, 49년 정안(鄭晏)의 청을 받고 남해의 정림사(定林寺)로 옮겨와 이 절을 주재하며 대장경을 주조하던 중 남해의 분사대장도감(分司大藏都監)의 작업에 참여하였다.
  56년 윤산(輪山)의 길상암(吉祥庵)에 머무르면서 《중편조동오위(重編曹洞五位)》를 지었고, 59년 대선사에 올랐다.

  61년(원종 2년) 원종의 부름을 받고 강화도(江華島)로 가서 선월사(禪月寺)머물면서 개당하여 구산선문(九山禪門)중 하나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의 문하에 속하는 '목우자(牧牛子 ; 普照 知訥)의 법을 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그 뒤 경상북도 영일(迎日)에 있는 오어사(吾魚寺), 달성(達城)의 인홍사(仁弘寺 ; 뒤의 인흥사(仁 興寺)등을 다니며 설법과 강론을 폈으며, 68년(원종 9년)에는 조정에서 선종과 교종의 고승 100여 명을 초청하여 운해사(雲海寺)에서 대장낙성회향법회를 개최할 때 일연이 그 법회를 주관하여 낮에는 금문(金文 ; 大藏)을, 밤에는 종취(宗趣)를 읽도록 하였으니 그의 물 흐르는듯한 강론과 설법은 그곳에 모인 사람을 크게 감화시켰고, 77년(충렬왕 3년) 청도(淸道) 운문사(雲門寺)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일으켰다.

  81년(고려 충렬왕 7년) 몽고군의 일본원정 때 왕을 따라 경주(慶州)에 머무르며 왕에게 법설을 강론하였고 ,  82년 왕명으로 개경(開京)의 광명사(廣明寺)에 주석하였으며, 83년 국존(國尊)으로 추대되며 원경충조(圓經沖照)의 호를 받았다.
 
  그 해 노모의 봉양을 위하여 귀향하였다가 이듬해 경상북도 군위(軍威)의 인각사(麟角寺)를 중건하고 당시의 선문을 전체적으로 망라하는 구산문도회(九山門都會)를 두 번 개최하였으며, 《삼국유사(三國遺事, )》5권을 저술하는 등 그 총림의 융성함이 근래에 없을 정 였다
  1289년(충렬왕15년) 7월 8일 인각사에서 세수 84세, 법랍 70세로 입적하였으니, 시호를 보각(普覺), 탑호를 정조(靜照)라 했다. 그해 10월 인각사 동쪽에 탑을 세웠다.
 
(2) 그 외 14세의 일연이 진전사의 장노 대웅으로부터 받음으로 해서 가지산문에 소속되었다. 진전사는 선승의 도의가 은거하던 곳이고 가지 신문이 연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연의 직함 중에는 "조계종가지산하 인각사주지" 라는 표기가 보인다. 조계종은 고려당시 선종을 통칭하는 것이었고, 가지산문이 성종 구산문 중의 하나임은 다 아는 사실이다. 821년 (현덕왕 13년)당나라로부터 귀국한 도의는 진전사에 은거했고 염거(廉居)가 이를 계승 했으며 염거의 뒤를 이은 체징이 9세기 중엽에 장흥의 가지산에 주석하면서 가지산문을 열었다. 고려전기는 선종의 침체기였고, 중기이후에 차차 부흥이 되었는데 인종때의 왕사 학일은 가지 산문의 대표적인 고승이었다. 고려의 선종은 최씨 무신 정권이 등장한 13세기 초부터 다시 성했는데 일연은 이무렵에 태어났다.
 
  13세기 전반 일연이 비슬산에서 수행에 몰두하고 있을 무렵의 가지산문은 성종중에도 상당한 세력을 펼쳤는데 혜문과 그 제자 담이 등의 활동이 돋보인다. 대선사 혜문은 개경의 화악사, 보제사, 운문사 등지에서 법을 전했고 담이는 1226년 용담사에서 가지 산문의 총림회를 해최하였다. 이무렵 가지산문에 속한 승려들은 스스로 제일 산문으로 자부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연은 가지 산문이 상당히 세력을 떨치고 있던 무렵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또한 그가 국사를 지냄으로써 가지 산문을 더욱 빛낼 수 있었다. 가지산문의 융성은 일연의 제자 보감국사 혼구에 이르기까지 계속 되었다.
 
 일연의 비문에는 "요사목우사상(遙嗣"牧牛和尙"), 즉 멀리 목우화상의 법을 이었다는 구절이 있어 문제가 되고 있다. 일연이 1261년에 강화도의 선월사에 주석하게 되면서 목우화상 지눌의 법을 잇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인해 일연의 법맥을 보조 지눌의 문하로 귀속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견해가 있고 요사를 승적을 얾겼다는 뜻으로 이해가기 어렵다는 주장이 있다. 일연은 가지산문에 소속된 선승임이 분명하다. 그는 자신의 저서"삼국유서"에서 "조계종가지산하인각사주지"라고 명기했었다.그리고 민지가 쓴 비문의 첫줄에도 "가지산하보각국존"일고 밝혔다. 일연의 제자인 보감국사 혼구의 비명에도 학일, 견명, 혼구에 이르는 가지산문의 인맥을 밝히고 있다. 지눌은 사굴산문 출신이다. 그러나 혜심은 스승지눌을 단순히 사굴산문을 중흥시킨 것이 아니라 구산문의 법맥을 종합하여 중흥시킨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일연은 인각사에 살고 있던 만년에 구산문도회를 두 번이나 개최한바 있다. 일연은 분명 가지산문에 속한 선승이었지만 당시 선종을 대표하는 고승이었다. 이것이 일연의 불교사적 위치였을 것 이다.
 
  50년동안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법도의 으뜸이라는 칭송을 들었던이가 곧 일연이다. 스님이 주석하는 곳을 따라 다투어 공경하고 사모하여 그 문하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던 것이다. 이제현이 "근세 비구로 불조의 도를 밝혀 후학에게 열어준이는 보각국사로 그 문도가 수천명에 달한다"라고 했는데 이 또한 일연의 역사적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다.
 
 5. 저서
(1) 삼국유사
삼국유사는 활자본이며, 5권 2책으로 구성되었다. 편찬 연대는 미상이나, 1281∼1283년(충렬왕 7∼9)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현재까지 고려시대의 각본(刻本)은 발견되지 않았고, 완본으로는 1512년(조선 중종 7) 경주부사(慶州府使) 이계복(李繼福)에 의하여 중간(重刊)된 정덕본(正德本)이 최고본(最古本)이며, 그 이전에 판각(板刻)된 듯한 영본(零本)이 전한다.

본서는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더불어 현존하는 한국 고대 사적(史籍)의 쌍벽으로서, 《삼국사기》가 여러 사관(史官)에 의하여 이루어진 정사(正史)이므로 그 체재나 문장이 정제(整齊)된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일연 혼자의 손으로 씌어진 이른바 야사(野史)이므로 체재나 문사(文辭)가 《삼국사기》에 못 미침은 사실이나, 거기서 볼 수 없는 많은 고대 사료(史料)들을 수록하고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문헌이다. 즉, 그 중에서도 특히 고조선(古朝鮮)에 관한 서술은 한국의 반만년 역사를 내세울 수 있게 하고, 단군신화(檀君神話)는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드는 근거를 제시하여 주는 기록인 것이다.
 
그 밖에도 많은 전설 ·신화가 수록된 설화문학서(說話文學書)라고도 일컬을 만하며, 특히 향찰(鄕札)로 표기된 《혜성가(彗星歌)》 등 14수의 신라 향가(鄕歌)가 실려 있어 《균여전(均如傳)》에 수록된 11수와 함께 현재까지 전하는 향가의 전부를 이루고 있어 한국 고대 문학사(文學史)의 실증(實證)에 있어서도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은 일찍이 본서를 평하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중에서 하나를 택하여야 될 경우를 가정한다면, 나는 서슴지 않고 후자를 택할 것”이라고까지 하였다.
 
  《삼국유사》의 체재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권1에 <왕력(王曆)> 제1과 <기이(紀異)> 제1을, 권2에 <기이> 제2를, 권3에 <흥법(興法)> 제3과 <탑상(塔像)> 제4를, 권4에 <의해(義解)> 제5를, 권5에 <신주(神呪)> 제6과 <감통(感通)> 제7과 <피은(避隱)> 제8 및 <효선(孝善)> 제9를 각각 수록하고 있다. <왕력>은 연표(年表)로서, 난을 다섯으로 갈라 위에 중국의 연대를 표시하고, 아래로 신라·고구려·백제 및 가락(駕洛)의 순으로 배열하였으며, 뒤에는 후삼국(後三國), 즉 신라·후고구려·후백제의 연대도 표시하였는데 《삼국사기》 연표의 경우와는 달리 역대 왕의 출생·즉위·치세(治世)를 비롯하여 기타 주요한 역사적 사실 등을 간단히 기록하고, 저자의 의견도 간간이 덧붙여 놓았다. <기이>편에는 그 제1에 고조선 이하 삼한(三韓)·부여(扶餘)·고구려와 통일 이전의 신라 등 여러 고대 국가의 흥망 및 신화·전설·신앙 등에 관한 유사(遺事) 36편을 기록하였고, 제2에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文武王) 이후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까지의 신라 왕조 기사와 백제·후백제 및 가락국에 관한 약간의 유사 등 25편을 다루고 있다.
 
<흥법>편에는 신라를 중심으로 한 불교 전래의 유래와 고승(高僧)들에 관한 행적을 서술한 7편의 글을, 다음의 <탑상>편에는 사기(寺記)와 탑·불상 등에 얽힌 승전(僧傳) 및 사탑(寺塔)의 유래에 관한 기록을 30편에 나누어 각각 실었다. <의해>편 역시 신라 때 고승들의 행적으로 14편의 설화를 실었고, <신주>편에는 밀교(密敎)의 이적(異蹟)과 이승(異僧)들의 전기 3편을, <감통>편에는 부처와의 영적 감응(感應)을 이룬 일반 신도들의 영검이나 영이(靈異) 등을 다룬 10편의 설화를 각각 실었으며, <피은>편에는 높은 경지에 도달하여 은둔(隱遁)한 일승(逸僧)들의 이적을 10편에 나누어 실었다. 마지막 <효선>편은 뛰어난 효행 및 선행에 대한 5편의 미담(美談)을 수록하였다.
 
  이처럼 《삼국유사》의 저술은 저자가 사관(史官)이 아닌 일개 승려의 신분이었고, 그의 활동 범위가 주로 영남지방 일원이었다는 제약 때문에 불교 중심 또는 신라 중심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북방계통의 기사가 소홀해졌으며, 간혹 인용 전적(典籍)과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뿐더러, 잘못 전해지는 사적을 그대로 모아서 수록한 것도 눈에 뜨이나, 그것은 《삼국유사》라는 책명(冊名)이 말해 주듯이 일사유문적(逸事遺聞的) 기록인 탓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하겠으며, 당시의 민속·고어휘(古語彙)·성씨록(姓氏錄)·지명 기원(地名起源)·사상·신앙 및 일화(逸話) 등을 대부분 금석(金石) 및 고적(古籍)으로부터의 인용과 견문(見聞)에 의하여 집대성해 놓은 한국 고대 정치·사회·문화 생활의 유영(遺影)으로서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기록한 일대 서사시(敍事詩)라 할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편찬에 있어 유교의 합리주의적 사고(思考) 또는 사대주의 사상으로 말미암아 누락시켰거나, 혹은 누락되었다고도 보여지는 고기(古記)의 기록들을 원형대로 온전히 수록한 데에 오히려 특색과 가치를 지니며, 실로 어느 의미에서는 정사(正史)인 《삼국사기》 이상의 가치를 지닌 민족사의 보전(寶典)이라 일컬을 만하다.

  《삼국유사》의 신간본(新刊本)으로는 1908년 간행된 일본 도쿄대학 문학부[東京大學文學部]의 사지총서본(史志叢書本)이 가장 오래된 것이고, 조선사학회본(朝鮮史學會本)과 계명구락부(啓明俱樂部)의 최남선 교감본(校勘本) 및 그의 증보본(增補本)이 있으며, 그 밖에 1921년 안순암(安順庵) 수택(手澤)의 정덕본을 영인(影印)하여 일본 교토대학 문학부 총서[京都大學文學部叢書] 제6에 수록한 것과 고전간행회본(古典刊行會本)이 있다. 8·15광복 후로는 삼중당본(三中堂本), 1946년 사서연역회(史書衍譯會)에서 번역하여 고려문화사(高麗文化社)에서 간행한 국역본(國譯本), 이병도(李丙燾)의 역주본(譯註本) 등 여러 가지가 있고, 동서문화센터의 이학수(李鶴洙) 영역본(英譯本)과 1954년 《역사학보(歷史學報)》 제5집의 부록으로 이홍직(李弘稙)의 삼국유사 색인이 발간된 바 있다.
 
 참고 사이트 인각사 : http://www.ingaks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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