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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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서산마애삼존불을 찾아서

鶴山 徐 仁 2008. 10. 30. 21:52

경주 남산에 가면 마애칠불상 등 마애불상들이 부지기수로 많다. 그 웅대하고 신비스러움은 필설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이다. 마애불상이란 닦을 마 자에 가장자리 애 자를 써서 크고 높은 바위벽에 부처상을 새겨놓은 것을 말한다. 바위의 견고함과 영원함에 의지하여 불상의 생명을 영원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백제의 마애불상은 제대로 된 것을 보지 못하다가, 이번에 그렇게도 벼르던 서산 마애삼존불상을 가보게 되었다. 북한산에 있는 승가사의 마애불상은 그 크기는 어떤것보다 압도적이지만 고려시대 것으로 전해지고,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의 마애불상도 높이 평가되고 있지만 한분만을 모신데다가 너무 작아 볼폼이 없다.
 

 서산 마애삼존불상은 물론 국보로 지정되어 있지만, 이것의 가치는 제작연대가 백제후반기라는 사실이다.
 

경주 남산 마애불상들의 제작시기가 대부분 통일신라시대이다. 불국사와 석굴암을 지은 김대성이 생존했던 시기도 신라 35대 경덕왕 때이다. 
 

경덕왕의 재임기간이 742에서 765년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면 8세기 중반기이다.
 

 그러나 서산마애3존불상은 6세기 중반경이라하니 백제의 멸망기이고, 신라 불상들의 제작연대인 통일신라 전성기인 경덕왕 시대보다 근 200년이나 앞선다.
 

 서산 마애 3존불 상을 보았다는 사람들을 주변에서 만나기 어렵다. 왜냐하면 서산이라 하면 서해안쪽으로 빠져 있는데다가 주변에 변변한 관광거리가 없어서 이것 하나만을 보러 가기에는 좀 힘들기 때문이다. 지금은 승용차를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꼭 그런 이유도 아니지만,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에는 사실 서산삼존불상을 찾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삼존불상의 한복판은 석가여래 입상이고, 좌편은 보살상으로 과거불이며, 오른 편은 미륵상으로 미래불이다. 세분 불상들이 보여주는 은은한 미소는 과연 <백제의 미소>라는 품평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해빛이 비치는 각도에 따라 불상들의 미소도 그 느낌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일행이 탄 관광뻐스 기사가 삼존불상이 있는 곳을 찾지 못해 서산 일대를 해메다가 간신히 물어물어 찾아갔다. 뚱땅거리며 먹고노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는 요즈음의 관광객들의 눈에 바위에 패여진 세분 보일까 말까하는 부처상이 그리 대단해 보일 턱이 없는지도 몰랐고, 그래서 혹시 이 지역 관광객들을 실어날랐던 기사 아저씨도 여기로 차를 몬 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물어물어 간신히 찾아간 여기 서산마애삼존불상 앞에 선 필자는 놀라움으로 입이 벌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 은은한 미소는 신라 남산의 마애불상 못지않았을 뿐만아니라, 그 고색창연함에 기가 질렸던 것이다. 아 백제인들이여, 어찌 이렇게도 아름답고 영원한 미소를 머금은 불상을 조각하였던가.
 

 나의 아마츄어같은 생각으로는 백제인들의 이 바위 조각기술이 신라에 전수되어 남산 마애불상들을 조각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정부에서도 서산마애삼존불상의 보전에 심혈을 기우리고 있다. 한때 유리집을 만들어 비바람으로부터 세 부처님을 보호하였으나, 백화가 피어 오히려 나쁘다는 중론에 따라 최근에 이 유리집을 철거하였다고 한다.여기서 백화라 함은 곰팡이를 말한다.
 

같이 동행한 소설가 곽명규씨와 김숙자 시인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관광버스 기사가 마애삼존불을 찾아 헤메고 있는데, 배의웅이 핸드폰을 했다.  자기도 어디로 여행가고 있는 중인데 우연히도 옆자리에 앉은 사람과 대화가 되었고, 그 사람이 의웅의 얘기를 듣고 경북사대부고를 나왔다니 정소성이라는 소설가를 아느냐고 물었는데, 무슨 최근 나의 졸작인 <바람의 여인>을 읽었다나. 전화를 바꿔받은 그 여행자, 대뜸 한다는 소리가 소설중에 나오는 혼혈아 여자주인공이 진짭니꺼...
 

 날이 어두워지고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데가, 시간이 촉박하여 우리는 아쉬움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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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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