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의 軍史世界
전략폭격기의 진정한 아버지 [ 上 ]
더 센 놈이 필요해서
살얼음판 같은 불안한 평화가 간신히 이어지던 1939년 4월, 일단의 미 육군 항공대 관계자들이 차후 전쟁이 일어날 경우 적국이 될 가능성이 농후했던 독일의 루프트바페를 참관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는데 방문결과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경악 바로 그 자체였습니다. 한마디로 미국이 상상했던 이상으로 독일 공군이 강력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재군비 시간이 짧았음에도 독일은 단기간에 강력한 전력을 구축하였습니다 ]
미국은 구대륙과는 거대한 대양으로 동 떨어진 지리적인 여건 때문에 항공전력 정책에 있어 전투기보다는 장거리 작전이 가능한 폭격기분야에 주력하였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당시 미국의 전투기 성능이 유럽 열강들의 경쟁기종과 비교하여 뒤처져있었고 미국도 그러한 사실은 인정하였지만 그래도 폭격기만큼은 앞서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 인상적인 노즈아트를 가지고 있던 전쟁 초기 미군의 주력 전투기 P-40 멋있는 모습과 달리 당시 영국, 독일은 물론 일본의 주력기보다 성능이 뒤졌습니다 ]
그런데 그들이 참관한 루프트바페 또한 뛰어난 폭격기들을 보유하고 있어 미국의 놀라움은 컸습니다. 독일이 당장 전쟁을 일으켜도 미국과 총을 섞을 가능성은 적었지만 그래도 정치적으로나 외교적으로 우호적으로 지낼 가능성이 크지 않았던 가상 적국이 좋은 무기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걱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루프트바페의 中폭격기 Ju-88 ]
물론 객관적인 성능으로 보아 미국이 그 즈음 본격 제식화하기 시작한 B-17 초기형 보다는 미흡하였지만 그들의 눈으로 직접 확인한 독일의 폭격기세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때문에 참관단은 귀국하여 새로운 계획을 입안하기 시작하였는데 골자는 막 등장시킨 B-17 보다 더 강력한 무장 탑재량과 장거리 비행능력을 지닌 폭격기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고 그해 가을 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실행에 옮기게 되었습니다. ( 관련글 참조 )
[ B-17 이 대량 제작되고 있었으나 차후 전쟁에 대비하려면 이보다 고성능의 重폭격기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었습니다 ]
미 육군은 차세대 폭격기의 제작을 여러 항공기 제작사에 의뢰하였는데, 1941년 제출된 여러 시안 중 보잉 Boeing 社의 제안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군 당국이 설계도면만 보고 선 발주를 하였을 정도로 보잉사의 제안내용이 경쟁사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뛰어났는데,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뛰어든 1942년에 개발과정에 있던 이 장거리 폭격기는 이미 1664 기나 주문되었을 정도였습니다.
[ 보잉사의 제출안이 채택되어 일사천리로 개발 및 발주에 들어갑니다 ]
바로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최초의 전략폭격기로 인정받는 너무나도 유명한 B-29 Super Fortress 입니다. 개발도중 군 당국의 옵션요구와 여러 문제로 인하여 수차례의 설계변경이 있은 후 1943년 2월 시험비행에 나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암담한 사고를 겪었으나 그해 7월 모든 시험을 일사천리로 통과한 완성 시제품 XB-29 가 선보였습니다.
[ 처음 선보인 XB-29 프로토타입 ]
XB-29 는 10톤의 폭장량과 6,000 Km 의 항속거리, 9000m 고도에서의 고고도 작전능력을 갖추어 기존의 폭격기가 가지고 있던 개념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괴물이었습니다. 새롭게 개발 된 여압장치는 승무원들이 산소마스크와 방한복 없이 평상복차림으로 근무할 수 있게 해주었고 비행기록을 기록해주는 블랙박스 장치도 장비되었는데 이러한 기술은 민항기의 발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 전쟁이 발발하자 즉시 대량 생산됩니다 ]
1944년 3월 B-29 로 이뤄진 제20폭격사령부가 창설될 무렵 유럽전선은 독일의 패망이 가시화되어 8공군이 대량 보유한 기존의 B-17 만으로도 효과적인 작전이 가능하다고 판단되어 미 육군은 B-29 를 태평양전선에 투입하였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올바른 전략으로 점과 점으로만 연결되는 태평양전쟁의 특성상 장거리를 비행하여 직접 일본 본토를 타격하기에는 B-29 가 훨씬 유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계속 ) [ august 의 軍史世界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