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9장 17절 - 18절
“저희가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 (히브리 말로 골고다) 이라 하는 곳에 나오시니 저희가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십자가는 노예를 처참하게 죽이는 형틀입니다.
로마 시민권 자는 절대로 아무리 극악한 죄를 저질렀다 하여도 십자가에 죽이지 않습니다.
이방인이나 노예를 잔인하게 죽이는 사형 틀입니다.
십자가로 죄수를 처형하는 법은 죄수를 사형장으로 끌고 와서 먼저 옷을 벗기고, 죄수를 십자가 위에 눕히고, 십자가의 가로지른 나무에 끈으로 손을 묶고, 그 위에 못을 처박고, 십자가의 세로 목에다가는 양발을 포개고 거기에다 대못을 박습니다. 그리고 눕혔던 십자가를 세워 구덩이에 밀쳐 던져 세웁니다.
십자가의 처형은 인간이 최대의 고통을 당하며 죽게 하는, 최대의 고통을 주면서 죽이는 사형 방법입니다.
십자가는 죄수의 생명이 다하는 때까지 가장 극심한 고통으로 사람을 말라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 보다 덜 고통스러운 사형 법은 산사람을 죽은 송장에다가 같이 묶어 놓아 죽이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피가 마르고, 목이 마르고, 뜨거운 햇볕에 땀이 마르고, 양손과 발에는 쇠 독이 올라서 손발이 뚱뚱 붓게 됩니다.
뜨거운 사막성 기후에서 대개 2-3일 걸리어 서서히 괴로움에 지쳐 죽는 것이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독일의 외과 의사인 리히터(Richter)는 십자가의 고통이 육체에 미치는 고통과 인간의 신체에 미치는 죽음의 상황을 의학적으로 정확하게 조사를 하였습니다.
1. 십자가에 못 박힌 신체의 부자연스러운 자세는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격렬한 고통이 옵니다.
체중이 세 개의 못에 매 달려 있으니, 얼마나 몸이 부자연스러우며 고통스러운가를 상상해 보기 바랍니다.
2. 심장으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신경과 힘줄, 핏줄로 가득찬 손과 발을 뚫고 들어간 못은 견디기 어려운 아픔을 일으킵니다.
3. 뜨거운 햇살에 드러난 많은 상처 자리는 출혈이 되어 부패하기 시작하며, 시시각각으로 전신의 고통을 가져옵니다.
물론 피비린내가 나는 곳에는 쇠파리가 몰려들고, 피를 빨아먹어도 쫓을 수 없는 그 괴로움의 고통은 상상할 수 있습니다.
4. 상처로 인하여 몸이 부은 부분에서는 다른 부분보다 동맥으로부터 많은 피가 흘러나오지만 정맥이 이를 다 흡수하지 못함으로 인하여 머리나 위로 남게 되는 이 여분의 피로 인하여 뇌의 혈관은 억눌리고 부풀게 됩니다. 이러한 혈액의 순환 장애는 죽음 그 자체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내적 흥분, 근육의 긴장, 불안감을 일으킵니다.
5.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점차 심하여져 오는 영혼의 갈등과 번민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합니다.
6. 이 모든 고통 외에도 전신에 파고드는 목마름의 고통이 있습니다.
이 밖에도 머리에는 가시관의 따가움, 야만스러운 군인들의 매질, 최후의 만찬 후에 한잠도 주무시지 못한 주님의 정신적, 육체적, 영적인 괴로움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나와 무슨 관계와 의미가 있습니까?
이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쏟아진 증거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 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의 사랑은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무참한 고통으로 죽이시면서 까지 나를 구원하기 위하여 대신 죽으시고 생명을 바꾸는 사건입니다.
이것은 전설도 아니고, 옛이야기도 아니고 실제 사건입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대신하여 이러한 무참한 고통 속에 죽으셨다는 사실이 믿어지는 사람이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이 십자가의 사건은 오늘날에도 실제로 증명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51절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셔서 6시간 동안만 고통을 당하시다가 운명을 하시었습니다.
예수님이 운명 할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지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졌고, 많은 자던 성도들이 부활을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 사는 자연 과학자가 부업으로 성지 순례를 오는 사람들을 안내하며 돈을 벌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성지 순례를 안내는 하지만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은 자연신론자로 가끔 기독교의 목사나 신부가 성지 순례를 오면 안내를 하면서도 놀려 주는 그러한 사람입니다.
콘스탄틴 대왕이 세운 거대한 돔이 덮여 있는 갈보리 동산의 갈라진 바위를 안내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번 와서 보며 무심히 안내만을 하다가 갑자기 자기 동료에게 이제부터는 자연신론을 버리고 예수를 믿겠다고 말합니다.
어째서 갑자기 바뀌는가 하고 물으니 이 자연 과학자는 “나는 오랫동안 자연 과학과 수학을 공부하였는데 오늘 이 쪼개진 바위를 보니 마음이 변하게 되었네. 이 바위를 내가 자세히 관찰하여 보니 자연 현상이나 일반 지진으로 쪼개진 바위가 아닐세”
바위는 어느 충격이나 지진을 받으면 반드시 결을 따라 쪼개지는데 그 이유는 바위의 결합력이 가장 약한 부위를 따라 쪼개지고 갈라지는데 나는 이런 바위를 많이 보아 오며 연구를 하였는데 모든 바위는 자연의 법대로 쪼개지고 갈라지고 있었지만 그런데 이 바위는 다르게 쪼개진 것이다. 하며 이런 경우는 자연 현상이나 예술이 이룰 수 없는 기적의 결과이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바위가 터졌다는 말에 맞기에, 나는 이제부터 예수를 믿기로 했다네. 예수가 참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그 증거가 기념비로 내 눈에 직접 보여졌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은가 나는 감사하며 예수를 믿기로 했네 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십자가의 사건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고, 역사적으로도 증명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대할 때에, 주님의 고통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알게 되고, 또 나 자신의 새로운 각오가 십자가 앞에서 있어야 합니다.
독일의 어느 성직자가 12년 동안 성직에 봉사를 하였지만 십자가와 주님에 대하여 대속의 은혜와 속죄에 대한 감사나 주님에 대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저 습관적으로, 형식적으로 직업적으로 의식적으로 성직에 봉사를 할뿐입니다.
어느 날 부잣집 아이에게 세례를 주고서 부잣집에 세례를 베푼 여러 사람과 함께 초대를 받아 갔습니다.
자기가 앉은자리 맞은편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그 밑에는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하여 이를 행하였으되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행하였나”
이 성직자는 이 글귀가 자기 마음을 너무 크게 때리어 저녁도 잘못 먹고 돌아 왔지만
“너는 나를 위하여 무엇을 행하였나”
이 말이 자꾸 자기 머리를 때리어 그는 마침내 마음을 열고 주님께 고백을 하며 그 은혜를 깨닫고 얼마 안 되어 석 달 후에,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물로 기쁨으로 웃으며 감사하며 운명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내가 주님을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를 한번 반성하여 보아야 합니다. 나도 주님께 대한 진실 된 사랑의 고백과 감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이 주님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나도 깨닫고 주님께 사랑의 고백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1. 버리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요한복음 10장 15절 - 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고, 12영이 더 되는 천사도 동원할 권세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양 무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시고, 십자가에 올라 가셔서 내 대신 죽으시었습니다.
영광과 보좌를 다 버리시고 고난, 고통 속의 세상에 오셔서 자기 생명을 버리시고 양을 구하신 선하신 목자의 사랑을 베푸시었습니다.
생명을 나를 위하여 버리신 주님께 나도 주님을 위하여 버리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죄악을 버리고, 불신앙을 버리고, 옛 사람을 버리고, 자기의 못된 행실을 버리고, 고집을 버리고,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2장 1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도 십자가에서 죽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대신 주님이 죽으셨으니, 그 사랑을 깨닫고 보답을 하며 믿음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오직 예수만을 의지하고, 바라보고, 예수만을 믿고 사는 것이 바로 십자가 사랑 앞에 나도 함께 십자가의 사랑을 보답하는 길입니다.
영광 보좌 버리시고 자기의 육신의 생명까지 고통을 당하시며 버리신 주님 앞에 그 보답은 오직 믿음 안에 사는 것입니다.
2. 동참하는 것이 십자가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 38절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골고다까지 찾아가는 것이 바로 내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요, 이러한 십자가의 동참이 있을 때에 주님께 합당한 자가 됩니다.
나의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주님을 따르는데에 짐이 되고 무겁고 힘든 것이 바로 나의 십자가입니다.
나 개인에게는 선교가 십자가요, 교회가 나의 십자가입니다.
각자 교회의 직분을 따라 주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서 십자가가 다릅니다.
이 십자가를 벗어버리면 주님 앞에 합당한 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십자가를 잘라 버리지 말고,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선택하여, 주님의 골고다 십자가로 나아가는 사람이 주님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3. 십자가는 대신 죽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13절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사랑이 없나니”
십자가는 자기의 목숨을 대신 버리는 사랑이 십자가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능히 십자가의 고통에서 벗어 날수가 있습니다. 말 한 마디만 하여도 12개 사단의 천사가 동원되어 세상을 멸할 수도 있는 입장에 있었지만,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어 고통을 당하시며 대신 죽으시었습니다.
구약 시대에서는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소나 짐승이 피를 흘리며 죽었고, 신약 시대에는 예수님이 내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며 대신 죽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교회에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아니요,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를 믿기 위하여서는 자기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죄인은 반드시 죽는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 이 죽음의 길에서 벗어나는 길은 예수가 내 대신 십자가에서 먼저 죽어 주셨다는 것을 알고 믿으면 다시 죽을 수 없는 구원에 이릅니다.
나는 죄가 없고 잘 못한 것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직 예수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임으로, 예수를 믿을 수가 없는 사람이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전도를 할 때에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이런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는 과정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죽을 사람임을 인정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셨다는 사실을 알고, 믿고 감사를 하는 것이 예수를 믿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죽어 주시고, 나를 살려 주신 은혜가 너무 고마워서, 우리가 예수님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넘치는 것이요, 예수님을 보내 주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며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자기의 목숨을 대신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본 받아 내 목숨도 다른 사람을 위하여 버리는 희생의 삶을 살아가야 마땅한 것입니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성도들이 순교를 당하며, 선교사로 나가서 복음을 전하다가 목숨을 버리었고, 믿음을 지키다가 목숨을 버린 수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믿음의 선배들의 뒤를 따라서 목숨까지 버리는 각오를 갖고, 희생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안 중근 의사는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 목숨을 나라를 위하여 버렸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우리 민족을 사랑하여 대동강에서 목숨을 버렸습니다.
나도 중국 동포들을 사랑함으로 선교사로 목숨을 버릴 각오로 그들을 찾아가서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사랑에는 자기 목숨이 귀하게 여겨지지 않습니다. 자기 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식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흔히 보고 있습니다.
자식이 아플 때에 네 목숨과 내 목숨과 바꾸자는 마음을 갖는 것이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참 사랑은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신 담당하는 것인데,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 자기 목숨을 대신 버려 주시었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나의 생명과 바꾸는 일을 서슴없이 하신 하나님의 사랑, 주님의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은 잘 느끼지 못하여도 언젠가는 이 것이 절실히 느껴지고 깨달을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4. 십자가는 희생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5장 7절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희생이라는 말은 어떤 목적을 위하여 몸을 바쳐 돌보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여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하여 3년 동안 말씀으로 가르치신 후에, 마지막에 자신을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완전한 희생을 이루었습니다.
우리도 자기의 모든 지위와 영광과 물질을 희생하는 자가 될 때에,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됩니다.
슈바이쳐 박사는 음악 박사, 철할 박사, 신학 박사, 의학 박사 등 여러 개의 세계적인 권위를 가진 고명하신 학자입니다.
언젠가 슈바이쳐 박사의 파이프 올간 연주를 들은 일이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부러움이 없는 이러한 박사님이 어째서 아프리카 흑인들을 위하여 일생을 희생하였나 하는 생각에 젖을 때가 있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쳐 박사라는 이일선 목사님을 나는 잘 알고 있고 존경을 합니다.
서울 대학교 의과 대학을 나오신 의사요, 목사입니다.
슈바이쳐 박사 밑에서 3년 동안 문둥병을 공부하고, 흑인들을 함께 돕다가 귀국하였습니다.
서울에서 신일 교회라는 큰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도 성공한 목회자입니다.
어느 날 선친에게 이 일선 목사님이 편지를 보내 왔습니다.
나는 목회에 성공을 하였지만 희생 없는 사랑은 괴롭게 생각이 되어 서울을 떠나서 울릉도에 가서 문둥병자를 치료하며 그곳에서 선교를 하며 여생을 보내겠다고 편지가 왔고, 얼마 안 되어 울릉도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54년 전의 일로 이 때는 울릉도가 문화적으로 비참하고 병원도 없는 그러한 외딴 섬이었습니다.
오늘날의 서울의 대형 교회 목사들과 큰 대조를 이룹니다. 자기 교회를 대를 이어 물려주려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는 희생의 사랑입니다.
그 곳에서 오랫동안 울릉도 병원을 운영하며 교회를 개척하고 섬기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후에는 이 일선 목사님의 아들이 의사가 되어 아버지의 대를 이어 병원을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의 사랑을 받았으면 나도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당신은 주님을 위하여 희생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찬송가 185장
1절] 내 너를 위하여 몸 버려 피흘려 네 죄를 사하여 살길을 주었다 너위 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너 위해 몸을 주건만 날 무엇 주느냐
2절] 아버지 보좌와 그 영광 떠나서 밤같은 세상에 만백성 구하려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내 몸을 희생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3절] 죄중에 빠져서 영죽을 인생을 구하여 주려고 나 피를 흘렸다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네 죄를 대속 했건만 너 무엇 하느냐
4절] 한없는 용서와 참사랑 가지고 세상에 내려와 값없이 주었다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이것이 귀중하건만 날 무엇 주느냐
5. 십자가는 부활입니다.
골로새서 2장 15절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 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십자가의 사랑은 모든 죄를 사하시는 사랑이요, 마귀의 참소를 도말하여 버리고, 율법의 모든 속박에서 벗어나는 승리의 사랑의 십자가입니다.
우리가 예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에서 해방되어 부활 생명을 누리고, 모든 의문의 법, 구약의 율법에서 자유케 되어, 이제는 예수만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참 부활의 생명을 누립니다.
십자가의 사랑은 승리 생활로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하여 방종하여 말씀을 어기면 안 됩니다.
그 은혜가 감사하여 나를 사랑하여 주신 아버지,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背恩忘德한 자가 되지 말고, 그 구원의 감격을 이루고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1. 많은 사람에게 이 십자가의 사랑을 전하여 예수를 믿고 생명을 얻게 하여야 할 것이요
2.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거룩한 삶을 살아 다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삶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요
3. 남을 사랑하며 이웃을 봉사하며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4.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복을 다 받아 누리는 우리가 되어야 십자가를 헛되이 하는 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의 생명의 삶, 새로운 변화 된 삶을 가져다주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정리
우리는 예수 십자가를 깊이 생각하며, 그 십자가의 사랑의 감격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감격이 없는 십자가는 하나의 장식이요 우상이 됩니다.
어떤 교파는 이러한 십자가 우상이 싫어서 교회에 십자가를 두지 않는 교회도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사랑과 감격을 갖고 예수 십자가에 동참하는 성도가 되어 내 십자를 지고 희생을 하며 주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고 갈 때에 손해를 당하고 희생을 하는 것 같으나, 십자가의 죽음이 있고, 그 사랑이 있은 후에야 영광의 부활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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