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상류쪽으로 1.3km 떨어진 보원사지에 들렸다.
대사찰은 사라지고 돌로 된 유적만이 흰눈속에 펼쳐졌다.
100개의 암자와 1000인의 승려가 거주하였다는데 지금은 찬바람만이 휑하니 불고있었다.
학술조사하는 젊은이들이 그 흔적을 찾으며 역사의 재현을 꿈꾸고 있었다.
서산 보원사지(사적 제316호) 안내표시판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龍賢里)에 위치하며 백제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법통을 이어왔던 절의 터.
사적 제316호. 절에 대한 역사는 전혀 전하지 않으며 현재 넓은 절터만이 있다. 북위(北魏) 양식을 띤 6세기 중엽경의 금동불입상과 8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금동불입상이 출토되었다. 현재 절터에는 5층석탑(보물 제104호)·당간지주(보물 제103호)·석조(石槽:보물 제102호)·법인국사보승탑(法印國師寶乘塔:보물 제105호)·법인국사보승탑비(法印國師寶乘塔碑:보물 제106호)가 남아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 철불 1구가 이곳에서 박물관으로 옮겨졌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 8세기로 추정되고 있는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의 철불좌상도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절터에서 옮겨온 것으로 전하고 있어 이곳에서 출토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설명 : 다음 백과사전>
보원사지 당간지주(보물제103호)이다.
보원사지 학술조사단이 설원에서 조사에 전념하고 있다.
냇가에 물이 얼었다.
돌징검다리를 건너야 보원사지에 닿는다.
보원사지 5층석탑(보물제104호)이다.
신라시대 석탑의 전형양식을 계승한 고려초의 석탑. 보물 제104호. 높이 900㎝. 기단은 2중기단으로 하층에는 사자상이, 상층에는 팔부중상(八部衆像)이 얕은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상층기단 위에는 별석(別石)을 끼워 5층의 탑신부(塔身部)를 받치고 있으며, 초층(初層) 탑신에는 우주(隅柱)와 문비가 모각되어 있다. 2층 이상의 탑신은 체감이 완만하며, 옥개석은 넓고 끝이 반전되어 백제석탑의 단면을 볼 수 있다. 상륜부에는 찰주(擦柱)가 남아 있으나 부재는 노반(露盤)만 남아 있다. 탑의 형식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보원사가 중건될 때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설명 : 다음 백과사전>
5층석탑의 기단에 새겨진 팔부중상이 특이하단다.
5층석탑의 정면도이다.
5층석탑의 상륜부이다.
법인국사 보승탑(보물제105호)이다.
고려 광종대에 활약한 법인국사 탄문(坦文)의 부도. 보물 제105호. 높이 470㎝. 8각원당형의 부도로 기단부가 좁고 높아 전체적으로 세장(細長)한 구성을 보여준다. 기단부의 하대석은 8각이며 안상(眼象) 안에 다양한 자세의 사자상이 양각되어 있다. 중대석의 받침은 원형으로 구름에 싸여 있는 용이 조각되어 있는데 도식적인 표현이 보인다. 중대석은 장식이 없는 8각기둥이며, 상대석에는 앙련(仰蓮)이 양각되어 있다. 8각의 탑신석은 중대석처럼 좁고 높으며, 사천왕상·문비(門扉)·인물상이 돌아가며 얕은 부조로 양각되어 있다. 옥개석은 큰 편으로 귀꽃이 장식되어 있다. 탄문은 900년(효공왕 4)에 출생하고 975년(광종 26)에 입적한 화엄종 계통의 승려이다. 부도는 탑비(보물 제106호)의 건립이 978년인 것으로 보아 법인국사가 입적한 975~978년 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원종대사혜진탑(977)에 비해 전체적인 조형이 섬약하다. <설명 : 다음 백과사전>
법인국사 보승탑비(보물제106호)이다.
학술조사단 숙소 뒷편이 모아둔 보원사지 석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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