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1월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돼 중앙 정치무대에 등장한지 불과 3년여 밖에 안된 점을 감안하면 이번 승리는 무명의 정치인이던 그가 얼마나 빨리 미국의 차세대 정치인으로 급부상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오바마 의원은 1961년 8월4일 하와이주 호놀룰루에서 케냐 출신의 흑인 아버지와 캔자스주 출신의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혼혈인 자신을 스스로 ‘아프리카계 미국인’이라고 하는 오바마의 어린 시절은 순탄치 않았다.부모의 결별로 친척들의 손에서 자라기도 했고 어머니가 인도네시아인과 재혼한 이후 유년시절의 4년 간을 인도네시아에서 살기도 했다.
그는 또 자신이 30대 초반에 쓴 회고록 ‘내 아버지로부터의 꿈’을 통해 고교시절 마약을 접했었다는 것을 인정해 논란이 되기도 했고 청소년 시절 인종 문제로 정체성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컬럼비아 대학에서 정치학을 전공한 그는 하버드 법대에 들어갔고 권위있는 법률 학술지 ‘하버드 법률 리뷰’의 첫 흑인 편집장을 지냈다.
뉴욕 할렘과 시카고의 빈민지역에서 활동가로 일하기도 했던 그는 1990년대 초에 일리노이주의 인권 변호사로 명성을 높이며 지역에서 기반을 다진 뒤 1996년 일리노이주 주 상원의원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본격 발을 들여놓았다.
주 상원의원을 3번 연임한 그는 2004년 여름 보스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인종에 관계없이 미국인은 모두 하나라는 내용의 기조연설로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었고,이후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70%의 기록적인 득표율로 당선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대중을 사로잡는 연설과 밝은 미소,신선함으로 인기를 높이며 민주당의 대선 후보로 급부상한 그는 결국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향한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중앙정치 무대에서 그의 급부상은 곧 그의 약점이 되고도 있다.그의 경쟁자들은 대선 후보로서 그의 짧은 ‘정치경력’을 지적하며 대통령 후보로서의 자질을 문제 삼고있어 그가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로 최종 지명되더라도 이 문제가 계속 약점이 될 수도 있다.
한편 오바마는 시카고대학병원 대외업무 담당 부원장인 부인 미셸(44)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프린스턴대에서 사회학을 전공한 뒤 하버드 법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미셸 오바마는 남편의 선거자금 모금에 발벗고 나서는가 하면 오바마 의원의 강력한 경쟁자인 힐러리 클린턴 상원의원을 맹렬히 공격하기도 하는 등 다른 정치가 아내의 틀을 벗어나는 신세대 미국 여성상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아이오와 코커스에서 승리의 신화를 창조한 공화당의 마이크 허커비는 누구인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무명인사였던 그가 경선 중반부터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최대경쟁자였던 미트 롬니 전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비롯,루돌프 줄리아니 전 뉴욕시장,존 매케인 상원의원 등 쟁쟁한 경쟁자들을 꺾고 이변을 연출하자 미 언론들은 허커비에 대한 인물 재조명에 나섰다.
뛰어난 유머감각과 화려한 언변을 자랑하는 침례교 목사인 허커비는 올해 52세로 이번 승리를 계기로 민주당의 힐러리 클린턴,버락 오바마에 대적할 공화당의 기대주로 급부상했다.
특히 반(反) 조지 부시 여론 때문에 한때 재집권을 포기할 정도였던 핵심 보수층에겐 구세주나 다름없는 인물로 부상했다.
보수층으로서는 두 번 이혼하고,낙태와 동성애를 지지하는 줄리아니와 모르몬교 신자인 롬니를 좋아하기 어려운 현실이다.반면 허커비는 낙태와 동성애,총기규제를 강력히 반대하는 확실한 보수주의자다.때문에 부시 대통령 재선의 최대기반이었던 기독교 복음주의자들이 3개월여 전부터 허커비를 본격적으로 밀기 시작했다.
복음주의자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고(故) 제리 팔웰 목사의 아들 제리 주니어 팔웰은 지난해 11월 27일 허커비 지지를 공개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허커비는 1955년 8월 24일 미국내 가장 가난한 주로 평가받는 아칸소주의 인구 1만명 소도시 호프(Hope)에서 태어났다.집안 형편은 넉넉하지 못했고 콰치타 침례교 신학대와 남서 침례 신학대(석사)를 졸업했다.한때 라디오 토크쇼를 진행하기도 했다.
1993년부터 1996년까지 아칸소주 부지사를 지낸 뒤 주지사 선거에 당선,올해 1월 대선 출마를 위해 주지사직을 포기할 때까지 재직했다.
1974년 5월 부인 제닛 매케인과 결혼했고,슬하에 아들 존 마크와 데이비드,딸 사라 등 3명을 두고 있다.한때 체중 136㎏의 거구였으나 2003년 당뇨병 진단을 받고 무려 54㎏을 감량했고,‘나이프와 포크로 당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를 그만두라’ 등 다수의 저서를 갖고 있다.
서민집안 출신답게 “조상 대대로 고교 졸업자는 우리 집안에 내가 처음이고,나의 삶은 미국인의 꿈을 대변한다.”거나 “예수는 나의 러닝메이트”라는 튀는 발언으로 유권자들의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다.
물론 이는 백만장자 출신 주지사의 아들로 태어나 벤처 투자에 성공해 억만장자가 된 모르몬교 출신 롬니 후보를 겨냥한 의도된 발언이었다.애초 아이오와에서 줄곧 1위를 달리던 롬니는 결국 허커비의 치밀한 선거전략에 밀려났다고 볼 수 있다.
아울러 허커비는 여러 면에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닮은 꼴이다.같은 아칸소주 출신에다 대선 출마 직전까지만 해도 전국적으로는 무명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한 것이 흡사하다.게다가 악기를 잘 다루는 것도 공통점이다.클린턴은 섹소폰을,허커비는 기타를 잘 다룬다.선거 유세과정에서 학교 밴드와 함께 베이스 기타를 연주하기도 했다.‘공화당의 빌 클린턴’이라는 얘기를 듣는 이유다.
디모인(美 아이오와)=연합뉴스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