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외국작가 畵壇

Camille Pissarro

鶴山 徐 仁 2007. 5. 29. 21:19
카미유 피사로 (Camille Pissarro) - 1830년 7월 10일 (프랑스) - 1903년 11월 13일
프랑스-인상파 화가

피사로는 성공한 유대인 상인인 아브라함 가브리엘 피사로와 라셸 만자노 포미에의 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고향을 떠나 파리에서 공부하면서 일찍이 미술에 대한 관심을 보였다. 5년 뒤 서인도제도로 돌아와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면서 이 이국적인 섬과 그곳의 주민들을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는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으나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자 1853년 카라카스로 도망쳐서 2년간 그곳에서 덴마크의 화가인 프리츠 멜비와 함께 머물렀다. 마침내 아버지의 마음이 누그러지자 1855년 프랑스로 돌아갔다. 이 시기에 그린 가장 초기의 작품들은 열대지방과 프랑스 시골의 풍경화 및 인물화인데, 그것들은 대담하게 그린 것이기는 했지만 그뒤 그의 전생애에 걸쳐 그의 미술의 특징이 된 자연에 대한 꼼꼼한 관찰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입학한 국립미술학교에서는 평범한 전통미술을 가르쳤기 때문에 이에 흥미를 못 느낀 피사로는 화가인 카미유 코로를 추종했는데, 코로는 1864년의 살롱 전람회에서 피사로가 스스로를 코로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을 허용했다. 이무렵 피사로는 바르비 종파의 미술가인 장 프랑수아 밀레의 전원적이고 감상적인 그림들과 일상적인 사실주의의 대표적 화가인 귀스타브 쿠르베의 작품들에도 매력을 느꼈다. 1860년대에는 미술가들과 작가들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유명한 파리의 카페 게르부아 토론회에 참가했으며, 젊은 화가들인 오귀스트 르누아르나 클로드 모네와 함께 활동했다. 1870년 프랑스-독일 전쟁을 피해 영국으로 도피했으며, 그곳에서 역시 프랑스에서 망명한 모네와 함께 여러 박물관을 돌아보면서 영국의 풍경화들을 감상했다. 그는 런던에서 예전에 그의 어머니의 하녀였으며 이미 그와의 사이에서 일곱 자녀 중 2명을 낳은 줄리 벨리와 결혼했다.

1871년 프랑스로 돌아온 피사로는 루브시엔에 있는 그의 집이 약탈당하고 그의 그림들 중 상당수가 파괴되었음을 발견했다. 그는 곧 퐁투아즈에 또다른 집을 구했다(파리에서는 비용이 많이 들었기 때문에 피사로는 동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근교 마을에서 살았음). 그의 주위 환경은 약 30년 동안 그의 미술의 주제가 되었으며, "나에게는 아름다운 장소가 필요하다!"라고 그가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언제나 신중하게 선택되었다. 1872년 폴 세잔이 퐁투아즈에 와서 합류했는데, 이들은 한겨울에도 야외에서 그림을 그렸다(→ 외광회화). 피사로의 그림들은 결코 극적이지 않다. 오히려 1870, 1880년대에 그는 주요한 모티프로서 단지 집과 공장, 나무, 건초더미, 들판, 일하는 농부들, 강의 풍경들을 사용했다. 형태들은 흐릿하지 않고 뚜렷하며 색채는 강렬했다. 1870년대 후반에는 쉼표 모양의 붓놀림을 이용해 반짝이는 섬광을 많이 묘사한 작품 〈과수원의 꽃 피는 과일나무들, 퐁투아즈의 봄 Orchard with Flowering Fruit Trees, Springtime, Pontoise〉(1877)을 제작했다. 여러 인상주의 화가들의 대리인으로 그들의 작품 판매를 대행하고 있던 미술 상인인 폴 뒤랑 뤼엘이 그의 그림들을 팔아주었지만, 피사로는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맏아들인 뤼시앙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이러한 어려움에 대해 쓰고는 했는데, 이 주목할 만한 편지 왕래는 1883년에 시작해 그뒤 20년간 계속되었다.

피사로는 그의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자신의 작품에 불만을 표시한 적이 몇 번 있다. 양식과 기법의 문제에 정신을 빼앗긴 그는 1885년 화가인 폴 시냐크의 소개로 만난 조르주 쇠라의 신인상주의 이론을 열렬하게 받아들였다. 피사로는 작은 색점들을 나란히 병치시켜 꼼꼼하게 그리는 쇠라의 기법을 채택했으며 5년 동안 이 '분할법'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로 말미암아 그의 작품들은 미술 상인들과 수집가들 및 심지어는 그의 오랜 동료 미술가들에게도 인기를 얻지 못했다. 계속되는 가난한 생활에 크게 낙담한 나머지 피사로 부인은 가장 어린 두 자식과 함께 물에 빠져 죽을 생각까지 했다. 마침내 피사로는 그 양식을 포기하고 말았지만, 그 이유는 그가 부딪힌 반대 때문이 아니라 "나의 감각에 충실하게 대상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그토록 찬란하면서도 그토록 제멋대로인 자연의 인상에 충실하기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무렵 그는 예전에 그와 같은 경향으로 활동하다가 새로운 상징주의 운동에 합류한 폴 고갱과도 멀어졌다.

1892년 뒤랑 뤼엘은 피사로의 작품을 회고하는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성공을 거두었는데, 이를 계기로 피사로는 재정적인 안정을 이룰 수는 있었지만, 이무렵 고질적인 눈병에 시달려 야외에서 일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아졌다. 1893, 1897년에 그는 파리에 호텔 방을 잡고 해가 비치거나 비가 내리거나 안개가 낀 이 도시의 거리들을 밤낮으로 그려 24점을 완성했다. 1890년대에 그는 또한 루앙의 강 풍경을 연작으로 그려 마찬가지로 자연의 다양한 효과를 묘사했다. 1900년부터 3년 뒤 그가 죽을 때까지 파리를 중심으로 에라니·디에프·르아브르에서 참신한 시각과 더욱 자유로워진 기법으로 계속 그림을 그렸다. 유화와 구아슈, 템페라, 파스텔화, 심지어는 부채와 자기에도 그린 1, 600점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약 200점의 정교한 판화들과 함께 피사로가 반세기에 걸쳐 남긴 작품들의 뛰어난 가치를 입증하고 있다. 피사로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최한 7번의 전시회에 모두 참가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친절하고 따뜻하고 지혜롭고 남을 잘 격려해주었기 때문에 당시 개성적인 표현의 새로운 방법을 개척하고자 분투하고 있던 젊은 미술가들(모네·르누아르·세잔·고갱) 사이에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피사로는 60대에 이르기까지 계속 재정적인 어려움에 시달렸지만 "성공하리라는 확신 없이는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마지막 순간까지 성공을 확신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새로운 미술에 대한 믿음을 결코 잃지 않았다. Mi. Vishny 글
 
 
 자화상
 
  
자화상
 
 
눈덮인 퐁트와즈 사육장
1879년, 캔버스 유채
시카고 미술관

 피사로는 1879년을 퐁트와즈에서 보냈는데 생활이 몹시 비참했다고 한다. 그러나 퐁트와즈의 평화로운 풍경을 그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나지막한 언덕에는 나무가 무성하고 목초지 가까이엔 농가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이 평화로운 분위기는 이 시기의 피사로의 화풍에 알맞았다. 그는 이러한 자연의 변화 속에서 자신의 그림의 주제를 발견하고 있다.
80년대가 끝날 무렵부터 시작되는 색채분할 시험에서도 볼 수 있듯이 피사로는  결코 이론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피사로가 여기서는 스스로 자연을 가까이 대하고 자연의 여러 변화를 그렸다는 매우 주목할 만한 작업을 했다. 이 작품에서는 화면에 색칠해가는 피사로의 붓의 움직임이 깃털처럼 세밀하고 가볍다. 그리고 베일에 감싸인 듯한 전체의 분위기 속에 방금 내린 듯한 흰 눈의 감촉이 역력히 나타나 있다.
 
 
  빨간 지붕
1877년, 캔버스 유채
파리, 루브르 미술관 

 이 그림은 피사로의 초기 작품으로 널리 알려진 걸작품으로 <사과 꽃 핀 과수원> 과 함께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피사로의 겸손한 마음가짐이 엿보이는 듯한 부드러운 작품으로 형태와 빛깔과 빛의 극적인 대립을 나타내고있다. 뿐만 아니라 모네의 <생 라자르역> 과 같은 빛에의한 새로운 회화의 실험으로 어려운 문제와 씨름하는 야심작이라고는 할 순 없지만 복잡한 제재를 향해 빛을 풍부하게 처리하여 인상파의 가장 연장자다운 숙련미와 소박한 감수성을 보여주고 있다. 따스한 이른 봄의 햇볕을 받아 언덕을 등지고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바르비종파 이래의 풍정을 담고 있는 근경의 축축한 밭과 거기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과수 가지 너머로 흰 벽과 붉은 지붕의 마을 집들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현대적인 감각을 풍긴다. 배후의 언덕은 경사면의 중후한 느낌이 잘 나타나 벽돌색과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은 인상주의의 본질적인 목표 가운데 몇가지를 보여준다. 이 그림은 이중적인 느낌을 전달한다. 그 하나는 마치 그림을 보는 사람이 그 장소로 옮겨진 듯이 정확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된 특정 지역과 자연의 면면에 대한 사실성이다.
다른 하나는 이런 효과를 창출하면서 그 자신 고유의 감동과 서정적인 감정의 고조를
야기하는 색채의 사실성이다. 피사로는 들쑥날쑥하는 화가로 묘사되어 왔으나, 비록 이것이 하나의 관점에서는 단점으로 간주된다고 하더라도 이는 또한 그로 하여금 때로 독자적인 우수성을 부여하는 장점이기도 하였다

인상파 화가 까뮤 피사로는 모네와 교류하였고, 그 후에는 세잔느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이 1877년에 그린 인상파 수법의 가을 풍경은,나무의 잎이 떨어지고, 떨어진 노랗고 빨간 낙엽이 땅을 덮고 있다.구부러진 나무 가지 사이로 작은 촌집의 붉은 지붕이 보인다.
구성은 견고하고 치밀하게 되어 있으면서도,불안정한 빛의 통과는 붓의 빠른 터치로 그려지고 있다.

이 그림에서 마을의 졍경은 단지 풍경화라는 범주에 들게 하는 구실일 뿐이다 . 견고하고 단순한 구성을 위해 마을 풍경 대신 지붕의 붉은 색채가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늦가을에 겨울로 접어드는 계절, 이미 나무들은 잎을 모두 떨구고 완연한 겨울 빛을 띠고 있다. 마을 둔덕과 들판에 군데군데 남아있는 마지막 녹음들, 그리고 깊은 흙빛, 이 풍부한 색조들은 붉은 지붕색과 어우러져 서정적인 분위기를 더한다. 두텁게 발라진 풍부한 색조들이 그림의 단순한 기본 구조를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겨울의 정취를 살려내고 있다.
 
 
카페 오 레
1881년, 캔버스 유채
시카고 미술관 

 인상파 화가들의 기술의 기본은 날렵하고 세밀한 운필에 의한 필촉 분할에 있다. 그것은 피사로의 경우 특히 두드러지는 것처럼 풍경화를 제작해가는 사이에 자연적으로 개발된 것이었다. 이 기법이 지닌 위험성도 이 그림이 그려진 1881년경에는 한 가닥의 빛을 발견함으로써 극복된 듯하다. 형태는 정확하게 묘사되어 있고, 고체를 둘러싼 빛의 효과도 조금도 잃어지지 않고 있다. 화창한 아침햇살을 받으며 앉아있는 소녀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정겹다.
화면 왼편의 바깥 풍경이 약간 평면적으로 느껴져서 필촉 분할 기법의 어려움을 납득하게 해주지만, 창가에 비치는 빛은 이러한 결함을 보충하고도 남을 만큼 너무나 아름답다. 피사로는 인상파 중에서도 가장 부드러운 자세를 취해온 화가이며, 스스로 새로운 과제를 다룬 화가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 보이는 인물화가로서의 전개는 실로 그것을 역력하게 증명해 주고 있다. 화창한 아침 햇빛을 받으며 앉아있는 소녀의  소박한 아름다움이 피사로의 붓을 들게 했을 것이다.
 
 
 파리의 르 아브르 광장
1893년, 캔버스 유채
시카고 미술관 

 피사로는 그의 생애 마지막 10년동안 파리의 호텔 창문으로 본 가두 풍경의 연작을 그렸다. 그의 작품들에서는 그의 그때까지의 활력 중에서도 극히 드물게, 용솟음치는 듯한 자연스러운 활력이 보인다.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전원 생활을 즐겨했던 세잔이나 모네 같은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는 달리 피사로는 만년에 접어들수록  가두 생활 속에서 화제를 찾고 도시 경관에서 영감을 얻었다.
1893년에 제작된 이 작품은 그의 가두 풍경화 중에서는 초기의 것에 속한다. 이 작품을 그린 후의 90년대 중엽에는 루앙으로 옮겨 그곳에서도 가두 풍경을 그렸다. 그리고 1897년에 조직적인 가두 풍경의 연작에 착수했다. 그것은 모네의 <수련> 연작처럼 연작 하나하나가 모여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고 우리들 앞에 인상파 회화의 최후의 꽃을 피웠던 것이다. 피사로의 표현을 빌면 이것은 도시 생활의 도큐멘트이다.
 피사로는 여느 사람들과는 다르게 말년이 되면서 도시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그의 생애 말년 10년동안 파리의 루브르 호텔(지금도 그 호텔내에는 피사로 스위트가 있습니다.)안에서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을 연작으로 그렸는 데, 위의 작품도 그 중 하나입니다. 시카고 미술관에 있는 이 그림을 보아도 피사로는 활기찬 도시 생활에서 활력과 영감을 찾으려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정열은 젊은 누구 못지 않았으니까요. 
 
 
 몽마르뜨 거리 - 밤
1897년, 캔버스 유채
런던, 내쇼날 갤러리 

 피사로의 연작 중 몽마르뜨 거리를 표현한 것이다.
 
 
과수원
1872년
캔버스 유채
 
 
지조르의 교회
1888년
캔버스 유채, 60 x 73cm
 
 
오스니의 밤나무
1873년
캔버스 유채
 
 
포도밭의 여인, 에라니 초원의 봄 볕
1877
캔버스에 유채 45.4x65cm

1884년 퐁투아즈 지역을 떠난 피사로는 그 근방의 에라니 쉬르 엡트에 정착하였다. 그는 그 곳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여생을 보냈다.

피사로는 1885년경부터 쇠라와 시냑을 알게 되면서 작은 색 점을 캔버스에 점을 찍듯 그린 점묘법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팔레트에서 색을 섞는 대신에 캔버스에 순색의 작은 색점들을 캔버스에 바로 바르면, 눈의 망막에서 색의 혼합을 감지하는 것이었다.

이 작품은 신인상주의의 원리를 수용한 이후, 피사로 작품의 변화된 화풍을 보여주고 있다. 피사로는 포도밭의 풀밭과 나뭇잎들에 순색을 그대로 병치시켜 발랐다. 자연스럽고 묵직한 색감으로 서정적인 풍경화를 보여주었던 그의 화풍은 작은 붓터치들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 생동감 있는 화면으로 변화하였다. 1889년 이후 피사로는 다시 예전의 화풍으로 돌아가 1990년부터는 파리나 루앙의 길을 깊은 투시로 묘사한다.
 
 
빨래너는 여인
1887
캔버스에 유채 41x32.5cm 1884년
지조르 근처의 에라니에 정착하면서 피사로의 예술은 체계화되고 보다 단순한 경향으로 흐르게 된다. 바로 그 해에 그는 자신도 참가했던 앙데팡당전에 출품된 쇠라의 <아니에르에서 목욕하는 여자>에 감탄하여, 1886년 마침내 신인상주의로 전향한다.

그는 신인상주의를 인상주의의 연속선상에서, 과학적이고도 합리적인 체계 위에 근거한 것이라 생각한다. 여덟 번째이자 마지막 인상주의자 전시회에서 피사로는 쇠라, 시냑과 나란히 분할묘법의 미학에 따라서 그려진 작품을 전시함으로써, 이 미학을 열렬히 선전하는 예술가로 나타난다. 이후 약 4년간 성실하게 신인상주의를 실행했으나 그의 방법은 쇠라나 시냑의 것에 비하면 유연한 것이었으며, 참신하고 자연스러운 시각을 결코 잃지 않았다.

밀레의 그림을 연상시키는 이 그림은 터치로 볼 때는 쇠라나 모네의 후기 작품을 연상시킨다. 점묘법의 실험이기도 했던 이 작품은 온화한 색조의 조화와 밝은 햇살의 표현 등을 통해, 일상의 한 장면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풀밭 위에 앉아 있는 왼쪽의 어린아이의 머리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고, 완만한 대각선으로 화면을 가로지르는 길은 깨끗하게 빨아 널은 침대보처럼 포근함을 준다. 모든 날카로운 선이 제거된 동글동글한 오브제들은 화가의 삶에 대한 애정과 어린 시절의 향수를 일러주고 있다.
 
 
빨래하는여인
 
 
나뭇가지를 든 소녀 (1881)  - 양치기 소녀

시골의 노동 습관을 찬미하던 피사로는 농촌의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종종 그렸다. 주로 풍경화의 한 부분을 이루는 것처럼 그렸지만 특별히 이 작품에선 한가롭고 평화로운 소녀를 캔버스 한복판에 두었다. 다른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한 여가풍조를 피사로는 좀더 소박한 시골풍으로 바꾸었다. 이 소박한 시골풍은 그를 표현하는 대표적 특징 중 하나로 볼 수 있음.
 
 
  에르미타주의 코트 데 뵈프 (1877)

피사로가 가장 아껴서 오랫동안 소장하고 있던 그림이라고 합니다. 모네나 르느와르에 비하여 색감이 떨어지는 듯 하지만 그가 전달하고자 하는 감정은 어느 그림보다 풍부합니다. 왼쪽 아래 서있는 모녀와 빨간 지붕의 집 (그의 작품에는 유난히 빨간 지붕이 많죠.) 이 병풍처럼 서있는 나무들과 결합하여 평면적인 구도에 신선한 긴장감을 주고 있습니다.
 
 
루브시엔느의 길
1872
캔버스에 유채 60x73.5cm

 "내 생애는 바로 인상주의의 역사와 뒤얽힌 것이었다" 라고 말한 카미유 피사로는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화가이다. 그는 1870년대 내내 프랑스 인상주의 운동의 중심 인물로서, 완고하고 때로는 따분하며 심지어 권태로울 정도로 자연 관찰에 주력하였다. 1878년에 한 비평가는 그를 "그들 모두 중 최고의 자연주의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인상파 중에 최고의 자연주의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피사로는 특히 눈 풍경을 좋아했다. 따뜻한 햇볕으로 인해 길가의 눈들이 많이 녹아 있는 오후의 한적한 길가로서, 파리 서쪽에 있는 작은 마을 루브시엔느의 길을 그린 이 그림에서도 잔설이 남아 있는 길에 오후의 짧은 햇빛이 드는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길 오른쪽의 양지와 왼쪽의 음지는 전통적인 원근법 구도 속에서 완벽한 대칭을 이루며, 한적한 시골길의 안정감과 고요함을 적절히 표현하고 있다.

1870년 독일군이 침공하자 피사로는 프랑스를 떠나 런던으로 왔고, 클로드 모네를 만난다. 거기서 그들은 콘스터블의 예술에 매혹되었고, 특히 그들 자신의 회화적 탐구와 아주 유사한 터너의 "눈과 얼음의 효과"에 사로잡힌다. 그들은 이 놀라운 효과가 흰색에 의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보면 원하는 결과를 생겨나게 하는 수많은 서로 포개어진 다양한 터치들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루브시엔느의 밤나무
1871-72
캔버스에 유채41x54cm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이 그림은 크고 두꺼운 화폭 위에 그려져 한번도 캔버스 틀이 보강되지 않은 상태에서 원래의 약식 테두리 틀에 끼워져 있었다. 미술관에 소장되기 전 전혀 복제되거나 전시된 바가 없다. 그러나 반 고흐가 오베르의 가셰 박사 집 첫 방문 때 "가셰 박사는 겨울눈 속의 붉은 집을 그린 아주 아름다운 피사로 그림 한 점을 가지고 있다"며 경탄했다는 사실로 이미 유명해졌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루브시엔느에서 살고 있을 때 피사로의 집 근처의 한 붉은 집을 그린 것입니다. 당시 이 집에는 은퇴한 한 노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인은 이웃들과 왕래하는 법 없이 은둔생활을 했다고 피사로가 소개한 바 있습니다.
피사로의 아들, 루시앙 피사로는 "붉은 집은 피사로 가족이 살았던 곳, 루브시엔느 근방에 있었는데, 은퇴하여 혼자 외로이 은둔해 살았던 수수께끼 같은 한 노인의 소유였다"고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확인시켜주었다. 이렇게 소재가 루브시엔느에서 취해졌을 것이라는 사실이 유력한 것으로 보아, 날짜는 적혀있지 않지만 이 작품이 1869년이나 1870년이나 1871-1872년 겨울, 피사로 가족이 오베르에 머물고 있던 시기에 그려졌을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하얀 서리
1873
캔버스에 유채 65x93cm

 이 작품은 1874년 제1회 인상주의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바르비종파와 밀레의 진정한 후계자인 피사로는 시골 생활에 깊게 매료되었다.
화면 위로 점차 상승하는 원근법을 씀으로써 화면에 하늘을 작게 담아 상대적으로 서리가 내린 겨울 들판이 전경에 가득 차도록 하였다. 수평선이 가로지르는 간결한 구성은 이 시골 풍경에 없어서는 안 될 견고함을 부여한다. 나무들의 비스듬한 그림자가 서리가 덮인 밭고랑을 가로지르고 있다. 거칠고 마른 붓질이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잘 살려내고 있다.

함께 작업하며 인상주의적 시각과 기법을 가르쳐준 바 있는 세잔느의 영향으로 피사로는 다른 인상주의자들과 달리 대지와 전원을 소재로 하면서도 단단하고 잘 짜여진 형태와 구조를 드러내는 작업을 할수 있었다.
1885년에서 1890년까지, 호기심이 많은 성격 덕분에 늘 새로운 기법을 탐구하던 피사로는 쇠라와 시냑의 점묘법, 즉 색깔을 아주 잔 터치로 점을 찍듯이 칠해 섞여 보이게 하는 색채의 분할 기법을 도입한다. "내 생애는 바로 인상주의의 역사와 뒤얽힌 것이었다."고 말한 그는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고집센 작가였다.
 
 
퐁투아즈의 봄
1877
캔버스에 유채 65.6x81cm

 1871년 6월 피사로는 런던에서 프랑스로 돌아와 루브시엔느를 다시 찾는다. 그리고 1872년 퐁트와즈에 정착해서 1884년까지 그 곳에 거주했다. 이 무렵 피사로는 시골의 자연과 농촌생활을 그리는 화가로서 확고하게 자리잡는다. 이 점에 있어서 그는 밀레의 전통을 따르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세계는 밀레의 낭만주의적 감상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피사로는 물이나 물위에서 반사하는 빛보다는 땅이나 경작지, 들과 언덕, 마을과 과수원, 집과 나무들에 관심을 갖는다. 그의 작품에서 자연은 인간과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고 있다. 그는 성실하고도 사실적으로, 매일매일 일하고 있는 농부들과 시골 시장들을 묘사한다.

거목을 화면 한가운데 배치한 대담한 구성을 보이는 이 작품은 정확한 삼각형의 나무 형태로 짜여져 있다. 나무 뒤로는 하늘색의 파란 지붕의 건물이 있고, 화면 아래 수평으로 깔린 초록색의 채마밭은 묵직한 색감으로 그림에 안정감을 부여한다. 봄의 분위기는 흰색의 작은 꽃봉오리들로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에밀 졸라가 말했듯이 그의 그림 속에서 "우리는 대지의 심원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바렌느 생 틸레르의 나룻배
1864
캔버스에 유채 27x41cm

 구체적인 장소가 명시되어 있고 정확한 제작 날짜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 작은 그림은 1860년대 피사로가 살롱에 출품하였던 야심작들의 전주곡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본래 가셰박사가 소장하고 있던 작품으로, 1951년 오르세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다소 어둡지만 힘있는 터치로 가득찬 이 작품은 이후 피사로에 대한 연구에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오르세 미술관의 주요 컬렉션 중의 한 점이 되었다.
 
 
 쉬고있는 건초만드는 사람들

피사로의 그림은 질박하고 투박한 전원풍경을 소재로 하고 있다그리고 피사로의 그림들은 따뜻하다.
작품 속의 피사체들은 하나같이 평범한 일상에 불과하나 힘들고 생활고에 찌든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돼지도살업자
 
 
 런던 하이드파크
 
 
 루브시엔느행 합승마차
 
 
샤뽕발 풍경
 
 
앉아있는 농부
 
 
에레니농가에서 대화하는 여인
 
 
화가의 정원
 
 
1897
캔버스에 유채

1897년의 겨울과 봄, 피사로는 "파리의 거리들"이라는 제목으로 일련의 거리 풍경을 그려낸다.
이 연작은 그의 이름을 점묘주의와 연관짓던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게 된다.
피사로는 그가 러시아 호텔의 객실을 빌려서 창밖의 풍경을 스케치한 후,
에라니에 있는 화실에서 그림을 완성하였다.
피사로는 동일한 풍경을 하루 중 다른 시간, 다른 날씨에서 각각 묘사하여
같은 관점에서 13개의 서로 다른 그림을 그려냈다. 이 작품에서 화가는
우울한 날의 몽환적 분위기, 복합적인 색채와 다양한 색조를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화가는 빠른 붓놀림에 의하여 숨가쁘고 역동적인 도시의 삶을
설득력있게 포착하고 있으며, 근대 도시의 이미지를 잘 드러낸다.
이러한 도시적 풍경은 피사로 작품의 중요한 모티브를 형성한다.
참고로, 연작 중 다른 작품들을 보자.
 
 
밤의 몽마르뜨 거리
 
 
겨울 아침의 몽마르뜨 거리
 
 
흐린 오전의 몽마르뜨 거리
 
 
성 찰스 거리
 
 
 퐁투와즈 숲에서의 휴식
1878
캔버스에 유채
 
 
그릇닦는 여인
 
 
눈위의 아침햇살
 
 
교회와 농장이 있는 풍경
 1895,  Musée d'Orsay, Paris
 
 
사과줍는 여인들
 
 
메이엔느의 호수
 
 
루앙의 오래된 시장
 
 
루앙항구의 성당
 
 
마을오솔길
 
 
사과꽃, 에르니
 
 
양털을 손질하는 농부
 
 
에레니의 아침에 꽃이핀 배나무
 
 
에레니의 해질녘 초원의 두여인
 
 
퐁트와즈의 정원
 
 
사과줍기
 
 
에르니 빨래하는 여인들
 
 
still life-둥근바구니안의사과와 배
 
 
꽃다발
 
 
베르 호텔의 정원
 
 
오베르의 농장
 
 
콩수확
 
창가에서 바느질하는 피사로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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