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도깨비 는 도깨비 나라의 왕이 될지도 모른다는 점괘 때문에 도깨비 대왕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난다.다른 도깨비들과는 달리 얼굴이 하얀빛을 띤데다가 다른 도깨비들과는 다른 식성을
지녔다는 것도 미움을 받는 이유이다.
열 살의 여자아이 은희는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는 아버지가 언청이인데다가 말도 하지 않는
은희로 인해 행여 표를 잃게 될까 봐 운주사에 맡긴다
삼정은 운주사에 사는 동자승. 부모에게 버려져 아기 때부터 운주사에서 살아왔다.
이 셋 모두 버림받은 존재라는 아픔을 안고 있다. 각자의 세계에서 미움받는 존재이지만 서로 맑은 마음에 이끌리는데 어느 날 밤, 누워있는 두 부처님 상 앞에서 만난 이들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된다.
이들이 운주사의 와불을 몰래 도굴하여 팔려는 도둑을 잡게 되면서 숨어 지내던 은희는 절을
떠난다. 상처투성이 은희의 아픔을 덜어주고 싶은 하얀 도깨비는 어머니가 목숨을 걸고 구해온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러 자신의 목숨과 은희의 행복을 바꾸려 한다.
각자가 속한 세계에서 상처받은 영혼들이 마음으로 사랑하며, 서로 상처를 치유해가는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
창작 전래동화 <운주사의 하얀 도깨비>는 천불천탑 신화와 쌍와불로 유명한 전라남도 운주사를
배경으로 언청이 소녀와 하얀도깨비의 우정을 그리고 있다.
'운주사의 쌍와불이 일어나는 날, 참 세상이 열린다'는 전설을 모티브로 한 동화이다.
이 책을 읽게 되면서 10년도 훨씬 넘는 오래전에 `돌부처가 누워 있는 이유를 아십니까?`라던가?
그 비슷한 카피와 함께 누워 있는 돌부처 사이에 김지하 시인이 앉아있는 책 광고가 생각나고
기억 속에 한동안 의문부호였던, 그러다가 이내 잊고 지냈던 운주사!
함께 가자는 본효님의 권유도 있었지만 이번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나 운주사를 찾게 될 것인가 싶어
연말연시에 해야 할 현실적인 급한 일들을 대충 처리하고 운주사로 향한다.
운주사 일주문
천불산 기슭에 위치한 운주사는 대한 불교 조계종의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로서 나지막한
산 속에 들어 앉아있다. 이 절 이름을 배(舟) 자로 삼은 것은 중생은 물이요, 세계는 배라는 뜻이다.
물방울 같은 중생이 모여 바다를 만들고 세계라는 배가 그 중생의 바다 위에 비로소 뜨는 것이며
역사는 중생의 바다에 의해 떠밀려 가는 것이라는 깊은 뜻이 운주사의 배(舟) 자에는 숨겨져 있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창건 당시 운주사의 명칭이 운주사(雲住寺)로 기록되어 있지만, 그 후 중생과
배의 관계를 의미하는 운주사(澐舟寺)로 바뀌었다가 다시 훗날에 그 두 가지를 섞어서 운주사(雲舟寺)
로 전해왔다. 그리고 거의 똑같은 솜씨로 만든 돌부처들의 모습을 보아 한 사람이 평생을 바쳐 만들었
을 것이라는 이야기와 이웃 영암 출신 도선국사와 관련된 풍수비보설과 미륵신앙 등이 있다.
풍수지리에 근거해 우리 국토의 지형을 배로 파악한 신라 말의 도선국사(道詵國師)가 배의 중간 허리
에 해당하는 호남이 영남보다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염려하고 이곳에 천불천탑을 조성하였다는
설이 있다. ‘구름이 머물다 간다’는 雲住寺가 아닌, ‘배가 나아간다’는 運舟寺라는 다른 이름도 그런 까
닭에 생긴 듯하다.
운주사의 미스터리에 또 하나의 색다른 가설이 제기됐다. 해상왕 장보고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도선 국사가 설계하고 그를 추종했던 재당(在唐) 신라인들이 축조했다는 추론이다. 소설가 최 홍 씨는 최근 발간된 ‘한국의 불가사의-천년의 비밀 운주
사’(바보새 펴냄)라는 책을 통해 ‘미륵신앙 기원설’, ‘몽골군 축조설’ ‘호족세력 건립설’ 등을 반박하며
이같이 주장한다.
운주사 9층석탑
산모퉁이를 돌아 닿은 긴 골짜기와 줄을 선 석탑들의 전경은 시원스럽고 엄숙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보아 온 일주문-천왕문-해탈문과 1탑 1금당의 정형화된 배치가 아니고 어느 절에서
도 볼 수 없었던 못생기고 찌그러진 불상과, 마름모꼴이나 X V 등 기하학적 무늬를 새긴 탑들이 곳곳
에 여러 형태로 서 있다.
소설<장길산>을 읽으면서 상상했던 폐허같은 절터가 아니었고 석탑들도 논밭 위에 서 있지 않았다
천불천탑이라고는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거의 다 소실되고 지금은 90기의 불상과 열 개 남짓한 탑만
남아있을 뿐다. 그것마저도 머리만 남거나 아예 없는 불상들이 많았다
먼저 눈에 띄는 탑이 운주사 9층석탑이다.
보물 796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높이가 10.7미터이며 거대한 암반 위에 별도의 지대석이 없이 암반
자체에다 3∼4단의 굄대 위에 면석을 올렸다. 옥개석마다 ‘∨’자를 3개 겹쳐놓은 듯한 이상한 형태로
조각되어 있는데 이러한 기법은 운주사 석탑에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형상으로 조선 후기의 작품
으로 추정된다고.
운주사 칠층석탑 운주사 쌍교차문 칠층석탑
광배석불좌상(왼쪽) 석조불감
운주사 운형다층석탑
9층 석탑 우측 산아래 자락에 예닐곱개의 석불들이 있고
7층과 5층, 원형 탑들이 마치 기러기 떼처럼 솟아있고 좌우측의 산에도 여러 탑들이 우뚝우뚝 서있다.
운주사 골짜기는 자갈과 돌들이 층층이 퇴적되어 켜켜이 커칠게 일어나는 암벽으로 돌러싸여 있다
그 암벽을 떼어내 만든 평평한 돌에 새겨진 크고 작은 부처의 형상들이 암벽아래 힘없이 무심한 표
정으로 돌벽에 기대어 서있다.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돌들이 천년 비바람을 어찌 견디어 왔을까?
조잡하고 투박하고 거칠고 못생기고…., 하나같이 입이 없거나 코가 뭉개졌거나 눈이 파인 볼품없는
얼굴의 돌부처들, 그런 불상들이기에 이를 보면서 세상사에 지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위안을
받나 보다.
그 표정들은 바라보고 얼굴들을 손으로 만지면 친근감이 느껴진다.
부처를 기다리는 마음, 부처가 되고자 했던 소박한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이 손끝으로 전해지는 듯하다.
대웅전에서 ‘와불님 뵈러 가는 길’ 팻말 밑으로 탑이 솟아 있고, 길은 반질반질하게 나있다. 산길을
조금 오르자 큰바위가 나타나고, 그 바위를 기단 삼아 탑이 솟아있고, 그 아래에 부처들이 서있다.
다시 길을 오르자 일명 머슴부처가 길을 막고, 그 곳에서 몇걸음 올라가자 운주사의 미륵이 누워있다
와불
야트막한 이 산 꼭대기에 있는 한 쌍의 부부 미륵은 머리를 낮은 곳으로 두고 다리를 산 위쪽으로 둔 채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처럼 누워 있다. 이 미륵은 세상이 바르지 못해 누워 있는데, 이 와불이 일어나면
세상이 바로 설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세상은 시끄럽고 온통 뒤죽박죽인데, 저 미륵불이 일어서는 그날은 과연 존재할까?
공사바위(工程崖)
위에 오르면 운주사 탑과 불상들 그리고 먼 산들이 한눈에 발아래 굽어 보인다.
바위 이곳저곳을 움푹 파 인공으로 조성한 자리가 여럿 보인다.
그중 가장 아래 큰 자리가 도선국사가 앉아서 운주사 천불 천 탑의 대공사를 관리감독했다 하여
공사바위라 부른다. 작은 자리들은 직급에 따라 제자들이 앉았던 자리라 한다.
이 공사바위에서는 일출과 일몰을 모두 볼 수 있으며 비가 오면 바위 아래 움푹 패인 의지처가 있어
그곳에 들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다. 수행스님이나 도인들이 그 자리에 앉아 수행한다
공사바위 옆에서 바라본 운주사 전경
공사바위까지 올라갔다 내려오면 일행들과 만나기로 한 시간에 늦을까 봐 공사바위에는 오르지
못하고 바위 옆에서 바라본 운주사 전경
요사채 장독대와 매주
요런 건 그냥 지나칠 수 없지!
얼마 만에 보는 메주와 장독대인가?
겨울이면 장독에서 홍시 꺼내주시던 외할머니 생각난다.
운주사 대웅전
운주사 풍경
추녀 끝에 걸어놓은 풍경 음 바람이 불지 않으면 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람이 불어야만 비로소 그윽한 소리를 낸다
인생도 무사 평온하다면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힘든 일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즐거움도 알게 된다.
-채근담-
살면서 바람 잘 날 있던가? 실바람 산들바람 소슬바람…. 때론 순풍이 불다가 역풍에 습격당하기도 한다. 태풍에 모든 것을 날리고 망연자실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람 불지 않으면 세상살이가 아니지. 산다는 것은 바람이 잠자기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바람이 약해지는 것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그 바람 속을 헤쳐나가는 것이 아닐는지...
운주사 약수
삶이 힘겨운 그대, 그 괴로운 표정 풀지 말고 운주사로 가보십시오. 살을 애는 서슬 퍼런 북풍한설마저도 순하게 풀어지며 따사로운 훈기를 내 품어내는 운주사 골짜기 거기에 있는 것들은 모두 순하고 바보스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눈물이나 설움일랑 거두고 코끝에 감도는 풀내음 맡으며 물소리 새소리에 장단 맞추며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일도 세상에 냉대받은 서러운 마음도 거기에 풀어놓고 쉬었다 가십시오. 돌탑을 쌓으며 가슴 속에 작은 소망하나, 그리고 부처의 표정을 담아가십시오.
비록 누군가 이미 다녀간 엿보아버린 낙원이었을지라도 그리하여 그날의 시체처럼 딱딱하고 앙상한 흰 뼈들만 목 잘린 석불처럼 나뒹굴고 있었을지라도 우린 잠시나마 그 숲에서 행복했었다
(`기억만으로 행복한 -운주사 가는 길5’/임동확)
운주사에 다녀온지 며칠이 지났고 일상에 매몰되어 지내면서도
가끔 그곳을 떠올리면 그립고 아쉽고 짠하다. 못생기고, 상처가 많아 볼품없고 누워 있거나 힘없이 돌벽에 기대어 있는 돌부처들을 떠올리면
왜 이리 짠해 지는 걸까?
"새처럼 바람처럼/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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