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歷史. 文化參考

조선의 왕릉-후릉(조선 2대 임금 정종대왕과 정안왕후의 능)

鶴山 徐 仁 2007. 2. 15. 09:28
[후릉가는길...]

조선 제2대 정종 방과와 왕비 정안왕후 김씨의 능이다. 해방 전 주소는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이나 지금은 북한의 행정구역내에 있어 경기도 판문군 령정리이다. 직접 가보지 못하고 평양에서 발간된 조선유적도감에 실린 사진을 보아야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정종대왕께서는...]

정종은 1399년에 즉위하여 1400년 11월 11일에 동생 방원에게 왕위를 넘기고 물러나 상왕으로 태종의 우애를 받으며 개성 백룡산 기슭의 인덕궁에서 거주하면서 격구 사냥 온천 연회등으로 유유자적한 생활을 즐기다 1419년 9월 26일 천명을 다했다.

왕위에 있은지 2년이었고 상왕의 자리에는 20년간 있었으며, 보령 63세였다. 1257년 7월 1일 함흥의 귀주동에서 태조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경 초명은 방과 자는 광원으로 일찍이 고려의관계로 나아갔다.

1377년 5월 스무살 청년 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도 와 지리산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1390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로로 밀직부사에 올랐다. 양광도에 침입한 왜적을 영주 도고산 아래서 격파했고 판밀직사사 삼사우사등을 역임했다.정종은 성품이 순진근실라고 지행이 단엄,방정했다.

정안왕후김씨와의 사이에서는 후사가 없으나 숙의 기씨 윤씨 지씨 이씨 문씨 사이에서 15명의 군과 8명의 옹주를 낳았다. 조선이 건국하자 정종은 영안군에 봉해지고 이듬해의 "흥삼군부중군절제"사로서 병권에 관여했다.

1398년 8월 동생인 정안군 방원이 일으킨 제1차 왕자의난이 성공을 거두자 세자책봉 문제가 제기되었다.정종은 당초부터 대의를 주장하고 개국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업적은 모두 정안군의 공로인데 내가 어찌 세자가 될 수 있느냐? 며 완강하게 거절했으나 정안군의 양보로 결국은 세자가 되고 9월 5일 왕위에 올랐다.

오늘날에 와서 태조의 양위는 자발적이라기 보다는 타의에 의한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정종 역시 자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동생 방원의 양보로 즉위하여 실권도 그가 쥐고 있는 까닭에 정조의 정치는 거의 방원의 뜻에 따라 전개되었다. 1399년 개경으로 천도 드해 8월 분경금지법(분경이란 벼슬을 얻기위해 권력자를 분주히 찾아다니는 것으로 이를 금지하여 권력을 쥔 귀족의 힘을 약화시킴)을제정하고 1400년 2월 4일 2ㅔ 2차 왕자의난을 계기로 동생방원을 세제로 책봉하며 4월 사병혁파를 통한 병권 집중 삼군부와 의정부의 분리를 통한 군정분리체제 현성등을 통해 왕권의 강화를 위한 개혁을 방원의 영향력하에서 이루어졌다.

그위에도 (향약제생집성방)을 편찬하고 (조례상정도감)과 (노비변정도감)을 설치했으나, 재위시 정무보다는 격구 등의오락에 탐닉하면서 보신했다고 한다. 태종로 즉위한 방원이 정종을 상왕으로 삼고 1400년 12월 상왕전에 나아가 존호를 인문공예상왕이라 올렸는데 그 책문은 다음과 같았다.

"덕은 친애를 돈독하게 하여 능히 사양하는 빛을 나타내셨으니 예를 마땅히 존승하여 더욱 도를 경건히 해야 하겠습니다...생략...태조를 이어 정사에 나아가 모유를 편안케 하셨고 소자를 보건케 하셨으며 인애를 다하여즉위토록 명하였습니다....생략...삼가 인문공예상왕이라는 존호를 올립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즐기시고 한가로이 지내시면서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옵소서! 충심에서 우러나온 소원이오니 굽어 살피시고 길이 다복한 상서를 받으소서."

[후릉 보기]

후릉은 계좌정향(북북동에서 남남서 방향)의좌향으로 백룡산을 뒤고 하고 탁트인 평지를 건너 멀리 안산이 바라보이는 배산임수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는 후릉은 아마도 1407년에 제릉의규모를 확장하고 1408년에는 건워릉 축조에서 국장도감판사 겸 조묘도감판사로서 실무를 전담하여 일한 적이 있는 박자청의솜씨가 아닌가 한다.고려 공민왕릉제를 충실히 따라 12면의 병풍석을 봉분에 두르고 있으며 7년 후 정종이 승하하자 난간석으로 두봉분을 연결하여 왕과 왕비가 승하한 뒤에도 함께 사는 쌍릉의형태를 이루고 있다.

봉분 앞 조우에 서있는 문무인석은 표정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풍화가 심하다. 분분을 두른 병풍석도 칩식으로 인해 새겨진 조각을 식별하기가 곤란하고 난간석 주두는 건원릉에서의 꽃봉오리 모양의 원수가 아니라 고려 공민왕릉의 경우처럼 사각의 기둥이다.

죽석 일부와 동자석주 일부가 없고 도굴범의 소행인지 아닌지 봉분을 에워싼 병풍석 중 먄위에서 봉토를 받쳐주는 만석의 사이가 벌어져 있는 등 능을 만들고 지킨 사람들이 보면 세월의 무상함과 후세인에 대한 야속함에 처연히 눈물 흘릴 것만 같다.

역사는 흐르고 흘러 한 민족이 둘로 나뉜 현재 정자각은 없어져 터만 황량하게 남고 곡장도 없이 산허리에 외로이 있는 후릉은 자기도 분단의고통을 지고가고 있음을 큰소리로 허공에 외치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