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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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주현미

鶴山 徐 仁 2006. 1. 30. 13:45
“‘관광버스용’ 아닌 ‘인생의 노래’ 하고 싶었다”
80년대 말 트로트 전성기의 주역 주현미
시작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그 폭발력은 엄청났다. 1984년 거리의 음반가게와 노점상에 배포된 메들리 테이프 ‘쌍쌍파티’. 이 급조된 테이프 하나로 주현미는 혜성처럼 가요판에 뛰어들어 ‘비 내리는 영동교’ ‘울면서 후회하네’ ‘신사동 그 사람’을 연이어 히트시키며 여왕이 되었다. 한참 활약하던 1980년대 말 그가 무대에 서면 “누나!” “언니!”라는 10대 팬들의 함성이 터져나와 방송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지금은 세력이 미미해졌지만 그래도 한국가요 역사에서 주류장르를 꼽자면 단연 트로트 음악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기는 쉽지 않다. 때로는 ‘뽕짝’과 ‘왜색가요’라는 경시와 홀대를 받기도 했지만 트로트는 서민대중의 한과 설움의 정서를 담아내면서 면면히 한국음악의 중심 위치를 지켜왔다. 이난영, 남인수, 현인, 이미자, 남진, 나훈아, 하춘화, 심수봉 등 우리 가요사의 기라성 같은 슈퍼스타 가운데 아마도 절반은 트로트 가수일 것이다.

주현미는 트로트가 그나마 위력을 발한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까지 그 마지막 전성기를 밝힌 별이었다. 그는 1980년대에 트로트 가수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방송사의 가수왕상을 수상했고, 드물게도 요즘 댄스와 발라드 가수처럼 무대에서 젊은이들로부터 갈채와 환호를 받았던 인물이다.

하춘화 이후 빅 스타 부재에 허덕이던 트로트 음악계에 그의 출현은 가뭄을 해소하는 시원한 빗줄기였다. 그의 활약에 탄력을 받아 현철, 설운도, 김지애, 문희옥 등 트로트 가수들이 동시다발로 공중파 방송을 점령했으며, 1970년대에 활약하다가 외국으로 갔던 태진아와 송대관이 고국에 돌아와 재기하는 발판을 마련하기도 했다.

대중음악 관계자들은 당시 주현미의 성공을 트로트 스타가 되는 데 필요한 여러 조건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결과로 풀이한다. 화교라는 사실, 거기에 중앙대 약대를 졸업한 약사 출신이라는 배경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혜(?)였으며 외모 또한 수수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필수조건인 노래솜씨말고도 이러한 갖가지 ‘충분조건’을 갖추었기에 슈퍼스타에 등극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무렵 트로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외모에는 민감한 젊은 남자들의 입에 ‘주현미’라는 이름이 오르내렸고, 당대 최고였던 조용필이 부럽지 않을 만큼 연예주간지와 신문 문화면에 단골로 얼굴을 내밀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1988년에 동료가수 임동신씨와 결혼한 것이 그토록 화제를 뿌렸던 것도 그가 가진 ‘음악 외적 화제성’ 때문이었다.

“대세는 대세, 빛이 안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 음색은 발군이었다. ‘쌍쌍파티’를 통해 선보인 음색은 팬들의 귀를 데뷔 당시 메들리 테이프 시장의 여왕이었던 김연자로부터 단숨에 주현미로 이동시켰을 만큼 강하고 짜릿했으며 섹시했다. 특히 트로트의 가장 강력한 후원(?)세력인 택시기사들은 너도나도 주현미의 독특한 음색에 빨려들었다. 일단 목소리에 홀린 그들은 나중 잡지사진과 TV에서 주현미의 ‘예상 밖으로 매력적인’ 얼굴을 보고 다시 한번 넋을 잃었다.

그 후 어느덧 2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아직 구체화되지는 않았지만 주현미는 내년 ‘데뷔 20년 기념 이벤트’를 가져 그간의 음악활동을 결산할 예정이다. 트로트 프로그램 ‘가요무대’와 ‘가요콘서트’ 녹화를 위해 KBS와 MBC 두 방송사를 오가는 와중에 어렵사리 만난 주현미는 막상 자리에 앉자 오랜 활동에서 얻은 차분함과 관록의 여유를 보였다. “평소에는 한가한데 하필 오늘만 바쁘다”는 첫마디부터 겸손했고, 주위에 알아보는 일반인들이 많아 다소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묻는 질문에 성의를 다해 답했다. 입가에 보조개를 만들어내는 특유의 은근한 미소도 내내 잃지 않았다.

-요즘 매체에서 자주 볼 수 없어서 바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상당히 분주해 보이네요. 조금 전 음반관계자와 사진을 두고 상의하는 것 같던데 뭔가요?

“곧 발매할 새 앨범의 재킷 사진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러브레터’를 2000년에 발표했으니까 3년 만의 신보네요. 음반작업 마무리도 그렇고 곧 있을 한인100주년 기념행사차 미국에도 가야하고, 5월에는 어버이날 디너쇼가 있어서 정신이 없습니다. 갑자기 일이 몰렸을 뿐이에요. (웃으며) 실제로 그렇게 바쁘지는 않지만 스케줄은 1990년대 초반 못지않아요. 지방행사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지방자치제 영향인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서울에서만 바빴지 지방 스케줄은 그다지 많지 않았거든요.” 

 

-처음부터 우울한 질문을 해서 미안합니다만 최근 트로트 상황이 아주 열악합니다. 가요시장 전체가 불황인데 그 중 오래 전에 기가 꺾인 트로트는 더 말할 게 없지요. 일각에서는 트로트의 고사(枯死) 위기를 공언하고 있고, 뚜렷한 처방마저 없어서 더 무기력해 보입니다. 트로트 스타로서 현재의 상황을 어떻게 보십니까?

“그건 대세이자 흐름이에요. 대중의 기호가 누구 한 사람에 의해 일순간에 바뀔 수 있는 건 아니니까요. 지금 대중들이 예전만큼 트로트를 듣지 않는다는 것은 분명하죠. 근래 트로트가 돌아가는 현실을 감안하면 앞으로도 음악계의 주(主)가 되기는 힘들다고 봅니다. 뭔가 새로운 돌파구가 있어야겠지만 빛이 보이질 않아요. 저를 포함해서 대체로 변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 같지도 않고….”

-트로트의 부진은 전체적 흐름이나 불황 같은 외적인 문제도 있지만 내적인 문제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대중을 사로잡을 만한 좋은 곡을 트로트 음악계에서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거지요. 최근 트로트 음악을 어떻게 보십니까?

“예나 지금이나 트로트의 위치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전 트로트 가수가 아니겠지요. 트로트는 엄연한 대중음악이고, 국민정서가 가장 서민적으로 깔린 민요 다음의 장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트로트는 본래 적잖은 약점을 지니고 있어요. 구성도 보수적이고 멜로디가 다양하지 않은 데다 가사 내용도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만들기도 부르기도 어렵지요. 4분의 4박자 리듬에 맞춰 단순하면서도 ‘맛있게’ 노래를 만들고 부르기란 쉽지 않습니다. ‘정통파 트로트’라고 불릴 수 있는 음악은 더 어렵고요.

원래 한정되어 있는 데다 요즘에는 음악계의 덩치 자체가 작아졌으니 그 약점이 더 불거져 보일 수밖에요. 대중의 사랑을 받고 활기를 띠어야 사람이 모이고 자본이 모일 텐데 그렇지 못한 거죠.”

‘신사동 그 사람’에 숨은 고민

-트로트 음악은 전통적으로 서민의 한과 애환을 담아낸 느린 멜로디 형태였는데 언젠가부터 리듬 중심의 다소 빠른 템포로 변했습니다. 그래서 전에 비해 신나긴 하지만 품격을 잃고 가벼워졌다는 느낌이 듭니다. 아예 트로트를 ‘관광버스용’ 음악으로 비하하기도 하니까요. 그러한 ‘경량화(輕量化)’가 초래된 데에 주현미씨의 히트작인 ‘신사동 그 사람’이 은연중에 한몫한 건 아닐까요?

“인정합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트로트가 과거의 정통 스타일에서 벗어나 리듬 중심의 빠른 패턴으로 바뀌었으니까요. 하지만 그것도 흐름이었어요. 그 무렵부터 방송도 ‘느린 노래’를 싫어하고 그저 신나는 노래를 원했으니까요.

‘신사동 그 사람’이 나올 때도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에요. 같은 앨범에 정통 스타일의 애절한 곡 ‘비에 젖은 터미널’이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끼워 넣은 ‘신사동 그 사람’이 최종적으로 선택됐습니다. 당시 한참 뜨고 있던 ‘영동 붐’을 반영한 데다 폴카 리듬의 신(新) 트로트라서 중심 곡으로 채택된 거죠. 그러나 당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신사동 그 사람’은 가장 대중적으로 잘 만들어진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로트가 살려면 수요층 저변이 확대돼야 한다고 봅니다. 트로트를 좋아했던 사람들이 계속 줄어드는 현실에서 세를 유지하려면 새로운 수요층을 창출해야 하는데 신세대 음악 팬들에게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는 오래갈 수 없다고 보는데요.

“맞아요. 사실 ‘신사동 그 사람’도 그런 고민 속에서 나온 곡입니다. 분명한 것은 트로트가 옛날로 돌아가서 국악처럼 고전(古典)성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젊은 음악과 결합해서 개량화 쪽으로 가느냐의 갈림길에 처해 있다는 거죠. 하지만 어느 쪽도 정답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초점은 대중의 기호에 달려 있는데, 다만 트로트를 어린 세대에 맞출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트로트라는 게 본래 삶의 쓴맛 단맛을 좀 아는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장르 아니겠어요? 중장년층의 장르라는 말이지요. 일단 그 연령층은 새로운 유행에 동요되지 않고 복고적인 양상을 보이잖아요. 잘 만들기만 하면 지금 트로트를 외면하는 신세대도 나이가 들어 트로트에 호감을 보일 수 있겠지요.”

인터뷰를 너무 딱딱한 얘기로 시작한 것 같아 주현미가 한창 날리던 시절로 화제를 돌렸다. 주현미에게 스타덤을 안겨준 ‘쌍쌍파티’가 나온 1984년 가을은 아직 ‘트로트의 판’이 아니었다. 트로트 물결을 일으키는 또 하나의 계기인 조용필의 ‘허공’은 아직 세상에 나오기 전이었다.

하지만 주현미의 자극적인 음색은 단숨에 성인층을 사로잡았다. 그가 가요계에 공식 데뷔하면서 내놓은 ‘비 내리는 영동교’는 그를 스타로 비상하게 해준 결정타였다. 비주얼 측면에서도 손색이 없던 그는 이후 TV를 정복해 성인가요 가수로는 드물게 MBC 주말프로 ‘토요일 토요일은 즐거워’에 단골로 얼굴을 내밀었다. 그는 1986년 네 살 위인 음악동료 임동신(1957년생)씨와의 열애사실을 공개했고 1988년 2월 결혼해 또다시 화제를 뿌렸다.  

 

인구에 회자된 수상소감 ‘여보!’

주현미의 스타덤은 곧바로 개인적인 영예를 뛰어넘어 트로트 음악의 위세로 연결되었고 마침내 트로트는 ‘뽕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성인가요’라는 공식적인 작위(?)를 하사받기에 이르렀다.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반, 짧았으나 팬들의 뇌리에 깊이 자리한 ‘트로트 르네상스’의 한복판에 바로 주현미가 있었다.

주현미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던 것은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노태우 6공정부가 출범한 1988년 연말이었다. 당시 주현미는 ‘3대 가요상’으로 불리던 MBC 가수왕상을 비롯해 KBS 가요대상과 일간스포츠의 골든 디스크상을 휩쓸었다. 한 해에 이 세 트로피를 동시 수상한 가수는 그때까지 주현미가 최초였다. 트로트 가수로서는 상상하기 어렵던 영광이었다.

적잖은 가요 팬들은 아마 주현미가 가수왕상을 받던 장면을 지금도 뚜렷이 기억할 것이다. 사회자가 수상소감을 묻자 새내기 주부였던 그의 입에서 뜻밖에 ‘여보!’란 말이 흘러나왔던 것. 더욱이 이 무대에 같이 섰던 현철은 밤무대를 전전하던 무명에서 일약 10대가수에 오른 감격을 감당하지 못해 마치 세수하듯 연신 눈물을 쏟아내, 이 순간은 1980년대의 잊을 수 없는 TV 명장면으로 남았다.

당시 인기개그맨 최병서는 “무명가수가 스타 되면 남자는 ‘울보’가 되고 여자는 ‘여보’를 찾는다”는 유머로 사람들을 웃겼다. ‘자기’란 말이 보편화되면서 거의 사어(死語)가 되다시피했던 ‘여보’라는 어휘는 주현미 덕분에 순식간에 위력이 되살아나 한동안 신혼부부 사이에서 널리 사용됐다.

-1988년 가수왕상을 받을 때 막 결혼한 신부의 입에서 ‘여보’라는 말이 나온 것은 참으로 의외였습니다. 트로트 음악과 참 잘 어울리는 뉘앙스였고 그래서 어른들은 상당히 호감을 가졌던 걸로 압니다. 혹시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는지 궁금합니다.

“의도라고 할 게 뭐 있나요. 전혀 정신이 없었어요. 그 상황에서 생각할 여유가 있었다면 더욱 그 말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다음날 주변에서는 ‘부모도 음반제작자도 아니고 왜 하필 남편을 불렀느냐’며 아주 남사스러워 하더군요. 그렇지만 저로서는 자연스런 거였어요. 결혼과 동시에 남편은 자기 음악을 접고 제 뒷바라지에 전념했으니까요. 지금은 제 소속사 사장입니다. 대상을 받은 ‘신사동 그 사람’도 남편이 기획한 것이었고요.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음악을 끊기란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저 때문에 관두었으니 얼마나 미안하고 또 고마웠는지 모릅니다. (얼굴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그런 감정이 자연스럽게 ‘여보’란 말로 나온 거예요. 계산일 수가 없죠.”

-임동신씨와는 지금도 잉꼬부부로 부러움을 사고 있습니다. 연애사실을 공표할 당시 주현미씨는 한창 주가 상승중인 스타였고 임동신씨는 록 음악 바깥에서는 이름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 뮤지션이었죠. 하지만 그 당시 얼핏 보기에는 주현미씨가 오히려 더 임동신씨를 좋아하고 안달하는 듯했습니다. 도대체 그가 가진 매력이 무엇이었는지 팬들의 궁금증이 대단했어요. 두 분은 어떻게 만났습니까?

“데뷔하고 얼마 안돼 미주 순회공연을 떠났어요. 40일간의 대장정이었지요. 이주일 조용필 나미 등 쟁쟁한 스타들만 가는 공연이라 햇병아리 신인이었던 저는 거기 낀 것만으로도 영광이었습니다. 그때 임동신씨는 조용필의 밴드 ‘위대한 탄생’의 기타리스트로 참여해 동행했어요.

제가 워낙 생소한 자리는 어색해하는 성격인 데다 막 데뷔해서 아는 사람도 없던 터라 조금 위축돼 있었지요. 그때 임동신씨가 다가와 유난히도 저한테 잘해주었습니다. 아마 제게 마음이 있었던 같습니다. 위로도 됐고 힘도 얻었지요. 첫인상이 참 순수해보였습니다.”   

 

남편은 내 음악의 동반자

1991년 첫아이 준혁을 낳은 직후의 주현미씨 가족

-그래도 막 스타로 발돋움하던 시기에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한다는 점이 활동에 장애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요? 당시 위치로 볼 때는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사실 그때 가요 관계자들 중에서는 결혼이 조금 이른 것 아니냐고 말하던 이들도 있었거든요.

“전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무슨 젊음과 미모로 승부를 거는 탤런트도 아니고, 결혼이 약점으로 작용할 거라는 생각은 없었어요. 주변 사람들도 인정하지만 제가 지금까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게 전성기 때 결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런저런 잡념도, 그 흔한 스캔들도 한번 없이 오로지 남편과 함께 음악에 매달릴 수 있었으니까요. 대놓고 남편을 추켜세우기가 좀 민망하지만 정신이 깨끗한 사람, 인간적으로 따뜻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제 인생의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터뷰할 때마다 임동신씨를 ‘인생뿐 아니라 음악의 동반자’로 말합니다. 그러나 같은 음악인이라도 임동신씨는 록을 했고, 주현미씨는 트로트를 하기 때문에 전공이 판이해 도리어 음악적으로 충돌이 있을 듯한데, 남편이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 겁니까?

“남편은 ‘위대한 탄생’ 전에 그룹 ‘비상구’에서 노래하고 연주했어요. 살펴보면 아시겠지만 당시 록 쪽에서는 꽤 실력을 인정받았던 사람입니다. 지금도 록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어요. 음악 얘기만 하면 서구 록의 계보를 죽 훑어요. 누가 기타 테크닉이 뛰어나고, 누가 펜더를 치고 누구는 깁슨을 친다며 장광설을 펴지요. 전 그러면 ‘그래 봤자 외국음악 아니냐. 우리 음악 얘기하자’며 딴지를 겁니다. 솔직히 음악적으로 통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음악은 음악이기 때문에 결국은 같고 요모조모로 저에게 조언을 해줍니다. 특히 음악 선곡에 큰 도움을 주지요. ‘신사동 그 사람’ ‘또 만났네요’ 등 상당수 곡의 소절 흐름까지 서로 상의했습니다. 지금도 대화의 절반 이상이 음악에 관한 겁니다.”

남편 이야기를 할 때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주현미의 표정은 TV에서 노래할 때처럼 화사한 편은 아니다. 스스로도 “평상시에는 냉정하게 보여 가끔 오해도 받는다”고 고백한다. 분위기를 이끌어가거나 자신을 연출하는 재주가 없다는 것이다. 사회성이 부족한 자신의 성격은 ‘이방인’ 취급을 받으며 자란 어린시절의 경험 탓이리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보통사람 시대의 보통가수

1961년생인 주현미는 잘 알려진 대로 화교 출신이다. 어머니 정옥선씨(1939년생)는 전북 김제가 고향인 한국인이지만 아버지 주금부씨(1935년생·작고)는 중국 산둥에서 태어나 네 살 때 한국으로 이주한 중국인이다. 중국혈통으로 화교학교를 다닌 탓에 학교에서는 중국말을 하고 평상시에는 우리말을 해 친구가 많지 않았고, 때문에 자주 외톨이가 되어야 했다.

어릴 때부터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를 잘 따라 불러 가수의 소질을 보였지만 여느 가수처럼 가수나 연예인에 대한 욕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래하기를 좋아했을 뿐 꿈은 아니었고 설령 포부가 있다 해도 나서서 도전하는 ‘외향성’은 없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MBC가 주최한 ‘이미자 노래 부르기 대회’에서 대상을 받았을 때나, 대학 재학중이던 1981년 MBC 강변가요축제에 과내 그룹인 ‘인삼뿌리’에 참여해 장려상을 받았을 때도 결코 가수가 꿈이나 목표는 아니었다. 단지 친구들과 같이 노래하는 게 좋았고 그때 마침 멤버가 없어서 도와줄 겸 출전했을 따름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타고난 노래 소질은 끝내 그를 가수로 만들고야 만다.

-가수가 꿈이 아니었다면서 어떤 연유로 ‘쌍쌍파티’를 취입하게 된 건가요?

“초등학교 6학년 때인데요, 집안의 친척 어른이 당시 유명한 작곡가였던 이인권 선생님과 아는 사이였어요. 그 분이 ‘노래 잘하는 꼬마가 있다’고 하니까 이선생님이 ‘그럼 한번 데려와봐라’고 하셨고 그래서 청계천에 있던 오아시스 레코드사 사무실에서 레슨을 받게 됐어요. 가수가 되겠다는 욕심은 전혀 없었고 그냥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한 거죠. 그 뒤 중학교 2학년 때 작곡가 정종택 선생님을 알게 됐는데 그 분이 제가 대학졸업 후 약사가 됐을 때 옛날 기억을 갖고 ‘이제 성인이 됐겠지’하며 약국에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그 분 덕분에 음반을 취입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왜 정식 독집이 아니라 메들리 테이프로 시작했습니까?

“그때는 김연자씨가 그랬듯 메들리 테이프가 유행이었고, 비용문제 등 여러가지 사정이 겹쳐서 그렇게 된 거예요. 원래는 녹음도 조미미 선배님으로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만 그 건이 계약금문제로 취소되자 제가 엉겁결에 녹음을 했던 겁니다. 순전히 운이었지요.

‘쌍쌍파티’는 5집까지 나왔는데 지금도 음반이 팔려나간답니다. 오아시스 레코드사에서는 ‘그 테이프가 아직도 회사를 살려준다’고 하더군요. 운명은 정말이지 잠깐 사이에 결정되는 것 같습니다.” 

 

주현미는 여전히 서야 할 무대가 많은 가수다. 그의 데뷔앨범 ‘쌍쌍파티’(오른쪽 위)와 본인이 가장 아낀다는 2집 앨범(오른쪽 아래)

-주현미씨의 스타덤을 6공 노태우 정부의 슬로건이었던 ‘보통사람의 시대’와 맞아 떨어진 산물로 풀이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밥집 아줌마’ 같은 평범한 인상, 남편과 늘 붙어다니는 모습, 결코 수다스럽지 않은 스타일, 무대에 서기 직전에야 화장을 하는 털털함, 이 모두가 보통사람의 이미지였다는 거지요. 본인은 이런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곰곰이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면 맞을 겁니다. 제가 모든 면에서 평범한 것은 사실이니까요. 그러나 실제로는 남다른 조건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히 약사라는 점은 분명 플러스로 작용했던 것 같지만, 화교 출신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나중에 연말 가요 시상식을 앞두고 언뜻 ‘화교가수한테는 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도 들었으니 장점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대중들이 절 빨리 인식하는 재료 정도였겠지요.

제 외모가 밥집 아줌마라고요? (평범한 듯하면서도 매력적이라고 하자 큰 소리로 웃으며) 그렇다면 미의 기준이 바뀌었나 보네요. 그 점도 유리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타고난 겸손 때문일까. 자신에 대한 설명에서는 말을 빼는 듯하다가도 이 부분에 대해 얘기가 계속되자 그는 잠시 후 속내를 우회적으로 털어놓았다. 본인을 예로 들지는 않았지만 트로트가 활성화되려면 우선 ‘가창력’과 ‘어느 정도의 학벌’ ‘외모’ 그리고 ‘곡’이 결합된 가수가 나와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그는 요즘 트로트 음악계의 인물난(難)과 맥 빠진 현실을 토로했다.

“안 그래도 트로트가 살아나기 힘든 판에 시선을 끌면서 짊어지고 나갈 사람이 없어 보입니다. 트로트로 데뷔하는 가수들이 하나같이 ‘뭔가 도달하지 못한’ 상태인 것 같아요. 트로트는 쉽고 가볍고 천하게, 아무렇게나 부를 노래가 결코 아닙니다.”

‘꺾기’가 트로트의 전부는 아니다

-트로트가 천시되는 이유 중에는 가창의 테크닉이라고 할 ‘꺾기’도 한몫한다고 봅니다. 가수들마다 시도 때도 없이 꺾기를 구사하다 보니, 구수하기는커녕 구차하고 심지어는 창피스럽게 여겨질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주현미씨도 노래할 때 자주 꺾기를 구사하지 않습니까?

“인정합니다. 그러나 꺾기는 아니지만 목에서 잘 ‘넘어가야’ 맛이 나는 부분이 곡마다 꼭 있어요. 저 또한 3연음이 나올 경우 의도적으로 테크닉을 구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절대로 그런 테크닉에 일부러 매달려서는 안 됩니다. 가끔 가요 관계자들이 트로트 창법을 설명하면서 꺾기를 멋으로 해석하는데, 왜 자꾸 꺾으라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가수생활을 하면 할수록 꺾기나 테크닉을 줄이게 되더군요. 노래를 ‘담백하게’ 부르는 게 점점 더 좋아져요.”

-한창 때 TV 프로그램에서 노래하다가 이미자씨에게 창법과 관련해서 꾸중을 들었다는 내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인가요?

“사실입니다. 그게 바로 테크닉에 관한 것이었어요. 노래를 정석대로 부르라는 지적이었습니다. 기교 부리지 말고 순수하고 자연스럽게 하라는 말씀이셨죠. 지금도 마음에 깊이 새기고 있습니다.”

-음악적으로 존경하는 선배 남녀 가수는 누군가요?

“당연히 이미자 선배님과 패티김 선배님이지요. 하지만 제가 서구형 스탠더드 음악이 아니라 트로트 가수인 만큼 이미자 선배님과 더 가깝습니다. 노래와 삶 모두 귀감이 되는 분이시죠. 꾸준히 자신을 지켜왔다는 점만으로도 존경받을 만합니다. 제가 활달한 성격이 못되다 보니 남자 가수들은 잘 모르기 때문에 평가하기 곤란하네요.”

-지금까지 발표한 독집이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그 가운데 가장 맘에 드는 앨범과 곡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아니에요. 데뷔 이후 소속 음반사가 바뀌는 통에 실제로 발매된 앨범은 생각보다 많습니다. ‘쌍쌍파티’ 5집을 빼고도 16장이나 되지요. 1993년 ‘첫사랑’ 앨범 이후 7년 만에 ‘러브레터’를 냈으니까 1993년 이전에는 한 해에 2장 가까이 나온 셈이지요.

가장 좋아하는 앨범으로는 1988년 2집 앨범 ‘신사동 그 사람’을 꼽고 싶습니다. 아까 지적하신 대로 평론가들은 많이 비판한 앨범이지만, ‘비에 젖은 터미널’ ‘어제 같은 이별’도 수록되어 있어서 대중적 측면에서 완성도가 높다고 생각합니다. 곡으로는 남편이 만든 ‘추억으로 가는 당신’과 분위기가 좋은 ‘단심’이 맘에 듭니다.” 

 

-지금까지 이렇다 할 스캔들이나 별다른 사고 없이 평탄한 음악생활을 해왔지만, 대표작인 ‘비 내리는 영동교’가 표절시비에 휘말렸던 것과 1994년에 지면을 요란하게 장식했던 에이즈 감염설이 기억납니다. 두 사건에 매우 상심했을 것 같은데요.

“표절사건은 한 스포츠지 기자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지요. ‘비 내리는 영동교’의 전주가 일본노래와 비슷하다는 거였어요. 하지만 표절판정은 받지 않았어요. 그래서 별로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제가 에이즈에 감염됐다는 소문은 정말 뚱딴지 같은 얘기였어요. 저도 그 소문의 발원지가 궁금했고 당시 청와대에서 확인에 나서기도 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건 역시 전혀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웬만한 일엔 마음 상하지 않는 성격인가 봐요. 정작 부담스러운 것은 신문사나 방송사에서 연말에 상 받으러 나오라고 할 때죠. 열심히 활동하지도 않았고 히트곡도 없는데, 줄 사람이 없어서 주는 것이 뻔한 상을 받자니 참 민망한 일이잖아요. 그래서 수상을 마다한 적도 있습니다.”

목표는 ‘평범한 최고’

워낙 무덤덤한 성격 탓일까, 아니면 최근의 트로트 상황에 대해 무력감을 갖고 있기 때문일까. 한국 트로트 음악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동안 그에게서 “그냥 그렇게 가도록 놔두세요”라는 말이 더러 흘러나왔다. 모든 것에는 ‘시간과 세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언뜻 안일한 태도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거기에는 ‘언젠가 트로트에 또다시 기회가 올 것’이라는 낙관이 배어 있었다.

“주현미 노래가 대중들에게 과연 무엇을 주었느냐”는 마지막 물음을 던졌다. 그는 “작은 기쁨이었을 것”이라고 답했다.

“누구에게나 기쁨과 슬픔이 있지요. 1980년대와 1990년대, 많은 분들이 기쁨과 슬픔을 맞이했을 때 제 노래가 곁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고 봅니다. 비록 거창하고 진지하지는 않았지만 한 분 한 분에게 생활에 작은 기쁨을 주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인터뷰 막판까지도 주현미의 키워드는 결혼이었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결혼하고 나서 나를 잘 만들어왔다고 자부한다. 늘 평범하게 임하고 남에게 부담주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대중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진지한 자세로 노래했다”고 자신의 음악인생을 정리해 표현했다. 그리고 남편이 해주었다는 한마디를 덧붙이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언젠가 ‘보통 때는 평범한 가정주부지만, 무대에 섰을 때만큼은 연예인이니 그 순간은 최고가 돼라’고 하더군요. 저는 지금도 그 말을 좌우명이자 철칙으로 삼고 있어요. 꼭 대단한 욕심을 갖는 것만이 훌륭한 음악인이 되는 길은 아니지만, 팬들에게는 언제까지나 최고의 모습으로 남고 싶습니다.”   (끝)

글: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 www.izm.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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