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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Nietzsche, Friedrich]

鶴山 徐 仁 2006. 1. 23. 15:01
 
본문

1844. 10. 15 프로이센 작센 뢰켄~1900. 8. 25 바이마르.

19세기 독일의 철학자.
[개요]

니체(1888)
전통적인 서구 종교·도덕·철학에 깔려 있는 근본 동기를 밝히려 했으며, 신학자·철학자·심리학자·시인·소설가·극작가 등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계몽주의라는 세속주의의 승리가 가져온 결과를 반성했다. "신은 죽었다"는 그의 주장은 20세기 유럽 지식인의 주요한 구호였다.

민주주의, 반(反)유대주의, 힘의 정치 등에 강력히 반대했지만 뒷날 그의 이름은 그가 혐오했던 파시스트들에게 이용되었다.


[초기생애]

그의 집안은 루터의 경건주의를 신봉했다. 친할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교를 옹호하는 책을 썼고, 외할아버지는 시골 목사였다. 아버지 카를 루트비히 니체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니체의 이름은 이 왕의 이름을 딴 것임)의 명으로 뢰켄의 목사로 임명되었다. 아버지는 니체가 6세가 되기 전에 죽었고, 어머니 프란치스카, 누이 엘리자베트, 할머니와 두 하녀 사이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850년 잘레 강변의 나움부르크로 옮겨 돔 김나지움을 다녔고, 1858년 프로테스탄트교 학교인 슐포르타에서 고전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본대학에서 신학과 고전문헌학을 공부했다. 재학중 두 학기는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그 까닭은 2명의 대표적인 고전학 교수 오토 얀과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사이의 날카로운 대립 때문이었다. 그는 음악에서 안식처를 찾았고, 낭만파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의 영향이 두드러진 곡들을 작곡하기도 했다. 1865년 리츨 교수를 따라 라이프치히대학으로 옮겼다.

1867년 10월 군에 입대했으나 다음해 3월, 말을 타다가 가슴을 심하게 다쳤다.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그해 10월 라이프치히대학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그동안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알게 되었고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만났으며 고전문학자 에르빈 로데와 우정을 쌓았다.


[바젤 시기]

스위스 바젤에 고전문헌학 교수직이 비었을 때, 리츨의 추천으로 학위도 없이 교수로 임명되었다. 1869년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시험과 논문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870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이 일어나자 의무병을 지원했는데, 1개월도 안되어 환자를 수송하다가 이질과 디프테리아에 걸렸다.

바젤에 있을 때 바그너와 사귀었고 뛰어난 제자로 인정받았지만, 바그너가 〈파르지팔 Parsifal〉에서처럼 그리스도교적 모티브를 많이 이용하고 국수주의와 반유대주의에 빠지자 결별했다.

니체의 첫번째 저서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 Die Geburt der Tragödie aus dem Geiste der Musik〉(1872)은 그가 고전학의 굴레에서 벗어났음을 보여준다. 그는 이 작품에서 그리스 비극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전자는 중용·제약·조화를, 후자는 거침없는 정열을 표현함)의 결합에서 나왔으며, 소크라테스의 합리주의와 낙관주의가 그리스 비극을 죽였다고 주장했다. 이 작품은 오늘날에도 미학사(美學史)의 고전으로 꼽힌다.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을 출판했다. 건강이 점차 나빠져서 1879년 교수직을 사임했다. 1879~89년에는 책을 쓰는 것 외에는 삶에 어떠한 흥미도 느끼지 못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병에 시달렸고 시력도 거의 잃었으며, 몇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와도 접촉하지 않았다.


[고립·창조·오용의 시기]

성서 이야기 형식의 문학적·철학적 대작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Also sprach Zarathustra〉는 1883~85년에 4부로 나왔는데, 제4부는 자신의 돈으로 출판했다.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도 당시에는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철학을 더욱 직접적인 산문 형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선악의 피안 Jenseits von Gut und Böse〉(1886)과 〈도덕 계통학 Zur Genealogie der Moral〉(1887) 역시 독자를 확보하는 데는 실패했다.

니체의 정신이 정상적이었던 마지막 해인 1888년은 생산적인 해로, 〈바그너의 타락 Der Fall Wagner〉을 출판했고 〈우상의 황혼 Die Götzen-Dämmerung〉·〈반(反)그리스도 Der Antichrist〉·〈니체 대 바그너 Nietzsche contra Wagner〉·〈이 사람을 보라 Ecce Homo〉 등을 썼다.

1889년 1월 이탈리아 토리노의 길거리에서 쓰러진 뒤 정신적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고 1900년 8월 25일 죽었다.

니체의 이름이 아돌프 히틀러 및 파시즘과 연결된 것은 주로 그의 누이 때문이었다(→ 국가사회주의). 그녀는 대표적인 국수주의자이자 반유대주의자인 베른하르트 푀르스터와 결혼했는데, 1889년 푀르스터가 자살한 뒤 니체를 푀르스터의 이미지로 개조했다. 그녀는 니체의 작품들을 무자비하게 통제했고 탐욕에 사로잡혀 니체의 버려진 글들을 모아 〈권력에의 의지 Der Wille zur Macht〉(1901) 등을 출판했다. 히틀러에 대한 그녀의 열렬한 지지 때문에 대중은 니체를 독재자 히틀러와 연결지어 생각하게 되었다.


[니체의 철학사상]

니체의 저서들은 뚜렷하게 3가지로 구분된다. 초기작품 〈음악의 정신에서 비극의 탄생〉과 〈시대와 맞지 않는 생각 Unzeitgemässe Betrachtungen〉(1873)에서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영향을 받은 낭만주의적 관점이 지배적이었다. 중기 작품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즐거운 과학 Die fröh-liche Wissenschaft〉(1882)까지는 이성, 과학, 문학 장르의 실험 등을 찬양했고 초기 낭만주의, 바그너, 쇼펜하우어 등에게서 벗어났음을 보여주었다.

원숙기 철학은 〈즐거운 과학〉 이후에 나타난다. 원숙기 저작에서는 주로 가치의 기원과 기능을 다루었다. 생에 내재적 가치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면서 항상 생이 평가되고 있다면 그러한 가치평가는 평가자의 조건을 나타내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는 특히 서구의 철학·종교·도덕의 기본적인 문화적 가치들을 금욕주의적 이상(理想)의 표현이라고 보았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고통이 궁극적 중요성을 갖는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니체에 따르면 유대-그리스도교 전통은 고통을 신의 의도이자 죄갚음의 기회로 해석함으로써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따라서 그리스도교의 승리는 개인의 불멸성이라는 교리와 개인의 삶과 죽음은 우주적 의의를 갖는다는 기만에 힘입은 것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전통철학은 신체에 비해 영혼, 감각에 비해 정신, 욕망에 비해 의무, 현상에 비해 실재, 시간적인 것(일시적인 것)에 비해 무시간적인 것(영원한 것)에 특권을 부여함으로써 금욕주의적 이상을 표현했다. 그리스도교가 죄지은 자들에게 구원을 약속한 반면, 철학은 현자들에게 세속적인 것이긴 하지만 구원의 희망을 제시했다. 전통적인 종교와 철학의 공통점은 존재는 설명·정당화·속죄 등을 필요로 한다는 가정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양자는 경험을 다른 세계, 이른바 '참된' 세계를 빌려 훼손한다. 양자는 몰락하는 생이나 비탄에 빠진 생의 징후로 볼 수 있다.

전통도덕에 대한 니체의 비판의 초점은 '주인' 도덕과 '노예' 도덕의 유형학이다. 니체는 독일어 어휘 'gut'(좋은, 선한)·'schlecht'(나쁜)·'böse'(악한) 등을 검토하면서 선악의 구별은 원래 비도덕적인 기술(記述)에 쓰인 것으로 선은 우월한 주인, 악은 열등하고 천한 노예를 가리켰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노예가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배의 속성들을 악으로 규정함으로써 선과 악의 대조가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월함은 악덕이 되었고, 자애·겸손·복종이 경쟁·자존심·자율성으로 대체되었다. 노예도덕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이바지한 것은 노예도덕만이 참된 도덕이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절대성에 대한 주장은 종교적 윤리와 마찬가지로 철학적 윤리에도 중요하다. 니체는 주인·노예 도덕의 역사적 계통학을 제시했으면서도, 이 계통학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는 특성에 대한 비역사적 유형학이라고 주장했다.

니체는 금욕주의적 이상에 의해 최고의 가치로 정립된 것을 평가절하하기 위해 '허무주의'란 용어를 썼다.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수동적 허무주의 시대, 즉 19세기에 실증주의가 출현함으로써 종교적·철학적 절대성이 이미 해체되었음을 아직 모르고 있는 시대라고 보았다. 형이상학적이고 신학적인 기초와 전통적인 도덕이 허물어짐으로써 이제는 무목적·무의미 등의 느낌만이 남았다. 무의미의 승리는 곧 허무주의의 승리이며, 따라서 "신은 죽었다". 그러나 니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금욕주의적 이상의 쇠퇴와 존재의 본래적 무의미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삶에 의미를 주는 대리 절대자를 찾으리라고 보았다. 당시 등장하던 민족주의가 그러한 불길한 대리 신이고 민족국가는 초월적 가치와 목적을 부여받게 될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철학과 종교가 교의의 절대성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듯이, 절대성은 사명감과 정열을 지닌 민족국가에도 나타난다고 보았다. 경쟁자에 대한 살육과 영토의 정복은 보편적 형제애와 민주주의·사회주의의 깃발 아래 진행된다. 니체의 이러한 선견지명은 날카로운 것이었다.

니체는 자신의 저작들을 허무주의와의 투쟁으로 보았다. 종교·철학·도덕에 대한 비판을 바탕으로 퍼스펙티브주의(perspectivism),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 영원한 회귀, 초인(超人)에 관한 독창적인 사상을 발전시켰다.

퍼스펙티브주의는 지식이 항상 특정한 퍼스펙티브에 의존한다고 주장하는 태도이다. 즉 순수한 지각은 존재하지 않으며, 관점없는 지식이란 특정한 관점없이 본다는 것만큼이나 모순적이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퍼스펙티브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거부한다. 모든 것을 포괄하는 퍼스펙티브란 대상을 가능한 모든 관점에서 동시에 본다는 생각과 마찬가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니체의 퍼스펙티브주의는 때로는 상대주의나 회의주의로 오해받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퍼스펙티브주의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퍼스펙티브주의는 니체의 주장, 이를테면 지금까지의 지배적인 가치는 금욕주의적인 이상에 따른 것이었다는 주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한다. 이러한 주장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인가, 아니면 특정한 퍼스펙티브에서만 옳은 것인가? 퍼스펙티브주의는 퍼스펙티브주의 자체가 절대적 참이라고 가정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이는 자기모순이 아닐까? 이러한 문제들과 관련해서 지금까지 인식론에서 유용한 작업과 풍부한 주석서가 많이 나왔다.

니체는 종종 생을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 즉 성장과 영속을 위한 본능과 동일시했다. 이러한 개념은 금욕주의적 이상을 해석하는 또다른 방식을 제시한다. 이 점은 그가 "이 의지가 '결여'된 인류의 모든 최고 가치는 쇠퇴와 '허무주의적' 가치의 징후이면서도 신성한 이름을 내걸고 주인행세를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데서 나타난다. 따라서 전통적인 철학·종교·도덕은 불충분한 권력의지의 옷으로 치장하고 있다. 서구문명을 떠받치고 있는 가치들은 퇴폐의 승화된 산물이었다. 몇몇 주석가는 니체가 말하는 권력을 지향하는 의지라는 개념을 인간의 삶만이 아니라 유기적·무기적 영역에까지 확대 적용함으로써 니체를 권력의지의 형이상학자로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해석은 지지하기 어렵다.

영원회귀의 원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기본사상이다. 영원회귀란 서로 다른 삶이 무한히 반복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매순간과 모든 순간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되는 것을 뜻한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초인일 것이고 초인과 보통사람의 거리는 인간과 원숭이 사이의 거리보다 더 멀다고 말하고 있다. 주석가들은 아직도 영원회귀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인간을 규정하는 특수한 속성들이 있는가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다.


[니체의 영향]

니체는 어떤 사람은 죽은 뒤 다시 태어난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말은 자신에게도 적용된다.

니체 없이는 20세기의 철학·신학·심리학의 역사를 생각할 수 없다. 예를 들면 독일의 철학자 막스 셸러, 카를 야스퍼스, 마르틴 하이데거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으며 프랑스의 철학자 알베르 카뮈, 자크 데리다, 미셸 푸코 등도 마찬가지이다. 철학과 문학비평에서 일어난 실존주의와 해체주의는 그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 신학자 파울 틸리히, 레프 셰스토프는 "신은 죽었다"의 신학자인 토머스 J. J. 알타이저와 마찬가지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위대한 유대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니체가 그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지적하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1부를 폴란드어로 옮겼다. 니체가 자기를 그 누구보다도 더 철저하게 이해했다고 말한 지크문트 프로이트, 알프레트 아들러, 카를 융 등 심리학자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토마스 만, 헤르만 헤세, 앙드레 말로, 앙드레 지드, 존 가드너 등의 소설가와 조지 버나드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슈테판 게오르크,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의 시인·극작가도 그에게서 영감을 얻었고 그에 관해 글을 썼다. 분명히 니체는 지금까지 살았던 가장 영향력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B. Magnus 글 | 梁雲悳 참조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