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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Schopenhauer, Arthur]

鶴山 徐 仁 2006. 1. 23. 14:58
 
본문

1788. 2. 22 프로이센 단치히(지금의 폴란드 그다인스크)~1860. 9. 21 프랑크푸르트암마인.

독일의 철학자.
[개요]

쇼펜하우어(1855)
흔히 '염세주의 철학자'로 불린다. 무엇보다도 헤겔의 관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는 의지의 형이상학을 주창한 인물로 중요하다. 그의 글은 나중에 실존철학과 프로이트 심리학에 영향을 끼쳤다.


[초기생애와 교육]

쇼펜하우어는 부유한 상인 하인리히 플로리스 쇼펜하우어와 나중에 소설·수필·기행문 등을 써서 유명해진 요하나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3년 단치히가 프로이센 지배 아래로 들어가자 가족과 함께 함부르크 자유도시로 이사했다. 쇼펜하우어는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았다. 그후 사립직업학교에 들어가서 계몽주의 정신을 익혔고 인간의 서약에 민감한 경건파적 태도를 접했다. 1803년에는 부모와 함께 1년 동안 벨기에·영국·프랑스·스위스·오스트리아 등을 여행했다. 1805년 4월 아버지가 갑자기 죽자, 그의 삶은 결정적인 변화를 맞았다. 어머니와 여동생 아델레는 바이마르로 이사했으며 어머니는 그곳에서 시인 J. W. 폰 괴테와 독일의 볼테르라 불리는 크리스토프 마르틴 빌란트의 사교 모임에 들어갔다. 쇼펜하우어는 1년 남짓 함부르크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지만, 그 덕분에 예술과 과학에 몰두할 자유를 좀더 얻을 수 있었다. 1807년 5월 마침내 함부르크를 떠났고 그후 2년 남짓 고타와 바이마르에서 지내면서 대학 입학에 필요한 학과 공부를 했다. 1809년 가을 괴팅겐대학교 의학부에서 입학허가를 받아 주로 자연과학 강의를 들었다. 그러나 겨우 2학기 만에 인문학부로 옮겨 우선 플라톤과 이마누엘 칸트를 열심히 공부했다. 1811~13년 베를린대학교를 다녔고 여기서 J. G. 피히테와 프리드리히 슐라이어마허의 강의를 들었으나 별다른 감명을 받지는 못했다. 1813년 여름 동안에 루돌슈타트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완성하여 예나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성숙기 활동]

그해 겨울(1813~14) 바이마르에서 지내면서 괴테와 함께 여러 가지 철학적 주제를 놓고 토론했다. 같은 시기에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의 제자인 동양학자 프리드리히 마이어는 그에게 고대 인도의 가르침들(베단타 철학과 베다의 신비주의)에 관해 알려주었다. 뒷날 쇼펜하우어는 〈우파니샤드 Upaniads〉(베다 경전의 일부로 철학서)가 플라톤 및 칸트와 더불어 자신의 철학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기초를 이룬다고 생각했다(→ 인도철학). 1814년 5월 평소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어머니의 경박스런 생활방식 때문에 어머니와 다툰 후 사랑하던 바이마르를 떠났다. 그후 1818년까지 드레스덴에서 살면서, 때때로 〈드레스데너 아벤트차이퉁 Dresdener Abendzeitung〉의 필진들과 교류했다. 쇼펜하우어는 아이작 뉴턴에 반대하고 괴테를 지지하는 논문 〈시각과 색에 관하여 Über das Sehn und die Farben〉(1816)를 완성했다.

그후 3년 내내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9)를 준비하고 저술했다. 이 책의 기본 사상(이는 제목 자체에 축약되어 있음)은 포괄적인 두 계열의 반성으로 이루어진 4권의 책 속에 전개되어 있는데, 이 반성에는 인식론·자연철학·미학·윤리학이 차례로 포함되어 있다.

제1권은 칸트로 시작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세계는 공간·시간·인과성 같은 지성의 구성물의 도움을 받아야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구성물들은 이 세계를 현상으로서, 즉 공간·시간 면에서 병렬·연속된 다수의 사물로서만 보여줄 뿐 칸트가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물자체로서 보여주지는 않는다. 제2권은 표상된 개념들의 본질에 관한 고찰로 나아간다. 세계의 만물 중에서 오직 하나만이 인간에게 2가지 방식으로 떠오른다. 말하자면 인간은 외적으로 몸 또는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 내적으로는 만물의 첫째 가는 본질의 일부, 즉 의지가 바로 자신임을 알고 있다(→ 심신이원론). 의지는 물자체이다. 즉 그것은 단일하고 헤아릴 수 없으며 변화할 수 없고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있으며 원인도 목적도 없다. 현상의 세계에서 그것은 현실화의 상승 계열 속에 반영되어 있다. 무기적 자연의 힘 속에 있는 맹목적인 충동에서 시작해서 유기적 자연(식물과 동물)을 거쳐 합리성에 따르는 인간 행동에 이르기까지 끊임없는 욕망·선동·충돌의 거대한 사슬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사슬은 높은 형태가 낮은 형태를 상대로 해서 벌이는 계속적인 싸움, 목표도 없이 줄기차게 이어지는 영원한 열망이며 비참·불행과 뗄래야 뗄 수 없게 결합되어 있다. 그러나 이 사슬의 끝에는 죽음이 있다. 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비난으로서, 각 개인에게 '이제 충분하냐'는 물음을 던진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 1·2권이 의지를 긍정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반면, 미학과 윤리학을 다루는 제 3·4권은 의지의 부정이 해방가능성임을 지적함으로써 앞의 2권을 넘어선다. 이같은 부정을 보여주는 천재와 성인을 이 책의 주인공으로 불러옴으로써 이 책은 비존재가 존재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염세주의적' 세계관을 표방한다. 예술은 인간에게 열정이 더이상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 의지 없는 사물관을 요구한다(→ 예술철학). 여러 수준의 예술은 의지 실현의 수준과 대응한다. 가장 낮은 수준의 예술은 건축학이며 그 다음은 시 예술이고, 가장 높은 수준의 예술은 음악이다. 그러나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는 단지 순간적으로만 의지의 봉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진정한 해방은 오직 자아에 의해 부과된 개인성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동정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친절한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한 것, 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에 가깝게 가 있는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인간학과 사회학은 헤겔과는 달리 국가나 공동체에서 출발하지 않고 인간(환자, 홀로 힘써 일하는 고통받는 이들)에 초점을 맞추어, 그들에게 자신의 입장을 지키면서 남과 더불어 살 가능성을 보여준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쇼펜하우어 사상의 정점을 이루었다. 이후 많은 세월이 흐르도록 그의 철학에는 더이상 아무런 발전도 일어나지 않았다. 어떠한 내적 고투나 변화도 없었고 기본 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재검토도 없었다. 이 책 이후의 저술들은 그저 좀더 상세한 설명, 명료화, 확인의 수준을 넘지 않고 있다.

쇼펜하우어는 장기간에 걸친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헤겔과의 논쟁을 성공적으로 끝낸 이후인 1820년 3월 베를린대학교에서 교수자격을 취득했다. 24학기 동안 교수로 재직했지만 강의라고 할 만한 것은 첫 강의뿐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강의 시간을, 많은 학생이 듣고 있고 게다가 수강생이 점점 더 늘고 있던 헤겔의 강의 시간과 같게 잡았기 때문이고 또 그 시간을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가 끊임없이 진보하는 철학에 도전해서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의 책도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쇼펜하우어는 1년에 걸친 2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떠났으며, 그뒤 뮌헨에서 1년 동안 병을 앓았다. 1825년 5월 베를린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의를 시도해보았으나 실패했다. 그후 주로 번역을 하면서 이차적인 일들에만 몰두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의 학문적 은둔]

그후 28년 동안 그는 프랑크푸르트에서 살았는데, 그곳이 콜레라의 위험에서 벗어난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잠시 동안 외에는 그 도시를 떠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대학교수직을 포기하고, 연구(특히 자연과학)와 집필에 몰두한 채 은둔생활을 했다. 후대에 이르러 처음으로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즈음 그의 삶은 하루하루 똑같이 정해진 생활, 칸트를 모범으로 삼은 금욕주의적인 생활양식, 유행에 뒤떨어진 옷차림, 몸짓이 많이 섞인 독백 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 은둔기를 한가롭게 보낸 것은 아니었다. 1836년에는 19년에 걸친 '말없는 분노' 끝에 〈자연 속의 의지에 관하여 Über den Willen in der Natur〉라는 소책자를 출간했다. 이 책에서 그는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자연과학의 의문점과 발견들을 자신의 의지 이론의 지지 근거로 능숙하게 사용했다. 이 책의 서문에는 '협잡꾼' 헤겔과 그 도당에 대한 신랄한 독설이 노골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외 에세이도 몇 편 발표했다.

그의 주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재판(1844)에는 1권이 더 추가되었지만, 그래도 그가 '멍청한 세상 사람들의 저항'이라 불렀던 것을 깨부술 수는 없었다. 쇼펜하우어의 이름이 그다지 무게를 갖고 있지 못했음은 3명의 출판인이 그의 후기 저술들을 거절했을 때 분명히 드러났다. 결국 베를린의 한 이름없는 서적상이 고료 없이 원고를 받아들였다.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시발점이 된 이 책에서 그는 그때까지는 그의 저술의 틀 안에서 개별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었다. 6년에 걸친 작업 끝에 에세이와 주석들을 모아 〈소품과 단편집 Parerga und Paralipomena〉(1851)이라는 제목을 단 2권의 책으로 출간했다. 〈소품〉에는 철학사와 관련된 단편들이 실려 있다. 가령 〈대학 철학에 관하여〉라는 유명한 논문과, 심오하고 수수께끼 같은 〈개별자의 운명에서 직관적 의도에 관한 초험적 사변〉·〈영시(靈視) 및 그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시론〉(초심리학에 관한 최초의 탐구, 분류, 비판적 반성)·〈삶의 지혜에 관한 격언〉 등은 그의 오랜 삶을 통해 얻은 선명하고 빛나는 설명들이다. 〈단편집〉, 또는 쇼펜하우어가 부르는 대로 하자면 "여러 가지 주제에 관한 별개의, 하지만 질서가 잡힌 사상들"에는 글쓰기와 문체, 여성, 교육, 소음과 소리를 비롯한 수많은 주제에 관한 에세이들이 실려 있다.

생애 말년에는 그의 저작 대부분에 마무리 손질을 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제3판이 자신있는 서문을 달고 1859년에 나왔고, 1860년에는 〈윤리학 Ethics〉 재판이 나왔다. 쇼펜하우어가 갑작스럽게 고통 없이 죽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율리우스 프라우엔슈테트가 많은 수고(手稿)를 담고 있는 〈소품과 단편집〉의 증보신판(1862)을 비롯해 〈4가지 근원에 관하여〉(1864)·〈자연 속의 의지에 관하여〉(1867)·색깔에 관한 논문(1870)·〈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제4판, 1873)를 냈다. 1873년말 프라우엔슈테트는 쇼펜하우어의 첫번째 전집을 6권으로 출간했다.


[영향]

이 기간에 쇼펜하우어의 실제적인 영향이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의 사상은 정신과 이성이 아니라 직관력·창조력·비합리적인 것에 주목함으로써 부분적으로 니체를 거쳐 물활론·생철학·실존철학·인간학 등에 영향을 끼쳤다. 제자 율리우스 반젠과 에두아르트 폰 하르트만의 무의식 철학을 매개로 할 경우에, 쇼펜하우어는 현대 심리학과 지크문트 프로이트 및 그 학파와도 연결될 수 있다. 스위스 문화사학자 야코프 부르크하르트의 역사 철학 역시 쇼펜하우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독일 문화권에서 쇼펜하우어가 음악과 문학에 끼친 영향은 리하르트 바그너, 한스 피츠너, 빌헬름 부슈,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프랑크 베데킨트, 토마스 만과 같은 여러 인물을 통해 드러난다.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 있는 쇼펜하우어 학회는 1911년부터 쇼펜하우어 철학을 연구·제시·보급하는 데 전념해왔다.

A. Hübscher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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