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의 전개 및 영향
▶14-15세기
개혁
운동 : W.Occam,
J.Wycliff, J.Huss → 신앙의
순수화
운동
▶발단 :
성페드로
사원
건축비
마련을
위한
Leo10세의
면죄부
판매
▶Luther의
<95개조
항의문>발표 →
1520년 3대
논문
발표
▶영향 :
스위스에서
H.Zwingli(1484-1531)의
종교개혁 →
J.Calvin의
종교개혁
▶종교의
분파 :
카톨릭파와
루터파와
나누어짐
▶종교의
자유 :
1555년
아우그스부르크의
화의에서
종교의
자유 허락됨.(단,한정적 자유)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1)
종교개혁은 순수한 기독교 재발견의 운동, 성서를 신앙의 규범으로 삼았다.
☞ Luther는 신성하게 지명된 교회의 가름침을 배제하고, 신이 개인이 갖추어야 할 것을 제시하고 있는 성경에 궁극적인 권위를 설정하였다. 이런 목적에서, Luther는 성서를 독어로 번역해 일반인들도 읽기 쉽도록 하였다.
(2)
프로테스탄트들의 대부분은 인간이 평등하게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 프로테스탄트가 교황의 권위를 배격하고 개인 신자의 양심에 호소한 것은 개인주의, 인간의 권리 등의 사상과 부합→민주주의적 특색⇒입헌정부 수립 위한 노력
(3)
종교개혁에 있어서 개신교의 윤리는 생산적인 직업 생활과 자본주의 정신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 Luther는 아무리 천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람이 하나님의 소명에 의하여 맡게 된 직업이라면 올바르게 종사하라고 가르침. 독일어 는 天職, 神의 召命이라는 뜻이 있다. 특히 캘비니스트는 직업노동의 생활 장려⇒일을 천직으로하여 거기에서 얻은 부를 소비하지 않고 저축하여 재생산과정에 투자→자본주의 발흥기의 정신이 됨.
cf. Max
Weber : 근대자본주의는 이기심에 의한 개인의 욕망 확대가 아니라 종교적 금욕, 절약,근면, 경건한 자기극복이라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하고, 따라서 자본주의는 그 자체가 거부되어야 할 근거가 없다고 보았다.
▣Luther의 교육목적
(1)
가정과 교회와 국가에서 그의 위치를 정하고 자기가 맡은 사명을 담당할 수 있는 유용한 인간으로 개개학생을 부양하고 훈련시키기 위한 일.
(2)
성품을 도야하는 일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위하여 각자가 지닌 상이한 기능을 활용하는 데 있다고 보았다.
▣Luther의 교육사상 및 내용
(1)
가정교육을 국가발전의 기초로 삼았다
☞ 교회와 학교가 아동의 교육을 보충할 수는 있으나 결코 가정을 대신할 수 있다고 보지 않았다. ⇒독립성과 자율성, 책임성의 훈련 강조
결혼=神的인 제도 (∵아동교육의 중요한 책임을 담당하게 됨)
(2)
가정교육 다음으로 학교가 필요하다는 것을 설명하고, 학교의 설치는 국가의 책임이라고 하였다
마틴 루터
아이슬레벤 출생.
아버지는 만스펠트로 이주하여 광부로 일하다가 구리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다. 그는 엄격한
카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여덟째 중 두 번째 아들이었던 마틴 루터는 1501년 에르푸르트대학에 입학, 1505년
일반 교양과정을 마치고 문학석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아버지의 요청에 따라 법률공부를 시작하였다.
그 당시 에르푸르트는 인문주의
운동이 가장 활발한 곳으로서, 루터가 비록 인문주의자는 아니었지만 이 운동의 열정을 공유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장차 고대언어, 특히 헬라어
연구와 초대교회 교부들의 저작에 근거한 스콜라신학의 비판에서 더욱 두드러지게 반영되어진다.
1505년 7월2일, 도보여행 중
낙뢰(落雷)를 만났을 때 함께 가던 친구의 죽음을 계기로, 그 해 7월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학업을 중단, 에르푸르트의 아우구스티누스
수도회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이 이야기는 마치 전설이나 설화처럼 전해지는데, 솔직히 이 이야기는 좀 과장되고 왜곡된 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마틴루터는 옆에서 떨어지는 낙뢰를 무서워 땅에 엎드리며, 성 안나(Anna)"에게 "도와준다면 수도원에 들어가겠다"고
도움을 요청하였다고 전해지나, 루터는 낙뢰에 대한 과학적이며 자연적인 지식이 분명히 있었다고 보여진다. 더욱이 옆의 동행하는 친구가 낙뢰에 맞아
죽었다는 것은 아마 사실이 아니며 과장인 듯 하지만, 루터에게는 하나님에 대한 심판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으며, 그 두려움이 그를 서원을 강요하게
하여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하였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어쨋든 루터는 그의 서원에 따라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 만큼은 사실이며,
하나님은 루터를 도구로 사용하기 위하여 그를 수도원으로 부르셨으며, 그는 그곳에서 엄격한 훈련과 과정을 통하여 성경을 배우고 익히게
된다.
또 루터의 수도원생활에 대한 기록도 상당부분이 과장되어있고 신비화되어있고 전설화되어있다. 그는 수도원에서 엄격한 계율에 따라
수도생활을 하며 1507년 사제(司祭)가 되고, 신학교육을 받아 수도회와 대학에서 중책을 맡게 되었다. 그는 빠른 속도로 수도원의 삶에서 학식과
능력을 인정을 받기 시작한다. 1511년 비텐베르크대학으로 옮겨, 1512년 신학박사가 되고 1513년부터 성서학 교수가 되어 강의를
시작하였으며 시편, 로마서, 갈라디아서, 히브리서등 주석강의에 착수하게 된다. 1515년 그는 수도원의 연구책임자가 되고 동시에 11개의
수도원을 관리하는 교구장이 됨으로 인하여, 그가 탁월한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준다.
그는 수도원의 생활을 성공적으로
지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죄의 문제에 대해 상당히 번민하였으며, 하루에도 몇번씩 고해성사를 함으로서 그의 담당사제에게 괴로움을 주는 일도
있었다고 전해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에게 죄가 남아있음을 알고 번민하였다고 한다. 또 그는 한때 명상과 같은 신비주의에 몰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이때, 하느님은 인간에게 행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접근하고 은혜를 베풀어 구원하는
신임을 재발견하였다.
이미 확실히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1515-1516년 사이에 루터는 죄인이 오직 믿음만으로, 즉 대가없는
용서의 복음 -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신뢰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고 그의 강의에서 가르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다. 마침내 로마서
1장17절의 성경말씀에서 이신칭의(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음) 사상을 그는 깨닫고 있었으며, 하나님이 믿음을 통하여 주시는 의, "수동적인 의"를
깨닫게 된다. 그는 훗날 저서에서 "그 때에 나는 전적으로 거듭났으며, 열린문을 통하여 천국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17년 루터는 갈수록 심해지는 교황청의 악폐에 대해서 반대의사를 표명해야만 하는 부담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이미
비텐베르크 대학의 그를 지지하는 모든 교수들의 선두주자이었으며 명실상부한 대표자가 되어 있었다. (훗날 이 대학은 루터 종교개혁의 선봉이
되어진다)
교황 레오10세는 브란텐부르크의 알브레호트에게 마인츠의 대주교 직분과 마그데부르크의 대주교직을 주었으며, 동시에 겸직을
금지하는 교회 관습을 어기고 할버슈타트의 주교직까지 수행하는 승인서를 주었다. 알브레흐트는 이러한 파격적인 겸직을 교황에게 받아내면서
아우그스브르크의 은행으로부터 거액을 빌려 교황에게 지불하게 되는데, 그 대신 성베드로 성당의 건축을 위한 면죄부 판매의 자기 구역 판매의 절반을
차지하기로 교황청으로부터 허용을 받았던 것이다.
이 판매를 위하여 웅변에 능한 요한 테첼이라고 하는 도미닉의 수도사가 면죄부의
효력을 과장하기 시작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결과가 당시 교회의 관습이 되어 있던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대한 비판으로, 마틴루터는 1517년
10월31일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크 성의 정문앞에 붙였고, 이것이 큰 파문을 일으켜 마침내 종교개혁의 발단이 되었다.
사실
이 95개 조항은 라틴어로 씌여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읽을 수가 없었으므로, 학문적 토론을 위한 목적이었으며, 교황이 이것을 소상히 알게
되면 이 악폐들을 수정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 씌여졌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 이상으로 이 95개 조항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그리고 곧 잉골슈타트 대학의 신학교수이며 루터의 친구였고, 유능한 "요한 마이어 엑크"에 의하여 논문의 응답을 받게 되며, 루터는
이단으로 기소되어진다. 루터는 이 유능하고 논쟁적인 적대자에게 "면죄부와 은총"이라는 제목으로 자기 입장을 응답하였고, 1518년 초에는
교황청으로부터 겸직 직분을 받아낸 대주교 알브레흐트와 도미닉의 수도사들에 의하여 공식적인 고소가 로마에 제기되어진다.
1518년
8월 초, 루터는 60일 이내로 로마로 출두하도록 소환을 받는다. 그러나 만일 마틴루터는 그의 영주이며 선제후 프리드리히의 강력한 보호를 받지
못하였다면, 그는 곧 정죄를 받게 되며 종교개혁은 없었을 것이다. 프리드리히가 언제부터 마틴루터를 대견스럽게 생각하여 그를 보호하였는지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는 루터를 로마로 보내기를 거절하게 된다.
그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였던 막스밀리안은 곧 죽을 것 같았고,
황제선출의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교황 레오10세는 이탈리아의 영주로서 스페인의 챨스나 프랑스의 프린시스가 후보로 나서는 것을 상당히
불편하게 생각하였고, 차라리 프리드리히가 선출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즉 교황은 프리드리히가 총애하는 교수, 마틴루터를 적극적으로 고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1520년 루터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세가지의 저서였다.
"독일 귀족에게 고함"이라는 첫 번째 책은 독일어로
씌어져 독일전역에 퍼졌다. 이 책에서 만인사제권의 진리가 공표되고, 교황만이 성서해석권을 가진다는 성벽을 넘어 뜨리며, 개혁을 위한 참된
공의회에 대해서 언급되어지게 된다.
두달후 "교회의 바빌론 유수"라는 책에서 성례전을 거침없이 공격하게 되며, 성경은 오직 성찬과
세례의 두가지 성례만을 인정한다고 주장하였다.
세 번째 글인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그리스도인은 자유하므로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갖는다고 주장하며 레오10세 교황에게 보내는 공개편지가 씌여진다.
그때 까지만 해도 루터는
교황이 자신을 오해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그의 공개편지는 교회에 대한 존경과 예의를 갖고 잇었으며, 교황을 "이리 속의 양"이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는 교서를 보내며, 1520년 12월10일, 루터는 그 파문장과 교회법령을 학생과 시민이 보는 자리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운다.
마침내 막스밀리안 황제가 죽자, 그 손자 챨스 5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진다. 새 황제는 독일의 통치를
조정해야 했고, 부분적으로 이탈리아에서 벌어질 프랑스와 스페인의 세력싸움을 준비하기 위하여, 1521년 1월 보름스 국회를 소집하는데, 교황청의
입장에서는 다른 사무적인 일도 많았지만 특히 루터문제를 가장 먼저 해결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므로 황제를 설득하고 있었다. 교황청에서 루터는
이미 정죄되고 파문되었으므로, 이 판결만 유효하게 되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챨스 황제는 상당히 망설이게 되었다. 루터는
이미 폭넓은 대중적인 지지를 갖고 있었고, 그의 통치자인 선제후 프리드리히는 대단한 세력을 가진 외교가이었으며, 몇몇 독일 귀족들까지 합세하여,
루터가 자기 의견을 충분히 설명할 기회가 없었으므로 의회 앞에서 진술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 황제는 독일인의 감정을
거스리면서까지 루터를 반드시 정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바보는 결코 아니었다.
결국 황제의 안전운행증을 가진 루터는 황제와 의회
앞에 출두하게 된다.
루터에게 자기의 책을 취소할 수 있는 기회와 시간적인 여유가 주어졌다.
그는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얼마든지
죽일 수 있는 절대권력 앞에 서있었고, 자신의 책들의 내용을 취소하면 살려주겠다는 요청을 받고 있었다. 그는 생각할 하루의 시간적 여유을
받는다. 그는 결국 다음날 황제와 의회 앞에서 심금을 울리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나는 달리 말할 수 없다. 나는 여기에 서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는 결국 "성서적 논증과 명확한 추론"에 의한 자신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고, 그가 확신하는 진리에
대해서 위대한 역사적인 증언을 말하게 된다. 결국 황제는 그의 토론을 중단시키고 만다. 그러나 방청자의 판단은 두가지의 분류로
나누어진다.
많은 독일귀족들은 호의적인 인상을 갖게 되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루터를 위하여 적극적으로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외로운 개혁자 루터는 황제 앞에서 결국 패배하였다. 그는 이단자와 반역자로서 추방되어 곧 체포되고 처형되고, 그의 책들은 모두
불태워져야만 했다. 그는 결국 제국으로부터 추방되었는데, 그것은 결국 그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선제후이며 현자(賢者)인
프리드리히는 그들의 심복들을 시켜 마틴 루터를 비밀리에 납치하여, 아이제나하 근처의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보낸다.
신성로마제국의
중앙통치방식이 아직 독일에 강력하게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로부터 9개월 동안 루터는 작센 선제후(選帝侯)의 비호 아래
바르트부르크성(城)에서 숨어 지내면서, 신약성서의 독일어 번역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독일어 통일에 크게 공헌하였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루터는
비텐베르크로 돌아와서는 새로운 교회 형성에 힘썼는데, 처음에는 멸시의 뜻으로 불리던 호칭이 마침내 통칭이 되어 "루터파 교회"가 성립되었고,
마침내 구교와 신교가 갈라지는 종교개혁이 시작된다.
그러나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서
신앙적 입장을 취함으로써 이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 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서강의 ·설교 ·저작 ·성서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게 된다.
그의 업적은 대부분 문서 형태로
남아 있어, 원문의 큰 책이 100권(바이마르판 루터전집)에 이른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하여》(1520)는 《로마서
강의》(1515∼1516)와 함께 초기의 신학사상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루터는 상황 속에서 자기를 형성하고 발언하는 신학자였기 때문에, 만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저서와 강의를 통하여 그의 사상을 남김없이 토로하였다.
그는 신학의 근거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신의 철저한
은혜와 사랑에 두고, 인간은 이에 신앙으로써 응답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하느님께 반항하고 자기를 추구하는 죄인이지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를 용서받고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섬기는 종’이 되는 것이며, 신앙의 응답을 통하여 자유로운 봉사, 이 세계와의 관계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면에서는 특히 모든 직업을 신의 소명(召命)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 것이, 그 이후의 직업관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더욱이 이러한 견해는 성서에만 그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실천한 것도 중요한데, 1525년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당시의 정치적 ·사회적 정세 속에서 이러한 신앙적 주장을 관철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인데,
캘빈이나 다른 종교개혁자와 함께 종교개혁을 르네상스와 함께 근세에의 전환점으로 만들었다.
95개
조항
다음은 루터가 1517년 만성절(All Saint's day)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 앞에 걸었던 95개 조항을 번역한
것이다. 라틴어로 씌어진 이 95개 조항은 독일어로 번역되어 독일전역에 인쇄, 배포되었고 마침내 종교개혁의 불길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 1 5 1 7 - Disputatio pro declaratione virtutis indulgentiarum
진리에 대한 사랑과 열정으로부터 그리고 그것을 밝게 드러내려는 열망에서 아래의 논제들은 문학석사이며 신학석사인 말틴 루터에 의하여
비덴베르크에서 공개적으로 논의될 것이다. 루터는 그곳에서 이 주제들에 대하여 강의를 하도록 공식적으로 임명 받은 바 있다. 그는 직접적으로
토론에 참여 할 수 없는 자들에게는 서신으로 토론하기를 요청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1. 우리들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마4:17)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신자들의 전생애가 참회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 이 말씀은 하나님께 드리는 성례전적 참회 곧 사제의 직권으로 수행하는 고백과 속죄로서 이해할 수는 없다.
3. 그러나
이 말씀은 다만 내적인 회개만을 뜻한 것은 아니다. 그럴수도 없다. 만일 그같은 내적 회개가 육신의 여러 가지 정욕을 외적으로 억누르지 못한다면
그 회개는 무가치한 것이다.
4. 그런고로 사람이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한에는 (참 내적 참회를 계속하는 한에는) 형벌이 계속될 것이다.
즉 우리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5. 교황은 그가 그 직권 혹은 교회법의 위세로 부과한 형벌 이외에는 어떤 벌이든지
용서할 권세나 의지(意志)를 가지지 못한다.
6. 교황은 하나님께서 죄를 사하였다는 것을 선언하거나 혹은 시인하는 이외에 어떤 죄든지 사할
힘이 없다. 기껏해야 그는 그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들만을 사할 수 있을 뿐이다. 이런 경우에 있어서도 만일 그의 사죄하는 기능이 업신여김을
당하게 될때 사함 받았다는 죄는 확실히 그대로 잔재할 것이다.
7.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행자인 사제의 권력에는 전적으로 복종하면서도 그밖에
다른 모든 일에 대해서는 겸손할 줄 모르는 자의 죄를 결코 사하지 않으신다.
8. 참회에 관한 교회법은 산 사람에게만 부과되는 것이며
임종에 처한 사람에게는 어떤 부담이든지 그 법 [제벌(諸罰)에 대한 교회의 규정]에 의하여 부과 되어서는 안된다.
9. 그러므로 교황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께서는 죽음과 곤궁의 경우를 예외로 취급하는 교황의 법령에서 우리들에게 자비를 행하신다.
10. 임종(死)에 처한
자에게 대하여 연옥 문제를 내세워서 종교상의 속죄를 보류하는 사제들의 행위는 잘못된 것이며 무지하고 어리석은 짓이다.
11. 종교상의 벌을
연옥의 벌로 변경시키는 "가라지"는 확실히 감독들이 잠자는 동안에 심어진 것이라고 보인다.(마13:25)
12. 종전의 예로서 종교상의
벌은 진실한 회오(悔悟)의 증거로서 사면의 후자(後)가 아니라 전에 부과되었던 것이다.
13. 임종에 처한 자는 죽음으로써 자유롭게 되며
교회 법령의 여러 요구에 대하여 이미 죽은 것이 되고 그 법령의 형벌에서 정당하게 자유 해방된다.
14. 죄로 말미암아 죽음에 이르는
사람의 심령의 불완전한 건강과 사랑은 반드시 큰 공포를 초래할 것인데 그 불완전성이 크면 클수록 더 공포가 따를 것이다.
15. 이 불안과
공포만으로도 (다른 것은 말하지 않는다 치고라도) 연옥의 고통을 구성한다. 그 고통은 절망의 공포에 매우 가까운 때문이다.
16. 지옥과
연옥과 천국의 다른 점은 절망의 상태와 절망에 이르는 상태와 구원의 확실 성과의 차이와 같다고 볼 수 있다.
17. 연옥에 가있는 영들은
공포의 감소와 사랑의 증가를 확실히 체험할 것이다.
18. 이상의 영들이 공적의 상태나 사랑의 증가 상태 밖에 있다는 것은 이성으로나
성서적 근거로 증명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인다.
19. 구원의 축복의 정확성과 확실성에 관하여서 우리들은 아무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고 할
것이로되 연옥에 있는 영들의 대부분을 위하여서는 증명할 수 없는 것같이 보인다.
20. 그런고로 교황이 "모든 죄의 완전한 사면"을 말할
때 그는 단순히 모든 죄의 용서를 뜻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그 자신에 의해서 부과된 죄의 사면을 의미하는 것이다.
21. 그러므로 교황의
면죄로써 인간은 모든 형벌로부터 해방되며 구원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선전하는 면죄증 설교자들은 모두 오류에 빠져 있는 것이다.
22.
사실상 교황은 연옥에 있는 영혼에 대해서 어떤 형벌도 사할 수 없다. 이 형벌은 교회법에 의하여 현세에서 받아야만 하는 것이다.
23.
만일 누구에게든지 모든 형벌의 전적 사면이 허락된다면, 그러한 사면은 확실히 가장 완전한 사람 즉 극소수의 사람에게만 주어진다.
24.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형벌로부터 해방된다는 무제한되고 어마어마한 약속에 의하여 드러내놓은 사기를 당하고 있는 것이다.
25.
교황이 연옥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가진 것과 같은 권위를 모든 감독과 특히 교구목사는 자기의 감독구나 교구 안에서 가지고 있는
것이다.
26. 교황이 열쇠(천국)의 힘으로써가 아니고 (사실 그와같은 힘이란 이런 경우에는 아무 필요도 없지만),대도(代禱)의 방법으로
영혼들에게 사죄를 허락한다는 것은 아주 잘하는 일이다.
27. 연보궤 안에 던진 돈이 딸랑 소리를 내자마자 영혼은 연옥에서 벗어나온다고
말하는 것은 인간의 학설을 설교하는 것이다.
28. 돈이 연보궤 안에서 딸랑 소리를 낼 때 이득과 탐욕이 증가한다는 것은 틀림없다. 동시에
성직자의 대도(代禱)의 응답 여부는 하나님의 선한 뜻에만 달려 있는 것이다.
29. 마치 성 세베린(St. Severin)과
파스칼리스(Paschalis)에 관한 전설에 있는 것과 같이 연옥에 있는 모든 영혼이 그곳으로부터 구원받기를 원하는지 어떠한지를 그 누가 알
것인가!
30. 누구든지 자기 참회의 진실성에 대해서도 확신을 못가지는데 하물며 남의 죄가 완전한 사면을 받았는지를 어떻게 밝히 알 수
있을 것인가.
31. 진실로 회개한 사람이 드문 것같이 면죄증을 진심으로 사는 사람도 드물다. 말하자면 그러한 사람은 거의 없는
것이다.
32. 면죄증서에 의하여 자신의 구원이 확실하다고 스스로 믿는 사람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과 함께 영원히 저주를 받을
것이다.
33. 교황의 사면을 가리켜서 인간이 하나님과 화해되는 측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특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된다.
34. 왜냐하면 이 사면의 은총은 인간에 의하여 정해진 예정적인 사죄 행위의 형벌에만 적용되기 때문이다.
35.
연옥으로부터 영혼을 속량한다거나 고백장(즉 참회사-고백을 받는 신부)를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수있다는 허가:역자주)을 사는 사람은 참회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자는 비기독교적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다.
36. 어떠한 크리스챤이고 진심으로 자기 죄에 대해서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은
면죄증서 없이도 형벌과 죄책에서 완전한 사함을 받는다.
37. 참다운 크리스챤은 죽은 자나 산 자나 면죄증이 없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와 교회의 모든 영적 은혜에 참여하는 것이다.
38. 그러나 교황이 주는 면죄와 그의 관여를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미 말한 대로 (제6논제 참조) 그것은 하나님의 사면의 선언이기 때문이다.
39. 면죄증에 대한 관대한 생각과 참다운 회개의 필요성을
동시에 사람들에게 권장한다는 것은 박식한 신학자에게 있어서도 매우 어려운 일이다.
40. 참다운 회개는 형벌을 달게 받는다. 그러나
면죄증에 대하여 관대한 것은 형벌을 등한시하게 하고 슬퍼하게 하며,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와 같은 기회를 주는 것이다.
41. 사도
계승의 면죄(교황의 사면을 의미함)는 사람들이 결코 그것을 사람의 다른 선한 일(선행)보다 더 중요한것 같이 오해하지 않도록 신중하게 설교하지
않으면 안된다.
42. 면죄증의 구입을 자선사업과 비교하여 생각한다는 것은 교황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크리스챤에게 가르쳐야
한다.
43.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고 필요한 사람에게 꾸어주는 것이 면죄증을 사는 것보다도 선한 일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4. 왜냐하면 사랑은 베푸는 이로써 성장하고 그 인간은 선을 행하는 사람보다 선하게 되지만, 면죄증으로써는 인간이 보다 선하게
되지 못하고 다만 형벌로부터 보다 자유롭게 되는 것뿐이다.
45. 가난한 사람을 보고도 본체 만체 지나쳐 버리고(요3:17참조) 면죄를
위해서 돈을 바치는 사람은 교황의 면죄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6. 풍부한
재산의 여유를 가지지 못한 자라면 자기 가족을 위하여 필요한 것을 저축할 의무가 있으며(딤전5:8) 결코 면죄증 때문에 낭비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7. 면죄증을 사는 것은 (사고 안사는것은)자유로운 일이요 결코 그렇게 하라고 강요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8. 교황은 면죄증을 주는 일에 있어서 가져오는 돈보다도 오히려 자기를 위해 경건한 기도를 드리는 것을
필요로 하고 바란다는 것을 크리스찬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49. 교황의 면죄증은 사람들이 만일 그것에 신뢰를 두지 않는다면, 유용하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잃는 있다면 매우 해로운 일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0.
만일 교황이 면죄증 설교자들의 행상 행위를 안다면, 자기 양의 가죽과 살과 뼈로서 성 베드로 성당이 세워지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것을 불태워 재로
만드는 것을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1. 어떤 면죄증 설교자들에게 돈을 빼앗긴 많은 사람들에게 교황은
필요하다면 성 베드로 성당을 팔아서까지라도 그 자신의 재산으로 갚아주려고(당연하기는하나) 한다는 것을 크리스챤들에게 가르쳐야 한다.
52.
면죄증서로 구원받을 것을 신뢰하는 것은 헛된 것이다. 비록 판매 위탁자, 아니 교황 자신이 그 증서에 대해서 자기 영혼을 걸고 보증한다 하더라도
그렇다.
53. 면죄증 설교로 인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다른 교회에서 아주 잠잠하여 지도록 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교황의
적이다.
54. 설교하는 데 있어서 면죄증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시간 또는 보다 더 긴 시간을 쓰는 것은 그 말씀에 대하여 부정을
행하는 것이다.
55. 만일 매우 적은 가치만을 지닌 면죄증이 하나의 '방울'과 행렬과 의식으로써 축하하게 된다면 가장 큰 가치를 지닌
복음은 백 개의 방울과 백가지 행렬과 의식으로써 찬양해야 된다는 것이 교황의 의사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56. 그것으로써 교황이 면죄증을
주는 교회의 보화는 그리스도인 가운데서 충분히 표시되지도 않았고 알려지지도 않았다.
57. 그것이 현세적인 보화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한
일이다. 왜냐하면 많은 설교자(면죄증 판매인)들이 이와 같은 보화를 쉽사리 분여(分與)하지않고 도리어 쌓아 두려고만 했기 때문이다.
58.
또 그 '보화'는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공로도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을 교황의 도움과 전혀 독립적으로 항상 속사람에게는 십자가와 죽음과 지옥을
주기 때문이다.
59. 성 로렌티어스(St.Laurentius)는 가난한 사람들은 교회의 보배라고 말했지만, 그는 그 시대 그 당시에
사용된 어의에 따라 말한 것이다.
60.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주어진 교회의 열쇠가 바로 그 '보화'라고 우리가 말해도 합당할
것이다.
61. 왜냐하면 형벌과 보유사건의 면죄를 위해서는 교황의 권능만으로도 충분하다는 것이 명백한 일이기 떄문이다.
62. 교회의
참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의 가장 거룩한 복음이다.
63. 그렇지만 이 '보화'가 먼저 된 것을 나중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증오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마19:30; 20:16; 눅13:30 참조)
64. 그와 반대로 면죄증의 '보화'가 나중 된 것을 먼저
된 것으로 하기 때문에 매우 애호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65. 그러므로 엣날에 있어서 복음의 '보화'는 돈 많은 사람들을 낚던
그물이었다.
66. 면죄증의 '보화'는 오늘날에도 그것을 가지고 사람의 재산을 낚는 그물이다.
67. 면죄증 설교자들이 '가장 큰
은총'이라고 소리높여 부르짖는 면죄증은 이익을 증가시키는 한에서는 사실인 것처럼 보인다.
68.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총과 십자가의 경건에
비하면 그것은 참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69. 감독들과 교구목사들은 사도 계승의 면죄의 대리자들을 전적인 경의를 가지고 받아 들일
의무를 가지고 있다.
70. 그러나 일층 더 큰 의무는 눈을 활짝 뜨고 귀를 바짝 기울여서 이들이 교황이 위임한 것 대신에 자기들의 꿈을
설교하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71. 사도계승의 면죄의 진리에 반대하여 말하는 자는 추방과 저주를 받을 지어다.
72.
그러나 다른 한편 면죄증 설교자들의 해롭고 뻔뻔스런 말에 대항하는 자는 복이 있을 지어다.
73. 어떤 방법으로든지 면죄증 판매를
방해하고자 하는 사람에 대해서 교황이 책망할 것은 당연하다고 하지만!
74. 면죄증을 구실삼아 거룩한 사랑과 진리를 방해하려고 기도하는
사람에게 대해서 교황은 한층 더 심한 분노로 임할 것이다.
75. 교황의 면죄증에도 대단한 능력이 있어 - 불가능한 말이기는 하지만 -
하나님의 어머니를 능욕한 인간까지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신빠진 생각이다.
76. 그와 반대로 교황의 면죄증이 가장 작은
죄라 할지라도 그 죄책에 관하여서는 없이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은 주장한다.
77. 만일 성 베드로가 지금 교황이라 하더라도 면죄 이상의
큰 은총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성 베드로나 교황에 대한 모독이다.
78. 그와 반대로 현 교황이나 또는 다른 어떤 교황이라도
면죄보다 큰 은총 즉 고린도전서 12장에서 가르치는 복음과 여러 가지 능력 또는 병 고치는 은사 등을 가지고 있다고 우리들은
주장한다.
79. 교황의 문장(紋章)으로 장식된 십자가상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똑같은 능력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80. 이와 같은 가르침이 사람들 가운데 선포되는 것을 묵인하는 감독과 교구목사들과 신학자들은 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81. 그와 같은 뻔뻔스런 면죄 설교로 비방과 또는 일반 세인의 의심 없는 날카로운 반대로부터 교황에 대한 존경을 수호하기란
제아무리 박식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쉬운 일이 아니다.
82. 예로써 만일 교황이 베드로 성당에 소비될 썩어질 금전으로 인하여 수없이 많은
영혼을 구원한다고 할 것이면(이것도 구실에 불과하지만) 어찌하여 가장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 이유, 즉 거룩한 사랑과 영혼들의 최고의 필요를
위하여 연옥을 비우지 않는가?
83. 또한 이미 구속받은 사람을 위한 기도는 부당한 일인데 무엇 때문에 죽은 사람의 장례식이나
기년제(忌年祭)를 계속하는가? 또 무엇 때문에 교황은 그런 목적으로 교회에 바친 기부금을 돌려주지 않으며 혹은 그것(기부금)의 취소를 허락하지
않는가?
84. 또는 돈 때문에 불경건한 자와 하나님의 원수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그 경건한 영혼 자신의 필요 때문에 그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를 구해내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교황의 어떤 새로운 신성함인가?
85. 또한 참회에 관한 교회의 법규는 사실상 오랫동안
사용치 않았기 때문에 폐지되고 사문화 되었는데 왜 마치 그것이 아직 효력을 발생하고나 있는 것처럼 아직 돈으로 인한 면죄증 부여를 통하여 구속해
내는 것같이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86. 또한 오늘날 제일 부자의 재산보다도 더 많은 재산을 가진 교황이 가난한 신자의 돈으로
행하는 대신 차라리 자기의 돈으로 성 베드로 성당쯤은 세울 수 있지 않은가 ?
87. 또한 완전한 참회로 충분한 사면과 속죄에 대한 편리를
가진 사람들에게 무엇을 사하려 하고 무슨 영적 은혜에 참여를 주려는가 ?
88. 또한 교황이 각 신자에게 사면과 은총의 참여를 지금 하루에
한 번 주는 것을 만일 하루에 백 번 준다고 한다면 교회는 얼마나 더 큰 축복을 얻게 되겠는가? (면죄증에는 그것으로써 한 번만 사죄된다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89. 만일 교황이 면죄증으로써 돈보다도 영혼의 구원을 생각하였다고 본다면, 무엇 때문에 그는 오래 전부터 주어 오던
증서나 면죄증을 정지하는가? 이들은 똑같은 효력을 가졌음에 틀림없지 않은가?
90. 일반 세인이 열거한 반론에 대하여 떳떳한 이유를 들어
해결하지 않고 다만 권력으로만 억압하는 것은 교회와 교황을 원수의 조롱거리가 되게 만드는 일이요, 또 크리스챤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다.
91. 그러므로 만일 면죄증이 교황의 정신과 의도에 따라 선전된다면, 이 모든 문제(Bedenken)는 쉽사리 해결되었을 것이다.
아니 그것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92. 그런고로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평안도 없는데 "평안, 평안"하고 부르짖는 예언자들은 다
물러 가라(겔13:10,16; 렘6:14; 8:11; 살전5:3)
93. 그러나 그리스도의 백성을 향하여 "십자가, 십자가"하고 부르짖는
모든 예언자들은 축복을 받을지어다. (사실)십자가는 없는 것이다.
94. 크리스챤은 형벌이나 죽음이나 지옥을 통하여서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부지런히 따르도록 훈계 받아야 한다.
95. 이같이 하여 크리스챤으로 하여금 위안에 의해서보다 오히려 많은 고난을 통하여 하늘나라에 들어
가는데 더욱 깊은 신뢰를 가지게 하라(행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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