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는 조지아의 붉은 언덕에서 예전 노예의 자녀들과 노예 주인의 자녀들이 형재애로 한 식탁에 앉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알라바마의 인종주의자들이 물러가고 거기서 나의 어린 아들과 딸이 백인의 아들딸들과 형제와 자매로 손에 손을 잡고 살아갈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 말은 마틴 루터 킹 ( 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1963년 8월 28일 미국의 수도 워싱턴DC의 링컨 기념관 앞에 모인 25만명의 군중에게 행한 유명한 연설 ' 나에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I HAVE A DREAM )' 이라는 연설중에 나오는 한 구절 입니다.
그의 이 연설은 지금도 많은 나라의 교과서에 실려 있을 정도로 인권이란 무엇인가 라는 명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해 준걸로도 유명 합니다.
그리고 영어독해를 공부하기에도 무척 좋은 연설문이죠.
워싱턴 링컨기념관 앞에서 연설을 하던 마틴 루터 킹 목사
그는 1929년 1월 15일 미국 죠지아주의 애틀란타에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런 태생은 상당히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죠지아주는 지금도 인종차별이 존재 하는 곳입니다.
인접한 사우스캐럴라이나 주도, 알라바마 와 미시시피, 그리고 루지애나 주는 지금도 남부 특유의 고집과 흑인에 대한 차별의식이 백인들 사이에 잠재하고 있는 뒤떨어진 정신적 문명권을 형성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그는 다른곳도 아닌 인종 차별의 중심지 였던 죠지아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남북전쟁 이후, 차별을 피해 많은 똑똑한 흑인들이 북부나 서부로 이사를 떠나고 남부에 남겨진 흑인들은 대부분 현실에 순응하며 살고자 했던, 새로운 세상으로의 도전을 두려워 했던 순박한 흑인들이 었는데,그는 인종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던 그런 남부의 한복판에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부모의 뜻을 따라 신학교에 입학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에 목회자의 길로 접어 들어 영적인 인생을 살려 했던 어찌보면 평범할수도 있는 젊은이 였습니다.
그런데 시대는 그를 평탄하게 목회자의 길로만 걸어가는걸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1955년, 알라바마주의 몽고메리 시에서 한 상징적인 사건이 발생 합니다.
가난한 재봉사 였던 로자 파크스 라는 어느 흑인 부인이 버스를 탄게 사건의 발단 입니다.
당시의 남부에서 흑인들이 버스를 타려면, 출입구와 가장 가까이 있는 앞쪽 좌석은 백인들에게 양보 하고, 자신들은 버스의 덜컹 거리는 반동이 더 큰 차 뒤편의 좌석에 가서 앉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42세의 파크스 부인은 너무나도 피곤에 지쳐 그만 백인들이 앉아야 하는 앞좌석에 앉아 버렸고, 이를 본 백인 운전사는 그녀에게 버스 뒤로 옮겨 앉을것을 요구 합니다.
너무도 피곤했던 그녀가 이를 무시하고 계속 그 좌석에 앉아 있자 급기야 이 백인 운전사는 경찰에 그녀를 신고 했고 그녀는 체포되어 버리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흑인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 되었던 남부 ( 북부에는 차별이 없는줄 아시는 분들은 아주 큰 착각을 하고 계시는 분들 입니다. ) 에서 그저 작은 사건으로 끝났을수도 있던 이 사건은, 미국 역사에 큰 파문을 던져주는 큰 사건으로 자리매김 하게 됩니다.
그녀의 체포 소식을 접한 흑인인권 운동가들과 여성단체에서 일기 시작한 항의는 급기야 이에 동조한 분노한 흑인들의 버스 안타기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는데, 항의집회를 열 장소로 당시 킹 목사가 담임 목사로 있던 덱스터 침례교회를 선택하게 됩니다.
당시 약관 26세 였던 킹 목사는 파크스부인 사건 조차 모르고 있었던 평범한 목사 였는데, 자신의 교회가 집회장소로 결정되고, 그곳에 모인 군중이 즉흥적으로 그를 흑인 인권신장을 위한 단체의 의장으로 선출하자 다음과 같이 말하며 이를 승낙합니다.
"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면......."
상당히 수동적인 말이죠 ?
사실 그렇습니다.
물론 같은 흑인으로서 차별에 대한 분노가 마음속에 항상 존재했었을 킹 목사 였지만, 자신이 수장이 되어 흑인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 할 것이라는 계획을 전혀 가지지 않고 있던 젊은 목사에게 그런 커다란 사명이 버거웠을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승낙한 그 순간부터 킹 목사는 다른 사람으로 돌변하고 급기야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인권운동가로 기록되게 되는 인생을 살게 됩니다.
어느 컨벤션 센터에서 연설을 하던 그의 모습
그곳에서 행한 그의 즉흥 연설은 많은 사람들의 호응을 받게 되고 흑인인권 운동가로서 그의 존재가 갑자기 전 미국에 부각되기 시작 하면서, 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백인 인종차별주의 자들의 협박이 이어 졌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들의 그런 협박은, 그때까지 수동적이고 확신에 차지 못했던 킹 목사의 의지를 단련시키고 그에게 왜 자신이 그런 사명을 맡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과 일을 행할 용기를 북돋아 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가 훗날 회상한 바에 따르면, 당시 자신이 해야 하는 사명감과 미래에 대한 불확신, 그리고 가족에게 행해지는 백인들의 테러로 불안해 하던 그가 어느날 기도를 하더중,
" 정의와 진리를 위해 일어서라. 내가 항상 네 곁에 있을것이다."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의 임재를 경험하게 되어 두려움을 떨치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 하더군요.
제가 오래전에 읽은 그의 언행중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백인 인종차별 주의자들에 의해 그의 집에서 폭발 사건이 일어 났을때 이를 알고 모여들어 경찰과 대치하고 있던 분노한 군중들을 향해 그가 연설한 다음과 같은 내용 입니다.
" 백인 형제들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줘야 합니다. 증오를 사랑으로 이겨야 합니다. "
인권 운동가이기에 그런 상황에서 이정로 말하는건 당연하고 쉽다고요.... ?
' 증오와 사랑으로 이겨야 한다 ' 라는 말을 한 당시 그는 20대의 젊은이었습니다 .
그리고 폭발사건이 있던 집에는 그의 부인과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딸이 있었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어린 딸의 아버지로서 그런 현장을 목격했을 때 느꼈을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 전 상상이 가고도 남습니다.
다행이 식구들의 생명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지만, 자신을 미워해서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에게 행해진 테러에 그가 어느 정도의 분노를 느꼈을지 상상하는게 어렵지는 않을것 같군요.
보통의 인간이었다면 두려움과 함께 분노를 느꼈을 겁니다.
입으로는 관용과 화해를 주장하면서도 상대 당에서 자신을 비난 하면 머리에 김을 모락모락 피우며 기자 회견을 여네, 성명서를 발표 하네 , 흥분해서 광란을 일으키는 정치인들이 득실대는 세상에서 가족들의 목숨이 위태 로웠던 그 상황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고 오히려 사랑과 용서를 주장하는 그의 인격과 자제심은 존경을 받아도 모자름이 없을 겁니다.
단순히 흑인의 인권신장만을 주장하는 과격한 선동가가 아니라, 스스로 관용과 사랑을 실천하고 그런 철학을 바탕으로 비폭력 인권운동을 주창한 그의 그런 정신은, 많은 흑인들 뿐만 아니라, 백인 지식인들 에게 까지도 영향을 미쳐 저명한 백인 인권운동가나 목회자들도 그의 행렬에 동참하게 됩니다.
특히 흑인들의 인권신장 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억압받는 모든 인류를 위해 투쟁하는 그의 철학과 투쟁에 동조한 많은 백인지식인들의 동참은 그의 인권신장 운동이 이세상 모든 억압받고 차별받는 사람들을 위한 투쟁으로 인정 받게 됨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백인 인권운동가들과 함께 행진하는 킹 목사
그는 그후 미국의 많은 주와 도시를 돌아 다니며 연설을 행하였고 인권이란 무엇인가 하는 주제로 미국인들을 각성 시키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동안 그의 비폭력-온건 노선의 투쟁방식으로 가시적인 효과가 들어나지 않음에 조바심을 낸 다른 흑인들의 백인사회에 대한 과격한 데모가 빈번히 발생하고 급진적인 흑인민권 단체가 발생하기도 했지만, 강경한 요구와 저항 보다는 인간의 이성과 마음에 호소하는 그의 투쟁방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많은 백인들에게 감명을 주게 되었습니다.
급기야 그의 이런 위대한 여정은, 그에게 35세때 노벨평화상이라는 영광을 수상할수 있도록 해주었으며, 그의 명성은 전세계적인 것이 되어 그의 이름은 인권운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허나,
그의 이런 평화적인 투쟁방식이 점점 미국 주류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속에 이해심을 얻어 가자, 이를 못마땅 하게 여긴 백인 우월주의자의 흉탄에 그는 40세의 나이로 운명을 달리하게 됩니다.
후에 암살범이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암살을 사주한 쪽은 미국 국가정보국 (CIA)였다고 하더군요.
마틴 루터 킹의 장례식
그러나 그의 이름은 그의 죽음후에 더 진가를 발휘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죽음으로 흑인들의 분노가 폭발할지도 모른다 걱정하게 된 미국의 연방정부와 각 주정부는 서둘러 이런저런 흑인들의 인권과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법안과 대책을 내놓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미국사회의 중요 구성원으로 평등한 권리를 획득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생일은 미국의 공식 기념일이 되어 지금도 그의 생일날이 되면 이런저런 그와 그의 업적을, 그리고 그가 지향했던 목표에 대한 여러가지 기념행사가 열리고 있습니다.
어제 1월15일 (미국시간)은 그의 탄생기념일 이었습니다.
그의 탄생일을 기리는 많은 주들 중에는 그날이 공식휴일인 주들도 있습니다.
설사 휴일이 아니라 해도 보통 많은 회사에서나 공공 단체에서는 그를 기리는 여러가지 행사가 열리곤 하죠.
제가 다니는 회사에서도 지난 몇주 내내 그를 기리기 위한 행사에 관한 광고가 있었고 오늘은 큰 기념 행사가 열렸습니다.
물론 흑인직원들이 앞장서서 행사를 준비한다거나 그를 업적을 기리지만, 다른 소수인종 직원들과 많은 백인직원들도 모두 합심해서 준비하고 진행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이제까지 미국에 와 살면서 본 그의 기념일은 항상 그리 했습니다.
다른 어느 인물의 탄생기념일 보다도 한 인물의 업적을 기리는데 열성이었습니다.
내심이야 어떻든 그런 일에 관계해야 하는 백인들이 책잡히지 않으려 더 열심히 활동합니다.
미국의 많은 대도시에 가보면, 그 도시의 중심부를 관통하는 중심도로들중 반드시 한 도로 정도는 그의 이름이 붙어 있습니다.
Martin Luther King Blvd , Martin Luther King Ave. , Martin Luther King St. , Martin Luther King Dr. 등등 중심도로중 하나 정도는 반드시 그의 이름을 따 명명 되어 있다는 겁니다.
미국의 도시 어디에서나 흔히 볼수 있는 그를 기념한 거리 표지판
M(artin). L(uther). King Blvd
물론,
흑인들의 입장에서야 그를 위대한 인물로 기억하고 기리고 싶어 할테죠.
그리고 미국정부나 백인들 입장에서도 그는 위대한 인권 운동가가 틀림 없습니다.
허나,
정부나 사회단체에서 그를 기리는 일에 열심인게 반드시 그가 위대한 인물이기에 그런것만은 아닐거다라는 느낌을 가끔 받을때가 있습니다.
흑인과 백인들 사이에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갈등이 존재 하기 때문에 그런 갈등으로 인한 폭발을 미연에 방지 하기 위해 일부러 인내와 사랑 그리고 비폭력을 주장했던 그를 기리는데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는것 같다는 느낌 말입니다.
사실 전세계적으로 살펴보면, 백인계 국가들 중에서 사람들의 속내야 어떻든 소수민족이나 인종에게 법적으로는 가장 너그러운게 미국이기는 합니다.
법률로만 따진다면 사회적으로 가장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나라죠.
(물론, 미국의 외교정책을 보시면 알겠지만, 이런 마음가짐은 자국민에 한합니다......)
하지만 뿌리깊은 인종차별의식이 모든 백인들의 의식속에서 사라진건 절대 아닙니다.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인종갈등도 따지고 보면 그들의 잠재의식속에 자리한 인종적 우월의식에 기인한 경우가 많습니다 .
미국땅에 사는 흑인들과 백인들은, 출발선이 다릅니다.
백인들은 이미 전통과 근대적 문명이 자리잡은 유럽 여러나라에서 온 사람들이고 흑인들은 저문명지대에서 미개적 생활을 하다 미국에 노예로 끌려와 평생을 산 조상을 둔 자손들 입니다 .
쉽게 말해 공평하지 않은 게임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어느 정도 근대문명적인 전통을 기반으로 가족과 후손을 교육시키고 키운 사람들과 그런 전통이 뭔지 조차 모르고 태어나 어느날 갑자기 다른 이들과 똑같이 경쟁사회속에 내 던져진 흑인들의 처지가 공평하지는 않습니다 .
결국 시대가 바뀐 요즘의 미국에서 흑백갈등이 일어나는 주된 요인중의 하나도, 우리는 너희들에게 공정한 기회를 주었고 이젠 경쟁체제이고 평등한 사회니까 너희들도 우리들과 평등하게 경쟁해야 한다는 백인들과, 아직도 이건 불공정한 게임이니까 우리에게 더 기회를 줘야 한다고 요구하는 흑인들과의 갈등이라고 보면 맞을 겁니다.
흑인들의 주장이 저에게는 더 일리가 있습니다.
그들이 평등한 공민권을 획득한게 불과 40년 좀 더되었습니다.
40여년 전에야 비로서 그들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그래서 이제는 국가의 한 구성원으로서 투표권을 행사할수 있다는 도장을 법적으로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나마 공평한 교육의 기회를 받아 사회에 진출해 본격적인 경쟁을 벌이게 된건 그 다음 세대에서나 가능했던 일이었죠.
그런데도 많은 백인들이나 비 흑인계 인종들은 흑인들이 불평만 너무 한다고 생각할때가 많은게 현실 입니다.
밀어주고 끌어주는 사람이 없는 상황에서 다른 이들의 질시와 차별을 감내하며 스스로 전통을 만들어 가며 자력으로 사회의 중심부로 올라가야 했던 흑인들이기에 그들의 출발선이 공평하지 않았다 말하는 겁니다.
그점에서는 오히여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유리합니다.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적 관습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시아계 이민자들은 미국에 와서도 자식들의 교육에 열성을 보였고, 백인들 보다도 유구한 문화적 전통을 자랑하는 사회에서 건너오다보니 흑인들 만큼 차별은 못받았다 하더라도 , 초록은 동색이라는 관점아래 비슷한 아류로 취급 받으며 살다가, 급기야 킹목사의 인권운동으로 촉발된 소수인종에 대한 균등한 기회제공의 여건으로 인해 미국의 주류사회에 쉽게 진입할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러니 비흑인계 소수인종들도 그의 그러한 일생와 업적에 감사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 절대 그럴리가 없다고요 ? 무슨 그런 말을......60년대 이전에 촬영된 헐리우드 영화를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등장하는 미국에 사는 동양사람들의 직업이 무엇인가......)
아무튼........
흑인들에게는 다행이도 킹 목사와 같은 위대한 선각자가 태어난 행운이 따라줬습니다.
덕분에 흑인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진정으로 깨닫고 보다 나은 미래를 향한 준비를 할수 있었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의 이름은 인류의 역사가 존재 하는한 많은 역사책에 이름이 남을 것입니다.
무지하고 가난한 사람들 이라는 흑인들에 대한 세계인들의 편견을 뒤집어 엎어 버린 사람.
제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중의 한명인 그의 생일을 맞아 이런 저런 생각을 한번 읊어 봤습니다.
한국에서도 언젠가 인류의 정신을 일깨워줄 세계적인 인권운동가가 출현 하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리고 한국인 사회에서도 뿌리깊은 비백인계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의식도 개선되었으면 하고 바래봅니다.
평등이란 나와 같은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도,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도, 나와 사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도, 그리고 나와 다르게 생긴 사람들도 공유할수 있는게 평등이라는 단어겠죠.
'평등(平等)' 이라는 단어의 뜻이 무엇인지 진정으로 깨닫는 다면 말입니다.
내가 남보다 더 잘났다고 생각하는 한 절대 이루어 질수 없는게 평등이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 킹 (Martin Luther King Jr. 1929.1.15 - 1968.4.4 )
배경음악
출처:http://www.dearyou.com
작곡자(저작권자) :(주)엔크리에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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