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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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1) ~ (24)

鶴山 徐 仁 2005. 12. 1. 22:15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1)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1)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⑥-4;
 6·15선언 제2항은 무허가 통일방안에 의한 「국가 정체성의 변조」 기도?;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귀하의 조국은 어디인가?
 
 金大中 세력의 대한민국에 대한 도전은 어떻게 저지되었나. 경찰, 검찰, 국정원, 군대의 지휘부는 金大中 세력에게 넘어갔지만 헌법에 기초한 공권력의 작동원리를 정권이 뒤집어 버리기에는 한국사회가 너무 민주화되어 있었다.
 
 방송은 정권의 영향권에 들어갔으나 主流 언론은 사실과 여론과 시장의 힘에 의지하여 정권을 비판하였다. 정권 쪽에 선 다수 사회단체들이 때로는 홍위병 같은 행동을 보였으나 법원의 견제가 들어갔다.
 
 권력남용에 대한 야당의 비판과 견제, 대령연합회 같은 우파 애국단체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親北 좌익세력이 공개적으로 활동하고 이들의 명백한 범법행위에 대해서 金大中 정부가 법집행을 포기한 반면 黃長燁씨의 訪美를 막고 좌익의 訪北은 허용하는 그들의 행태는 침묵하던 다수 국민들을 분노에 떨게 하였다.
 
 이들이 선거를 통해서 보여준 분노는 주류세력의 용기를 확산시켰다. 선거 결과는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구먼. 내가 소수파가 아니라 다수네』 하는 자신감을 주었다.
 
 金大中 세력의 도전에 대한 대한민국 세력(국민, 국군, 헌법, 법원, 핵심 가치관, 경제력 등 대한민국을 구성하는 유무형의 요소들 포함)의 응전, 그 바탕에는 「우리는 그래도 대한민국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자랑스럽습니다. 우리는 대한민국이 고맙습니다」란 생각이 깔려 있었다. 이런 생각이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 월드컵 거리응원의 태극기, 대한민국, 애국가였다.
 
 50여 년간 가시밭길을 헤쳐온 대한민국은 비록 상처투성이지만 이 상처는 갈등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에서 생긴 상처이지 북한동포의 집단 餓死처럼 두 수령에 의하여 저질러진 가학적 테러의 상처가 아니란 점을 우리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상처를 과장하고 그곳을 아프게 찌르기도 하면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부정하려고 애썼던 국내 親北 좌파세력은 金大中 대통령의 퇴임과 함께 退潮期에 들어갈 것이다.
 
 金大中 세력과 金正日 정권의 치명적 약점은 사실과 진실을 끊임없이 부인해야 한다는 부담이다. 대한민국이 정통이고 북한정권은 이단이란 것이 사실이고 진실인데 대한민국을 이단이라고 설명하려면 온갖 거짓과 위선과 선동을 동원해야 한다.
 
 金正日이 악마적 수령이 아니고 효심과 견식을 갖춘 사람이라고 주장하려면 300만의 죽음, 115명의 죽음(대한항공 테러), 17명 한국 엘리트의 죽음(아웅산 테러)은 가짜 金正日이 지령한 것임을 증명해야 한다.
 
 요사이 젊은이들은 인터넷의 도움으로 이런 거짓 선전에 잘 속지 않을 만큼 지식 무장을 하고 있다. 20代를 사로잡는 데 실패한 좌익의 생명은 꺼지는 촛불 신세이다.
 
 대한민국 주류 세력은 李承晩·朴正熙 前 대통령의 영도 아래 역사 흐름의 正道에 서 왔다. 그들은 건국·호국·근대화·민주화의 국가 건설 全과정에서 영욕의 세월을 헤쳐가면서, 主敵과 內敵의 도전을 극복해 내면서 개인과 국가의 발전을 이룩하였다.
 
 그들은 역사의 강물이 양쪽을 가를 때 진실과 합리와 진보의 편에 섰다는 이야기이다. 金大中 세력의 도전과 대한민국의 응전은 그 본질이 진실과 허위의 대결이었다. 어둠의 세계에서는 진실이 허위에게 먹히지만 언론과 인터넷이 활동하는 大明天地에선 진실이 최종 승리자가 될 수밖에 없다.
 
 黃長燁씨가 자신의 著書 제목으로 말한 것 - 「어둠의 편이 된 햇볕은 어둠을 밝힐 수 없다」는 말을 이제 金大中과 金正日에게 돌려줄 때이다. 지난 5년간 마음고생을 많이 했던 대한민국은 金大中에게 질문을 던질 권한이 있다.
 
 
 『귀하의 조국은 어디인가?』
 
 한국의 親北·좌파 세력은 대한민국의 헌법정신과 정통성을 부정하면서도 애국세력을 공격할 때는 대한민국의 법을 이용한다. 애국세력에 대한 이들의 고소·고발 사태가 그것이다.
 
 金大中 대통령은 헌법으로부터 내란 및 外患의 죄를 제외한 일체의 형사 소추를 면제받고 있다. 그런 특권을 누린 대통령이 야당의원의 선거 유세에 등장한 우스개를 고소하는 등 국민에 대한 법적 대응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골문을 막아놓고 對국민 축구를 한 셈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金大中 정권의 구성원들을 상대로 법의 심판을 구해야 할 차례가 되었다. 「대통령이면 대한민국을 상대로 이렇게 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가?」 우리 헌법이 대답할 것이다.
 <22편에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2)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2)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⑦-1;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관;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안기부의 「金大中 관찰기록(1988년판)」
 
 1988년 9월경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안기부의 「金大中 관찰기록(1988년판)」은 국배판 124페이지의 대외비(보존연한은 영구) 문서이다.
 
 이 책의 목차는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1. 身元 사항
 
 1. 인적 사항
 
 2. 출생 및 성장
 
 3. 學·경력
 
 4. 前科 관계
 
 5. 가족 사항(家系圖. 본인 및 처가)
 
 6. 재산관계
 
 7. 인간성
 
 2. 思想 성분
 
 1. 建準 가담 등 좌익 활동
 
 2. 荏子島 간첩 鄭泰默과의 연계 接線
 
 3. 韓民統 결성, 反國家 활동
 
 4.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 주장
 
 5.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주동
 
 6. 기타 문제 발언
 
 3. 조직 관리
 
 1. 조직 현황
 
 2. 조직 특성
 
 3. 私組織 현황
 
 4. 최근 동향
 
 1. 주요 동향
 
 2. 特異 동향
 
 3. 주요 동향 분석
 
 첨부:주요 접촉 인물 현황
 
 
 「金大中 관찰기록」 중 가치 있는 부분만을 골라 아래에서 요약하고 해설한다.
 
 1. 身元 사항
 
 1-1. 인적 사항
 
 일제시대 金大中이 한 創氏改名은 豊田大中, 본인은 생년월일이 1923년 1월6일(양력)이라고 언명, 혈액형은 A형, 영세명은 金토마스, 代父는 張勉 前 국무총리.
 
 1-2. 출생 및 성장
 
 출생:1924년 1월6일 전남 신안군 荷衣面 五村里 132번지에서 張之淑의 장녀 張鹵島의 아들로 출생. 같은 해 金云式의 庶子로 入籍. 1943년 7월10일 광주지법 목포지원에서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3일로 訂正. 1960년 6월5일 父 金云式, 母 張鹵島의 혼인신고로 兩人間에서 출생한 嫡子로 호적 정리. 그러나 金大中의 출생지 주민들에 의하면 金大中은 金云式-張鹵島 사이에서 출생한 것이 아니고 尹○○(편집자가 익명화)와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는 說이 있는 등 그 출생 혈통이 불분명함.
 
 소년기:1939년 3월25일 목포 北橋 국민학교 졸업시 성적은 72명 중 1등. 같은 해 목포 상업중학교 입학. 1학년 때 161명중 1등. 1, 2학년 때 級長. 2, 4학년 때 품행 단정상 수상. 5학년 때 修養위원 겸 문화반 활동. 졸업시 성적 150명(한국인 82명, 일본인 68명) 중 39등.
 
 청·장년기:1945년 4월9일(호적상 19세) 목포시 거주 車寶輪의 딸 車蓉秀와 혼인, 金弘一과 金弘業 출산. 車蓉秀는 1927년 10월26일 출생, 1960년 5월27일 음독자살. 목포여고 출신.
 
 金大中은 1954년 5월20일 목포에서 제3代 국회의원 선거에 무소속으로 출마, 9명 중 5위로 낙선. 낙선 후 서울 서대문구 大峴洞으로 이사. 金哲 등 정치인들과 접촉하는 과정에서 張澤相 前 총리를 알게 되어 측근 참모로 일시 활동.
 
 1955년 소설가 朴花城의 소개로 朴順天 여사, 曺在千 등 야당의원들을 알게 되어 민주당에 입당했다.
 
 1-3 學·경력
 
 1953년 10월10일 건국大 정외과 3년 중퇴, 1964년 9월20일 고려大 경영대학원 연구과정 수학, 1967년 2월20일 경희大 산업경영대학원 수료, 1969년 2월20일 경희大 대학원 경제정책과 수료.
 
 1-6 재산관계
 
 총 42억7,750만원(부동산 20억7,750만원. 동산 22억원)
 
 (편집자 注:李姬鎬·金弘一 및 金弘業 부부 명의의 재산을 포함한 것임)
 
 1-7 인간성
 
 가. 임기응변에 능하고 출세욕이 강하며 信義가 없다.
 
 나. 再婚을 정략적으로 이용.
 
 다. 종교를 편의적 수단으로 이용.
 
 라. 독선적 성격과 폭력적 대중 선동.
 
 마. 집요한 大權 집념.
 
 바. 기회주의적이고 變身의 천재.
 
 사. 학생·노동자 등 자신에게 이익만 되면 받아들이는 정치인.
 
 아. 환경에 적응을 잘한다.
 
 2. 思想 성분
 
 2-1. 建準 가담 등 좌익 활동
 
 ■1945년 8월15일 해방 직후 9월경 건국준비위원회 宣傳責이며 그 후 남로당 선전책으로 암약하던 林永春의 추천으로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시 지부에 가입, 선전책으로 종사하면서 목포청년동맹에 가담 활동 중, 그해 10월경 건국준비위원회와 목포청년동맹이 해체되자 당시 新民黨 목포시당 위원장이며 그 후 남로당 부위원장으로 암약타가 행방불명된 李彩鉉의 추천으로 同黨(신민당)에 입당하여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共産系 행동 전위대원 집단인 민주청년동맹 목포시 위원회에 가입하여 부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盟員 장금성(9·28 수복 후 사망) 등과 당원 徐得均(6·25시 월북) 등에게 국내외 정세 및 공산주의 이론 등 정치학습과 민주청년동맹사업 요지 등을 교양했다.
 
 ■1946년 10월31일 목포 경찰서 南橋洞 파출소 등 경찰관서를 습격하여 경찰관을 살해하고 파출소를 방화 소실케 한 소위 「목포시민 항쟁의 날」 폭동사건을 민주청년동맹 부위원장의 지위에서 배후 조종한 혐의로 목포 경찰서에 체포되어 10여 일간 구속 조사를 받던 중, 당시 한민당 목포시당 부위원장이던 당시 장인 車寶輪의 신원보증으로 「다시는 좌익단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 후 訓戒 방면됨.
 
 ■1949년 2월경 사상적으로 전향한 양 보도연맹 목포시 지부에 가입하여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던 중, 전남 신안군 荏子面 출신으로서 남로당 섭외부원 겸 민주주의 민족전선 부위원장으로서 지하에서 암약중이던 兪在植에게 同人의 당 연락 활동과 관련한 上京 여비 등 활동자금을 제공하여 전남도 경찰국에 체포되었다. 그는 10여 일간 구속조사를 받던 중 당시 해군 목포헌병대장이던 朴成哲(前 金大中 경호실장)의 신원보증으로 방면되고서도 목포시내 세포 조직에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그 후 보도연맹으로 被檢, 我軍 후퇴시 美 CIC에 의해 사살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金眞夏(목포상업中 선배)의 호명착오로 救命되었으며 1950년 6월25일 당시 목포인민위원회 창설 활동, 부채 및 체불 노임 횡령 사건으로 목포 교도소에 수감, 9·28 수복시 탈옥했다.
 
 
 필자의 검토:「호명착오로 救命」 부분은 과연 사실인가
 
 김진하씨의 「호명착오」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기록으로는 알 수가 없다. 지금 워싱턴 근교에서 살고 있는 김진하씨의 이름은 金大中씨와 관련하여 관계자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있다. 워싱턴에서 활동하는 김영훈 목사는 1995년 현지 한국어 신문에, 일본 산케이 신문 칼럼니스트 시바다 미노루(紫田穗)는 1980년 7월호 일본 잡지 「中央公論」에 金大中씨가 보도연맹원 집단 처형 직전에 김진하씨의 도움을 받아 살아났다는 요지의 글을 썼다.
 
 안기부의 「金大中 관찰기록(1988년판)」 내용은 안기부 내부에서 존안되어 온 정보인데, 시바다씨의 글이 이 정보를 근거로 했을 가능성은 있다. 김영훈 목사는 별도로 김진하씨를 만나서 증언을 들은 뒤 썼다고 한다. 김진하씨가 말한 요지는, 6·25 남침 직후 목포에서 보도연맹원(전향한 前 좌익활동가들) 소집과 집단처형이 있을 때 창고에 갇혀 있던 金大中씨를 당시 영어교사이던 자신이 찾아가 자신의 명찰을 주면서 『金大中을 호명할 때 나서지 말고 이 명찰을 보이면서 사람을 잘못 끌고왔다고 이야기하라』고 하여 救命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金大中씨는 그러나 일관되게 자신은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서울에 있었다고 말해 왔다. 그는 또 인천상륙 직후 목포가 수복되었을 때 자신은 인민군한테 구속되어 감옥에 있다가 탈출했다고 말했다. 안기부 기록을 보아도 金大中씨가 목포 교도소에 수감된 것이 인민군에 의한 것인지, 국군에 의한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목포인민위원회 창설활동이 구속의 이유라면 국군에 의한 구속이란 말이 된다. 그렇다면 목포가 敵의 治下가 되어 있던 약 두 달간 목포 교도소에 계속 갇혀 있을 이유가 없다.
 
 인민군이 金大中씨를 구속했다면 金大中씨의 우익활동 때문이든지 다른 非理念的 범죄 때문일 것이다. 金大中씨는 우익 활동을 한 적이 없다. 그렇다면 안기부의 金大中 기록에 쓰여진 대로 「부채 및 滯拂 노임 횡령」으로 인민군이 金大中씨를 구속한 것인가. 현재는 이런 의문과 가능성을 제기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할 것 같다.
 
 안기부(현재는 국정원)에 좀더 명확한 증거물이 확보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예컨대 김진하의 자필 진술서나 보도연맹 사살대상자 명부 같은 것), 이 기록만으로는 金大中씨가 주장해 온 것을 결정적으로 뒤집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23편에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3)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3)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⑦-2;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관;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2-2 荏子島 간첩 鄭泰默과의 연계 接線
 
 ■金大中은 鄭泰默과 목포상업중학교 동창으로 鄭泰默의 1년 후배이다. 鄭泰默은 목포상업중학교 재학시 金大中의 장인 車寶輪의 집에서 2년간 하숙 생활을 한 관계로 金大中 처 車蓉秀 등 처가 식구와는 한집안같이 친숙한 관계.
 
 ■8·15 해방 후 金大中은 鄭泰默과 목포 공산청년동맹원으로 활동타가 1946년 남로당 활동을 일단 청산(편집자 注:金大中씨는 1946년까지 남로당의 前身인 신민당 목포지구당의 간부로 일했던 것이지 남로당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로당은 1946년 가을에 조선공산당, 인민당, 신민당이 3당 합당하여 탄생했으므로 「1946년에 남로당 활동을 일단 청산했다」는 기록은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金大中씨가 신민당에서 남로당으로 넘어갔다는 확증은 없다).
 
 鄭泰默은 1949년 9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서울지법에서 재판에 계류 중 6·25 전쟁으로 북괴군에 의해 석방되었다. 1953년 3월 다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7년이 확정되어 1960년 5월30일에 滿期 출소했다.
 
 ■그는 1965년 4월25일 오전 9시경 實弟인 鄭泰然의 안내를 받아 전남 무안군 임자면 삼두리 후면 해안에서 대기 중이던 북괴 공작선과 접선, 공작선을 타고 北上하여 그 다음날 밤 9시 진남포에 도착하였다.
 
 ■그는 평양시 교외 초대소에서 북괴 노동단 간부로부터 밀봉 수용되어 암호지령 방송의 청취 방법 등을 교육받은 후 노동당에 입당했다. 그는 포섭대상자로서 金大中, 金商玉, 朱燾允, 劉沃祐, 裵吉道 등의 성명·직책·친분관계 등을 기록하여 교부했다.
 
 ■1965년 4월30일 진남포를 통해서 돌아온 그는 1967년 4월22일 저녁 6시경 목포 소재 비원 다방에서 朴信奎와 만나 신민당이 승리하도록 지원하라는 중앙당의 지령을 전달한 다음, 대통령에 尹潽善, 국회의원에 劉沃祐, 金大中을 당선시키도록 공작할 것을 지령했다.
 
 ■鄭泰默은 1961년 당시 민주당 대변인 金大中을 서울 무교동 2층 다방에서 15년 만에 우연히 재회했으나 金大中은 냉담한 태도였다. 1963년 제6代 선거시 金大中이 정○○(사망)을 시켜 鄭泰默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鄭泰默은 2년 전 재회시의 金大中의 냉담한 태도에 감정이 상해 있었기 때문에 거절당했다.
 
 ■1967년 5월 金大中이 목포시 죽동 소재 한일여관으로 鄭泰默을 방문하여 선거전략의 지원을 요청하였다. 鄭泰默은 두 차례 선거전략을 告知했다. 金大中은 鄭泰默이 직접 선거운동을 하여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鄭泰默이 가르쳐 준 선거전략 중에는 「여당의 金力 공세를 막으려 애쓰지 말고 그대로 방임하면 효력이 감소한다」, 「선거유세시 官을 자극시켜 탄압을 유인함으로써 동정표를 흡수할 것」 등이 있었다.
 
 ■鄭泰默은 金大中이 국회의원 당선 후인 1968년 2월경 위장 사업체인 三創産業 운영 공작금을 조달하기 위해 金大中에게 전화를 걸어 300만원의 은행융자를 요청했으나 金大中은 2~3개월 기다려 달라고 한 후 연락이 끊겼다.
 
 ■鄭泰默 등 16명은 荏子島 간첩사건으로 1968년 7월에 구속되어 주범인 鄭씨는 1972년 7월28일에 사형이 집행되었다.
 
 (편집자 검토:위의 기록은 金炯旭 부장의 정보부가 수사한 荏子島 간첩사건의 기록에 의존하여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金大中씨가 鄭泰默이 간첩인 줄 알고 접근했다는 증거는 없다. 다만, 북한 정권이 남로당 출신을 통해 金大中씨를 포섭대상으로 삼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3. 韓民統 결성 및 反國家 활동
 
 ■1973년 8월4일 金大中은 東京에서 북괴 선전활동 및 民團 파괴공작을 일삼는 소위 「베트콩파」인 在日동포 裵東湖, 金載華, 郭東儀, 金鍾忠, 趙活俊 등과 反國家단체인 韓民統 일본본부를 구성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을 의장으로 한 임원선정 및 정강정책을 확정 후 8월13일 귀국했다.
 
 ■1978년 6월 대법원에서 韓民統 일본 본부와 연계된 재일동포 金整司 간첩사건 재판시 韓民統 일본본부가 反國家 단체로 규정된 사실을 알았음에도 1980년 3월 同 의장직 사임시까지 韓民統 일본 본부의 구성 주체로 활동했다.
 
 ■조총련 핵심 간부 金鍾忠 등으로부터 지원받은 일화 총 4740만 엔 중 「韓民統(한국민주회복 통일추진국민회의)」 결성자금으로 1740만 엔을 사용하여 각종 강연, 기자회견 등 反정부 활동을 전개했다. 韓民統의 핵심 구성원들은 조총련의 배후조종을 받아 북괴를 왕래한 바 있는 사람, 조총련의 지령을 받아 민단조직을 파괴하고 북괴 선전활동을 하다가 그 정체가 탄로되어 民團에서 축출된 사람들이다.
 
 (편집자 검토:위의 내용은 대부분 1980년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때 작성된 재판자료 속에 있는 정보들로서 새로운 것이 없다)
 
 2-4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 주장
 
 ■金大中의 주장 내용:하나의 연방 아래 두 개의 독립된 공화국 형태를 취하는 것이 우선 가능하고 북한 공산정권의 존립을 법적으로나 사실적으로 확인하는 동시에 남한에 있는, 민주정부의 존립도 완전히 보장받아야 하며 양 공화국은 서로 이해, 신뢰, 평온의 증진에 따라 합의된 만큼의 권한을 중앙연방에 점차적으로 이양해 감으로써 종국적이고 완전한 통일에 이르는 순서를 밟는 것이 합리적이고 실현가능하다고 주장, 북괴의 고려연방제와 흡사함.
 
 ■고려연방제의 저의는 감상적 통일 논의를 유발하여 반공체제를 약화시키고 聯共합작의 기반을 확대함으로써 駐韓미군 철수 촉진 및 韓美합동 공동 방위업체(「체제」의 誤記인 듯)를 와해시키려는 것이다. 이는 평화통일을 표방하여 남북한에 통일전선을 형성하여 흡수통합을 추진하려는 전략이다.
 
 2-5.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主動
 
 ■생략(이미 공개된 재판자료 및 발표문 수준).
 
 3. 조직 관리
 
 3-1. 조직 현황
 
 ■공조직은 평민당으로서 국회의원 71명, 전국 166개 지구당에 당원 100만여 명.
 
 ■사조직은 국내 11개(民靑聯 등) 회원35만여 명, 국외 7개(한국인권문제연구소 등) 회원 260여 명.
 
 ■조직특성은 대권장악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적 전위조직과 지원조직으로 이원화. 공산당式 당조직 형태로 결성, 非노출 지하조직. 각 조직은 표면상의 역할 분담에도 불구, 내부적으로 金大中을 정점으로 한 일사불란한 상호 연계체제 유지.
 
 ■호남지역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재야, 종교, 학원, 노동 등 각 분야 불만세력들을 포섭, 지원세력으로 활용. 사회 부랑아들도 다수 포함시켜, 유사시 정치테러 조직으로 활용 예상.
 
 4. 최근 동향
 
 ■생략(거의가 공개된 활동의 요약임)
 
 이 문서의 끝에는 「첨부: 주요 접촉 인물 현황(1988.5.1-현재)」이란 자료가 붙어 있다.
 
 국내 인물로 盧泰愚(당시 대통령), 李賢宰(국무총리), 裵命仁(안기부장)이 필두에 올라 있다. 제1야당의 총재로서 당연히 접촉해야 할 인물이다. 다른 명단도 그런 수준의 의미 없는 것들이다. 관료적 타성에 젖은, 창의성이 전혀 없는 기관이나 사람이 만든 자료 같은 느낌을 준다.
 <24편에 계속>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4)
趙甲濟   
 조갑제의 김대중 연구(24)
 
 미공개 자료를 중심으로 쓰는 김대중 연구⑦-3; 좌익 행동대원 출신의 대한민국관;
 
 趙 甲 濟 月刊朝鮮 편집위원
 
 
 
 「金大中 관찰기록(1987년판)」 내용 요약
 
 1987년 1월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金大中 관찰기록」(이하 「1987년판」이라고 한다)은 1988년판의 약 네 배 분량이다. 536페이지의 이 책자 목차는 이렇게 되어 있다.
 
 1. 身元 사항
 
 1. 인적 사항
 
 2. 출생 및 성장
 
 3. 학력 및 경력
 
 4. 종교
 
 5. 前科 관계
 
 2. 金大中 정치입문 과정 및 정치활동 경력
 
 1. 정치입문 과정
 
 2. 정치경력
 
 3. 思想 성분
 
 1. 좌익단체 가담활동
 
 2. 荏子島 간첩 鄭泰默과의 연계 접선
 
 3. 美日 등 해외에서 韓民統 결성, 反 國家 활동
 
 4. 金大中 여성 遍歷 및 李姬鎬와의 再婚 경위
 
 5. 金大中의 奸巧, 詐術的 행각 등 인간상
 
 6. 金大中의 인기영합적 선동적 주의 주장
 
 1. 공화국 연방제 통일방안
 
 2. 제3공화국 헌법 환원 주장
 
 3. 대중경제
 
 4. 金大中 관련 저서 현황
 
 7. 金大中의 정치적 야욕 및 투쟁목표
 
 1. 정치적 야욕 및 투쟁목표
 
 2. 金大中의 신한민주당內 계보 분석
 
 8. 金大中의 과시·소비적 생활실태
 
 1. 생활실태
 
 2. 재산관계
 
 9. 金大中 내란음모 사건 전모
 
 1. 사건개요
 
 2. 사형확정 후 恩典조치
 
 3. 관련자 처리
 
 10. 金大中, 在美 反정부 활동
 
 1. 渡美 경위
 
 2. 在美 反정부 활동 사항
 
 11. 金大中 귀국 후 주요 동향
 
 1. 귀국시 특이 동향
 
 2. 自家 도착 후 현재까지 동향
 
 3. 불법 정치활동 사례
 
 4. 현재까지의 金大中 경고조치 상황
 
 5. 金大中 방문, 접촉자 현황
 
 12. 金大中의 현재 법률상 신분
 
 13. 金大中의 건강상태 및 가족사항
 
 1. 건강상태
 
 2. 가족사항
 
 첨부: 장금성(장세철) 남로당 등록 청원서 寫本
 
 
 이 문서를 읽어보면 盧泰愚 대통령 시절에 만든 金大中 문서보다도 살벌하고 비방적이다. 표현에서도 그렇고, 담고 있는 정보(또는 첩보 소문)의 질도 그렇다. 위에 열거한 제목에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다.
 
 
 「李姬鎬는 厚德한 여자」
 
 
 여기서도 1988년판과 마찬가지로 金大中씨가 1953년 10월10일에 건국대학교 정치과 3년을 중퇴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청와대 사이트의 金대통령 학력난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잘못된 주장을 확인하지 않고 기록한 것 같다).
 
 이 1987년판에는 金大中씨가 1948년 9월 남로당 목포시당 청년부장(상임위원)이었고 목포보도연맹 총무부 차장으로 활동했다고 적혀 있다. 金大中씨는 자신은 신민당이 인민당과 공산당과 합당하여 남로당을 만들 때는 따라가지 않았다고 주장해 왔다. 그는 또 보도연맹에는 돈을 내는 운영위원으로 가입했을 뿐이며 실무 간부는 아니었다고 주장했었다. 1987년판에도 金大中씨가 미국 CIC의 사살대상자로 지명되었으나 김진하의 호명착오로 救命되었다고 되어 있다. 김진하가 여기서는 金鎭夏로 표기되어 있다.
 
 「여성○○」 항목에서는 1970년 3월24일, 1970년 12월6일, 1970년 12월13일, 1971년 1월3일식으로 날짜와 장소를 명기하고 있다. 정보부가 당시 야당의 대통령 후보 신분이던 金大中씨를 근접 관찰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1987년판 자료는 李姬鎬 여사를 좋게 평가하고 있다. 「李姬鎬 성품」이라는 항목에서 「無害無得한 성품, 평소 화를 내지 않는 성격, 慾心 없고 나눠먹는 厚德한 여자」라고 했다.
 
 
 안기부의 수준 낮은 표현-「천성적인 奸智」
 
 1987년판은 국가정보기관의 자료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감정적인 인물평을 하고 있다. 객관적 사실과 감정적 분석을 혼재시킴으로써 이 자료를 읽는 사람이 선입감을 가지게 하고 있다. 예컨대 1987년 12월19일 金大中씨가 옥중에서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된 첫날 있었던 이야기를 이 보고서는 이렇게 적고 있다.
 
 <金大中은 처 李姬鎬가 준비한 융숭한 私食(숭어회, 찜) 등을 먹고 난 후 李姬鎬가 출국준비 관계로 바쁘므로 이후부터 아침은 官食(죽)을 먹겠다고 自請하였는데, 12.19(일요일) 朝食으로 쌀죽과 된장국의 병원식사를 제공한 바 집에서 가져온 銀수저를 넣어 색깔이 변하는 것을 보고는 「毒物이 들었다」고 取食을 거부하여 소란을 피워 이에 교도관이 金大中의 면전에서 먹기를 거부한 식사를 즉시 먹어보이고는 中食부터 철저히 醫師檢食을 실시하겠다고 경고한 다음 中食 때 장남 金弘一 집에서 가져온 私食에 교도관이 銀수저를 넣어 감식하려 하자, 잘못했다, 아침것을 가지고 뭐 그러느냐, 앞으로 再論하지 말자, 이런 사실을 병원에 알리지 말아달라는 등 교도관에게 잘못했다고 사과하였으나 이는 본래 천성적으로 간직하고 있는 奸智가 不知不識間에 행동으로 나타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정보부에 의해서 납치되어 눈을 가린 채 배에 태워졌던 사람이, 그 자신은 죽음 직전에 살아왔다고 믿는 사람이 타인이 내어오는 음식에 독이 들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의심이요, 당연한 自衛 조치일 것이다.
 
 이런 행위를 「천성적 奸智」라고 표현한 안기부 직원의 치졸한 언어감각은 안기부의 정보 분석 수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이런 표현은 아마도 당시의 권력자를 의식한 언어선택일 것이다. 이런 보고서를 읽게 되는 그들이 가지게 되었을 인간 金大中에 대한 불신, 선입감, 의심은 金大中 연구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소이다.
 
 
 「詐術的 행각」
 
 「金大中의 奸巧·詐術的 행각」이란 항목에는 11개 사례가 소개되어 있다. 「사례 1」은 이런 내용이다.
 
 <1960.7.29.(4·19 혁명 직후 제5代 국회의원 선거시). 4·19 혁명 후 처음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인 제5代 7·29 선거시 金大中은 강원도 麟蹄지구에서 당시 집권이 예상되던 張勉 박사의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는데, 경쟁자인 자유당 후보 全亨山을 「反혁명분자」라고 선동하면서 자신의 선거운동원들을 총동원하여 선두에서 지휘, 「反혁명분자의 당선은 무효화시켜야 한다」며 개표장에 난입하여, 투표함 22개 중 15개를 强奪하여 그 속에 들어 있던 유효 투표지 2만7000여 매를 소각하는 등 난동을 부렸던 것이다>
 
 <사례 4:1971.1.18.(제7代 대통령 선거시). 金大中은 경기도 강화읍에서 대통령 선거 연설을 마치고 전방 경계지역內에 있는 군경 합동검문소를 통과할 때 초소의 병사가 검문을 하자 일부러 자신의 경호원으로 하여금 초소 병사의 총기를 탈취케 한 후 다음 유세지인 김포에서의 선거연설에서 청중들에게 「강화도의 검문소 초병이 상부지령을 받고 나를 쏘아 죽이려고 하기에 총을 빼앗아 버렸다」는 등 사실을 날조하여 청중들의 분노를 유발케 하는 치사한 모략극을 자행하였다>
 
 <사례 5:1971.1.27.(제7代 대통령 선거시). 대통령 선거운동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金大中은 조카 金弘準(당시 15세)으로 하여금 파괴 위력이나 살상력이 없는 폭발물(완구용 화약)을 자기 집 앞뜰에서 폭발시키도록 해놓고, 이를 정부 측에서 행한 테러라고 과대선전하는 촌극을 연출하였다. 정부는 1971.2.10. 범인 金弘準을 검거하여 구속 수사 중이었는데 선거 분위기를 고려하여 金弘準을 석방하는 관용을 베풀었다>
 
 <사례 8:1971.5.24. 金大中은 승용차 편으로 목포에서 광주로 향하던 중, 전남 무안군 삼향면 대양리 앞에서 신혼여행 차량 두 대의 뒤를 따라가다가 급커브 지역을 통과할 때 반대편에서 오던 화물 트럭이 신혼여행차와 충돌하는 순간, 金大中의 승용차 운전기사가 앞 차와의 충돌을 피하고자 핸들을 급회전시키는 바람에 길 아래 논두렁에 추락하였다. 金大中은 이 사고를 정부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정보기관을 시켜 계획적으로 일으킨 테러였다고 뒤집어씌우는 간계를 꾸몄던 것이다. 金大中은 이 거짓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25편에 계속>
 
 
 
[ 2005-11-30, 15: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