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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굴암은, 경주시 양북면의 '달을 머금은 산'이란 뜻의 함월산(含月山) 기슭에 있다. 수십 미터 암벽에 12개 인공석굴을 만들어
부처를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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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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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장과 벽이 모두 돌로 된 법당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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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는 흔히 볼 수 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드물다. 석굴 만들기에 적당한 무른 돌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단단한 화강암이 많은
경주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실크로드를 통해 인도와 중국을 오간 신라인들은 궁리 끝에, 토함산에 인공석굴인 석굴암을 만드는 지혜를
발휘했다. 나아가 경주 남산 화강암을 다듬어 불상과 탑을 세움으로써 남산 그 자체를 거대한 사원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경주시내에서
문무대왕릉 가는 양북면 함월산 기슭에 '한국의 둔황석굴'로 불리는 자연석굴이 있다.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나
문무왕릉-감은사지터-기림사-석굴암 등 동해안 유명유적지에 가린 탓인가? 오늘(25일)도 다른 곳에 비해 찾는 이들이 많지 않아 보였다.
기림사 방향도로를 따라 가다 '함월산 골굴사'란 현판을 보게 된다. '달을 머금은 산'이란 뜻인 함월산(含月山)이 무척 정겹게
보인다. '(안개를) 토하고 머금은 산'이란 뜻인 토함산이 연상된다. 이처럼 선조들은 산도 하나의 생명체로 인식해 그렇게 이름을 지었으리라
짐작한다.
골굴사는 6세기 무렵 신라시대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절이다. 인도사람인 '광유성인' 일행이 이곳에 12개 인공석굴을
파서 가람을 만들었다는 기록이다. 인도의 불교문화가 중국에 전파돼 둔황석굴을 만들었듯이 신라에도 인도문화가 석굴사원 형태로 전파된 셈이다.
거대한 바위 절벽에 석굴을 뚫어 가람을 만든 형태로 인해 골굴암은 '한국의 둔황석굴'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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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벽 곳곳에 여러 개 석굴을 만들어 다양한 부처상을 모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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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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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에 놓인 여러 불상이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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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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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에 모셔 논 불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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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 골굴사는
불가의 수련기법인 '선무도'를 대중화할 본산으로 최근 언론에도 자주 오르내린다. 수행을 위해 외국 승려들도 이 절을 자주 찾는다. 오늘도 골굴암
오르는 길에 외국스님을 만났다. 인도출신 스님이 신라땅에 골굴사를 창건, 불교를 전파한 지 1500년이 지난 오늘, 한국불교를 배우는 서양스님의
모습이 퍽 인상적이다.
바위절벽인 골굴암은 멀리서 봐도 구멍이 곳곳에 뚫려 있다. 이 바위는 모래와 석회질 성분이 많아 인공석굴
만들기가 비교적 쉬운 것이다. 바위 맨 꼭대기에는 마애여래불상이 우뚝 서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림 '골굴석굴'에는 이 석굴들 앞면에
고운 단청을 한 목조 기와집이 화려하게 서 있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 제대로 남아있는 굴은 법당굴 뿐이다. 법당굴에 들어가면
천장과 벽이 모두 돌로 된 것을 알 수 있다. 법당굴보다 작은 굴들이 여러 형태로 파여 있고 굴 안에는 귀여운 동자승도 보인다. 빗물이 굴
안으로 바로 떨어지지 않게 굴 언저리에 인공으로 배수로를 파 놓은 것도 보인다. 건축물을 세운 흔적인 바위 홈도 여기저기 파여 있다.
바위정상에 새겨진 골굴암 마애불로 오르려면 한 사람이 겨우 빠져나갈 정도의 자연동굴을 반드시 통과해야 한다. "이 동굴이
금강문(사찰 입구란 뜻)인 셈이네." 어느 어르신이 말씀하신다. 자연동굴을 지나면 이내 높이 4m 가량의 장엄한 불상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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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자연동굴을 통과해야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을 만날 수 있다. 한 어르신은 "이 굴이 금강문(사찰의 대문을 일컬음)인 셈이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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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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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굴암 맨 위쪽에 높이 4미터에 달하는 마애불입상(보물 581호)이 있다. 모래가 섞인 암벽에 돋음새김한 불상은 풍화로 무릎
아래와 가슴, 오른손 부위가 손상된 상태다. 그러나 장엄한 모습은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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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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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시대 불상인 골굴암 마애불은 '해뜨는 동해바다'를 향하고 있다. 얼굴은 장엄한 모습을 하고 있으나 왠지 포근함이 깃들어 있는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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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 1500년
풍파로 마모가 심해 투명 보호막을 머리에 인 모습이다. 돋을새김 양식인 마애불은 무릎아래와 오른손 그리고 가슴 부분이 손상됐으나 전체적으로 맑은
인상이 풍겨 웃음짓는 듯, 착각에 빠지게 된다.
골굴암 마애불은 동해바다를 향해 서 있다. 왜 하필 바다일까? 석굴암 본존불
시선이 동짓날 해 뜨는 바다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연상된다. 음력을 따르는 예전에는 밤이 제일 긴 동짓날이 오늘날의 새해 첫날과 같이 시작을
의미하는 날이다. 이는 종교적 상징일 뿐 아니라 농경기대 풍요를 바라는 민중의 바람도 포함돼 있을 것이란 추측을 해 본다.
예로부터 큰 바위는 토속신앙의 상징으로 숭배됐고 불교는 대체적으로 민속신앙의 부산물을 수용하는 입장이었다. 골굴암에도 '남근바위와
산신당의 여궁'이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자손이 귀한 집안 부녀자들이 남근바위에 참배하고 산신당 앞 여궁(女宮)을 깨끗이
청소한 후 판자를 깔고 철야기도를 하면 후세를 얻는다는 것. 그리고 매년 정월이 되면 이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골굴암 참배로 줄을 잇는다는
이야기다. 동?서양 불교문화와 민속신앙이 어우러진 곳이라면 지나친 비약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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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상 앞에서 돌을 쌓으며 무슨 소원 빌었을까? 100원짜리 동전이 있고 잠자리도 앉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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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 추연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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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굴암에는 '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기도'한 바위가 있어 토속신앙도 엿보인다. 남근바위(왼쪽)에 절을 하고 여궁(오른쪽)에 깨끗히
청소한 후 기도를 하면 후세를 얻는다는 전설이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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