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9:2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요 9:5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요 9:6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요한복음 8장이 어떤 내용들로 기록되어 있는지를 소개하려 합니다. 8장에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예수께 끌려온 여인의 사건을 통해 자신을 세상의 빛으로 그리고 자유케하는 진리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이어서 이적이 소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분명히 예수님께서 베푸신 이적이며 그의 능력으로 행하신 표적입니다. 그러나 표적과 이적에 우리를 초청하려는 것은 분명 아닙니다. 그러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9장 마지막에 죄에 대해 지적하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을 보아도 구원을 설명하기 위한 이적이지 이적 자체에 목적을 두고 있지는 않습니다
요 9:4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본문에 등장하는 사람은 날 때부터 소경된 자입니다. 소경을 그냥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날 때부터 소경된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다고 할 때의 구원은 날 때부터 가지고 난 죄에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죄는 다른 세계를 볼 수 없게 하는 어두움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답답함과 불편함 자체를 아예 모르는 것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못 보는 것에 대해 답답하다 불편하다 라는 의식 자체가 없습니다. 눈으로 볼 수 있었다가 소경이 되었다면 그 불편함이야 이루말할 수 없겠지만 날 때부터 소경된 자는 그것이 정상인줄 압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방향, 색, 형태등등 이런 것들은 눈을 뜬 자에게 즉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자에게 들어오는 개념입니다. 소경에게는 이러한 개념이 없지요. 소경에게는 천지 사방이 없지요. 이것은 우리가 구원받기 전에 죄에 있을 때의 모습과 꼭 같습니다.
개개인의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상이 그렇습니다. 지구 한쪽에는 수많은 돈과 과학적인 기술을 동원하여 심장이식이다 하며 그 섬세한 미세혈관 하나하나를 연결해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리는데 최선을 다하는데 또 다른 한편에서는 수십만명이 기아에 허덕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극단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가 사는 땅입니다. 그래서 희망을 발견하다가는 절망하고 절망하는가 싶음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또한 형편입니다. 얼마나 어둡습니까?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이해가 되십니까? 자신의 모순에는 이렇게 이해가 되면서 그것을 더 잘 아시기에 그 짐을 담당하려 십자가 지신 예수님에 대해서는 이해가 안가니 이것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이러한 땅에 우리 예수님이 치료자로 그리고 참 소망자로 오신 것입니다. 오늘 이러한 소경에게 오셔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3절입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구원의 일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는 이렇게 또한 고백합니다. 4절입니다.
요 9:4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 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라고 말입니다. 그 일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구원이 되었습니다. 이 구원의 은혜를 입은 소경은 자신의 경험만 분명할 뿐 예수가 누구인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믿음이 있지 않습니다. 믿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조건이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에는 우리 인간 쪽에 조건과 이유
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을 뿐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이것이 내가 여러분이 구원받은 유일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 이루어진 구원의 유일한 조건입니다.
그럼 믿음은 무엇이냐 믿음은 구원의 목적에 더 적합한 말입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제 믿음을 목적으로 한 삶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환경이 동원될 것입니다. 사건이 동원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게하며 하나님의 하나님 됨을 고백하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그 분의 인격에 항복된 분량입니다.
오늘 소경이 눈을 뜨고는 그때부터 하나씩 하나씩 알아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믿음을 얻는 것입니다.
롬 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 니라
어느 배에서 선체와 선원과 기관 중 어느 것이 중요합니까? 선체가 가장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배가 있는 목적 때문입니다. 배는 물건이나 사람을 운송하는게 목적이기 때문에 선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선체에 싣고 운반해야 하니까 그 일을 하여야 할 선원이 중요하고 선체를 움직이는 동력이니 기관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기능과 기술에 관심을 두기에 사람과 기관에 더 중요하다 여겨지는 마음이 있지만 배의 목적을 두고 생각해 보면 선체가 중요하지요. 그래서 믿음이 결국이니까 믿음을 강조하며 쓴 수사학적 표현이 ‘믿어야 구원받는다’입니다. 그런 것이지 구원의 조건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러나 이것만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어느 조각가가 훌륭한 조각 작품을 하기 위해 나무를 찾는데 그것이 불속에 있다면 건져내는 것이 첫 번째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불속에서 끄집어 내는 것이 다 일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구원은 불속에서 건져낸 것입니다. 거기에 멈추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소경이 눈을 뜬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그러나 이제 눈을 뜬 그에게 다 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이제 여러분을 가장 영광스러운 댄스파티에 데려갈 목적을 두시고 만들어 가실 것입니다. 그 댄스파티의 입장권은 믿음입니다. 이 땅을 살면서 남은 세월에 믿음이 잘 준비되기를 바랍니다. 이 일에 큰 성공이 있기를 기도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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