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9장1-19절( 만남, 결단,그리고 비젼) 05.8.14
Ⅰ. 우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절 밑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주지 스님이 절 안에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염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염불을 들으니 이상한 것입니다. “관셈보살(할렐루야!) 관셈보살, 관셈보살, 관셈보살‘ ’할렐루야 관세음보살‘그런 소리입니다. 하도 이웃교회에서 나오는 소리를 많이 들어서 이렇게 염불을 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듣던 큰 스님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스님들이 문제이기 보다 교회가 너무나 크게 떠들어서 그 영향을 받아 그렇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웃에 있는 교회에 항의하러 스님 한 분을 대표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였습니다. 아주 조용히 앉아 있던 한 젊은 스님이 얼굴이 상기 된 채로 입술을 굳게 하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약간 쉰 목소리로 그러는 것입니다. “주지쓔님, 제가 그 쉽자가를 지겠슈미다.” ㅋㅋㅋ
오늘 말씀에는 기독교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울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을 결정짓는 두개의 사건을 말한다면 하나는 주님의 제자들로 하여금 교회 공동체를 시작하게 한 성령강림의 사건입니다. 그리고 또하나는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사울의 회심입니다. 지금까지는 기독교를 잔해하고 성도들을 잡아가는 선봉장이었던 사울이 갑자기 회심을 하고, 크리스챤이되고 그것도 이방인을 위한 사도의 한사람으로 소명을 받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사실 사도행전의 상당부분은 이 사울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Ⅱ. 사울은 회심이후로 사람이 달라져도 어쩌면 저렇게도 달라질 수 있을까 하고 생각될 정도로 그는 지금까지와는 정반대의 길을 달려갑니다. 위대한 사도의 길을 갑니다. 도대체 사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요? 오늘 바울의 회심에서 우리는 한 세가지를 생각해보십시다.
‘회심’ 그 첫 번째는,
1.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오늘 말씀에 보시면 사울이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기독교인들을 잡아가두려고 돌아다닙니다. 스데반의 일로 인하여 예루살렘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고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두루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중에도 그나마 가까운 외국은 시리아의 다메섹입니다. 그곳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있었는데 사울이 당국의 허가증을 받아서는 그곳까지 쫓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잡아서 예루살렘으로 데려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께서 강한 빛과 함께 홀연히 그에게 나타나셔서는 그의 길을 가로막고 말씀하십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그래서 그는 그 강한 빛을 받아 볼수없게 된채로 주님 도데체 누구십니까? 하고 여쭙니다. 그때 들리는 음성이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이런 시간을 위하여 기도했던 것도 아니고 이런 시간을 기다렸던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정오에 다메섹도상에서 이같이 엄청난 환상을 본 것입니다. 이 환상에 붙들려서 그의 운명이 180도로 바뀌게 됩니다.
주님과의 첫 만남이 그를 완전히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사람은 주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확실한 한가지는 자기자신을 잘 모릅니다. 동시에 자신의 문제도 잘 모르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자신의 죄를 알지못합니다. 죄를 모른는데서는 진정한 회개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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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텔레비전 연속극같은데서는 주인공이 어려운일을 당했을 경우 작가들이 그리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열이면 열 포장마차에 쭈그리고 앉아 죽을 상을 하고 소주를 마시는 장면으로 이어집니다. 왜 조용히 앉아서 자신의 문제를 생각하는 장면을 연출하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가만히 두면 한없이 내멋대로 사는 인생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비상조치를 사용하십니다. 우리는 때로 실패를 합니다. 사업이 부도가 납니다. 때로 사고가 나고, 중병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때에 비로소 생각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왜사는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사실 이 소중한 한마디의 질문을 받아내기 위하여 이모든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와 놀라운 경륜속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사울이 다메섹도상에서 강한 빛속에서 부활주님을 만나고 볼수도 없는 가운데 사흘동안 식음을 전폐하면서 무엇을 했겠습니까? 그렇게 당당하게 교회를 박해하던 그가 이제는 자신의 발로 일어설수도 없게되었을 때 식음을 전폐하면서 사흘동안 무엇을 하였겠습니까?
주님앞에서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는 시간이었음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겠지요. “주님 제가 주님께 열심히 한답시고 교회를 핍박했는데 알고보니 그것이 주님께 대한 엄청난 죄악임을 고백합니다 용서하여 주옵소서“ 아마 이런 회개의 기도를 드렸겠지요.
회심은 이렇게 주님을 만나 자신의 지은 죄를 회개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진정한 회개란 엄밀히 말씀드리면 단 한번입니다. 이것은 주님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내마음대로 살던 삶을 청산하고 주께로 돌이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짓는 죄는 회개한다기 보다는 자백, 또는 고백한다고 합니다. 회개니 회심이니 하는 것은 사실은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내마음대로 살다가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지옥을 향해가다가 이제는 천국을 향하여 가고, 세상을 따라가다가 이제는 주님을 따라게게 되는 것, 이 방향전환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났을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인생의 방향을 주님께로 틀게 되는 것입니다.
혹시 아직도 이런한 방향전환이 없으신 분은 지금부터라도 이 예수님을 영접하시고 회개하시는 인생의 대방향전환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회심’ 두 번째는,
2. 결단하는 것입니다.
부활주님은 다메섹의 아나니아라는 한 제자에게 직가라는 거리에 가서 기도하고 있는 사울을 찾아가게 합니다. 그러자 아나니아가 깜짝놀랍니다. 13절 말씀을 보시면 아니 주님, 그는 소문난 박해자로 예루살렘에서도 이곳 다메섹에서도 많은 성도들을 찾아 고생을 시키는 자인데 왜 그사람을 만나게 합니까? 그사람은 기독교인들을 체포하는 특권을 가진자입니다.하고 반문을 합니다.
그러자 주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합니다. 15-16절-다같이 읽으십시다-‘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자손들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하나님은 엄청난 고난이 예고되는 그 가운데로 사울을 부르십니다. 결단하게 하시니다.
그의 결단에 있어서는 큰 고민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일반 평민이 아니고 유대당국의 지도자중의 한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말씀드리면 지금까지 애써 쌓아온 금자탑을 다 포기하고 고난이 산적한 그리스도의 전도인으로 나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상상을 해보면 알수있지요.
나중에 그가 고백한 말에 의하면 기독교를 박해했을 전도로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지도자입니다. 거기다가 당시 최고학파인 가말리엘학파 출신입니다. 지금까지 힘겹게 출세가도를 향하여 올라왔는데 그러한 명예 특권,지위 그가 이제 그러한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여간 힘든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고 그가 그리스도를 따르면 지금까지의 유대교 친구와 동지는 다 敵이 되고 맙니다. 이일은 나중에 그의 동족 유대인들이 얼마나 그를 죽이려고 따라다녔는가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예) 간혹 보면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는데도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여 어려워하는 분들을 봅니다. 어려우면 결단을 합시다. 기도하고 작정을 합시다. 그러면 나의 힘으로는 어려우나 주님은 도와 주십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은 그렇게 결단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기차, 우리의 기도는 철로라고 하쟎습니까? 결단이 힘들때는 기도합시다. 주께서 힘을 주십니다.
‘회심’ 세 번째는
3. 새로운 비젼이 열리게 되는 일입니다.
17-18절을 다같이 읽으십시다-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보게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 진지라.
사울이 주님을 만났을 때 강한 빛으로 인하여 볼수 없게 되었는데 이제 아나니아가 그에게 按手하자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나니아라는 말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말입니다.
은혜의 주께서 사울의 눈을 열게하신 것입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게서 성도여러분의 눈도 열게해 주실줄로 믿습니다. 그의 눈에서 비‘늘같은 것’이 벗겨졌다고 합니다.
이제 사울의 안목이 달라졌습니다.세상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기등등하여 증오로 바라보던 시선이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비늘이 벗겨지면 하나님의 나라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마음눈에서도 주님을 보는 것을 방해하는 비늘이 벗겨져야 합니다. 육신의 비늘이 벗겨져야 영의 눈이 밝아집니다. 지금도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육신의 눈의 비늘 때문에 주님을 보지못합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여전히 영적인 소경으로 살아갑니다.
전에는 남의 허물이나 찾고 비판꺼리만 찾으려던 눈이 이제는 사람들을 귀하게 보게 됩니다. 이제껏 남의 단점과 실수와 시비거리가 그렇게 잘보였는데 눈에서 비늘이 떨어지고 나면 오히려 그런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게 됩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나의 영안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지는 않나 살펴보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의 비늘이 하나둘씩 끼여들어 성경을 읽는눈이 어두워지고, 기도하는 눈이 감겨지고, 복음의 진리도 점점 멀어지고 있지않은지 점검해봐야 합니다.
재리에는 눈이 밝고, 처세술은 뛰어나고, TV보는 눈은 밝아지고 세상의 즐거움을 보는 눈은 밝은데, 그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가 닫혀지게 된다면 우리는 이 비늘이 벗겨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119:18- ‘내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하소서’ 아나니아를 통하여 어두운 사울의 눈을 밝혀주신 주님께서 그의 은혜의 성령으로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눈을 밝혀주시도록 기도하실수 있기를 바랍니다.
Ⅲ. 청량리 가는 전철, 수원가는 전철-다 일호선, 앉아가기도 서서가기도하고, 학생들이 엠피스리도 듣고, 출퇴근때는 똑같이 만원이고, 신문도 읽고, 안내방송도 나오고, 잡상인도 나오고 다 똑같다. 다른 것은 단하나,,,,? 목적지만 다르지요. 지옥가는 것도 천국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겉으로는 똑같아요. 다 이땅에서 먹고 자고 일하고 죄짓고,,,,. 일호선 창량리행을 타고 그 안에서 아무리 똑똑하게 처신하고 열심히 수원방향으로 빨리 뛰어도 도착은? 청량리입니다. 수원가려면 빨리 ‘내려서’ 수원행을 갈아타야합니다..
1.지옥행열차를 타고 아무리 천국을 향하여 열심히 뛰고, 선을 행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똑똑해도 확실하게 지옥에 갑니다. 빨리 갈아타야 합니다. 이게 회심이고 회개입니다.
2.그리고 오직 주님만 따라가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3.그리고 안목의 정욕으로 가득해지기 쉬운 우리 눈에 비늘이 떨어져 영의 세계, 새로운 세계,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보실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 오주님 우리가 회개하고 주님만을 따라 골고다이든 겟세마네이든 가려고 했던 그 결단을 잊지말게 하시고 우리 또한 동행하시는 주님으로 인하여 마음의 눈이 밝아지게 하시고 하나님의 기이한 것을 항상 보게 하옵소서 예수님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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