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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종군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3)

鶴山 徐 仁 2024. 4. 6. 15:12

오피니언

칼럼

美 종군기자 3인이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 (3)

송재윤 캐나다 맥매스터대 교수·역사학


입력 2024.04.06. 02:00

송재윤의 슬픈 중국: 변방의 중국몽 <28회>

6.25전쟁 피난민들의 모습. 이 사진 속에선 여인들과 어린이들이 대다수다. / https://www.awm.gov.au/collection/C294093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반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 바로 그 현장에서 폭풍(爆風)을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난 3인의 미국인 종군기자들이 있었다. 당시 국군은 인도교 남쪽 제2, 제3 상판을 폭파했고, 이 3인의 종군기자들은 발파 지점에서 불과 25야드(23미터) 떨어진 제1 상판 위에서 지프를 타고 있었다. 그날 아침 천신만고 끝이 한강을 건넌 수원까지 간 3인은 “한강 다리 폭파” 관련 특종 기사를 쏟아냈다.

당시 37세 카이스 비치(Keyes Beech, 1913-1990) 기자의 기사는 1950년 6월 28일 자 캐나다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Vancouver Daily Province)에, 49세 버튼 크레인(Burton Crane, 1901-1963)의 기사는 6월 29일 뉴욕타임스에, 26세 프랑크 기브니(Frank Gibney, 1924-2006)의 기사는 7월 10일 타임지와 라이프지에 각각 실렸다. 1954년 비치 기자가 출판한 <<도쿄와 동방의 요지(Tokyo and Points East)>>의 제10장”서울 탈출기(Escape from Seoul)”에는 “한강 폭파 사건” 관련 가장 세밀하고, 정확하고, 공평무사한 종군기자의 체험담이 진술되어 있다.

한강 인도교 폭파 현장에 있었던 3인의 미국인 종군기자들. 왼쪽부터 기브니, 비치, 크레인.

“슬픈 중국”에서는 지난 <26회><27회> 두 차례에 걸쳐서 이 3인의 종군기자가 전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의 진실을 상세하게 소개했다. 이미 언급했듯, 이들이 쓴 기사들은 생존자들의 목격담이면서, 동시에 직업적으로 훈련된 베테랑 종군기자들이 육하원칙에 맞게 작성한 현장 보고서다. “한강 다리 폭파 사건”과 관련하여 이들의 기록보다 더 중요한 1차 사료는 없다. 예컨대 1950년 9월에 열린 “한강 인도교 조기 폭파로 인한 아군 피해의 책임자 처벌을 위한 재판”의 판결문이나 1982년 출판된 이창록의 회고록 “전환기의 내막” 등 역시 중요한 사료이지만, 바로 당일 그 시각 폭파 현장에 있었던 종군기자들이 당일 작성한 특종 기사들에 비하면 정확성, 세밀성, 현장성이 떨어진다.

그동안 대한민국 사회는 폭파 현장에서 살아난 3인 종군기자의 기록은 버려둔 채로 온통 가담항설에 유언비어를 뒤섞은 “카더라” 신화만으로 군사작전 상 착오로 빚어진 불행한 사태를 “이승만 정권의 양민 학살” 사건으로 둔갑시키는 반대한민국 세력의 정치적 야바위에 속수무책 속아왔다. 단적인 일례로 1993년 방영된 KBS 역사 다큐멘터리 “한강 인도교 폭파와 부산 정치파동”에선 해설자가 “당시의 자료를 종합해서 추정해 볼 때, 이 다리가 폭파되면서 현장에서 희생된 시민의 수가 약 700~800여 명이었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한다.

이미 2회에 걸쳐 살펴보았듯 널리 퍼진 이러한 주장은 당시 현장에서 직접 폭풍(爆風)에 휩싸였던 3인 종군기자의 진술과는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 국민 혈세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이 역사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자료 검증도, 사료 분석도, 현장 점검도, 증언 대조도 제대로 하지 않고서 가담항설을 기정사실로 뒤바꾼다면 대한민국의 불행이다. 자, 이제 3인의 종군기자들이 남긴 기록을 근거로 “한강 다리 폭파 사건”을 둘러싼 3가지 쟁점을 따져 보자.

쟁점 (1): 군경에 의한 차량 및 인파 통제가 있었는가?

한강 다리 폭파로 500~800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다고 주장하는 세력은 당일 그 다리 위에 피난민들이 바글거리고 있었다고 가정하고 있다. 당시 그 현장을 재현한다면서 군용 차량은 단 한 대도 없는 한강 인도교 위에 구름떼처럼 몰려든 피난민들의 영상을 제작한 KBS가 대표적이다. 그러한 거친 상상의 저변에는 폭파를 앞두고 군경에 의한 차량 및 인파 통제가 전혀 없었거나 태부족이었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3인 종군기자의 기록을 분석해 보면 당시 용산 방면의 한강 인도교 진입로에서는 엄격한 차량 및 인원 통제가 이뤄지고 있었으며, 그 때문에 중지도가 아니라 용산 방면 진입로에서 이미 심각한 체증이 발생했다.

비치와 기브니의 진술을 보면 인도교 북쪽 다리 진입로로 수많은 피난민이 몰려들었고, 그래서 숭숭 잘 빠지던 차량이 소걸음을 치다가 정체되고 말았다. 바로 그때 그 상황을 묘사하면서 기브니는 “헌병 지시에 따라 차량들은 엄격하게 줄을 맞추고 있었다(Guided by MPs, automobiles kept strictly in line)”고 썼다. 헌병단이 군용트럭들을 줄 맞춰 세운 후에 차례차례 다리로 진입시켰음을 말해준다.

바로 이 대목은 1970년 4월 30일 중앙일보에 실린 김홍도 씨(사건 당시 시경경비계 주임· 1970년 당시 노량진경찰서장·47)의 다음 증언에 대체로 부합한다.

“나는 ‘드리쿼터’를 타고 김병두 경감은 지프로 한강으로 달렸지요. 내 바로 앞에 김태선 국장의 차가 있었는데 한 육군 대위가 강을 못 건너게 막아요.’국장차인데 왜 통과시키지 않느냐?’고 항의하여 겨우 다리를 건넜습니다. 막 건너온 순간 ‘쾅’소리와 함께 내가 탄 ‘드리쿼터’의 뒷부분이 공중에 떴고, 소방과장 신인우 총경이 탄 지프 유리창이 박살이 났지오. 또한 이때 종로경찰서원들이 타고 건넌 트럭이 하늘로 붕뜨면서 짐짝처럼 경찰관들이 차 밖으로 내동댕이쳐졌구요. 정말 악몽이었습니다.”

최근 다큐 영화 <<건국전쟁>> 김덕영 감독은 열 살의 나이로 어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한강 다리 부근에서 있었던 김중남(1941년 생) 씨를 인터뷰했다. 김중남 씨는 건국전쟁을 보지 않았고, 그의 손자가 할아버지의 체험담을 김 감독에게 알려왔다. 김중남 씨의 증언에 따르면, “삼각지 로터리와 용산역 중간쯤에서” 피난민들에 섞여서 한강 인도교 쪽으로 몰려가가는데, 다리 진입이 통제됐다면서 반대 방향으로 되돌아오는 한 무리의 피난민들과 마주쳤다고 한다. 김중남씨는 말한다.

2024년 3월 17일 다큐 영화 “건국전쟁”의 김덕영 감독과 인터뷰하고 있는 김중남씨(1941년 생, 올해 83세), 강원도 홍천 거주, 고향은 대전, 1950년 6월 당시 거주지는 제기동.

“내 생각으로는 못 가게 하니까, 반대(편)에서, 거기서 누가 통제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못 가게 했을 거 아닙니까? 군인이 됐든 경찰이 됐든. 누가 통제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분명히 뭐 한두 사람이 오는 게 아니라 여기 피난 가던 사람이 도로 돌아온 거니까요. 수많은 군중이었으니까.”

상식적으로 국군 차량의 진입도 이처럼 엄격하게 통제했는데 인파 통제가 전혀 없었다고는 생각할 수는 없다. 여러 증언과 “헌병의 지시에 따라 여러 차량이 엄격히 줄을 맞췄다”는 기브니의 기록에 비춰볼 때 한강 인도교 북단에서 군대나 경찰에 의한 진입 통제가 있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쟁점 (2): 성급한 폭파로 과연 몇 명이나 희생되었나?

한강 인도교 폭파는 적군의 남하를 지연하고 저지하기 위한 군사작전이었다. 여러 증언에 따르면 이미 그 전날부터 한강 인도교에는 TNT가 장착되어 있었다. 다리 폭파 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폭약은 다리 기둥이 아니라 가장 약한 상판에 장착되었다. 폭파 직전 짧게는 10분에서 길게는 40분가량 다리 상판 위의 차량을 모두 건너가게 하는 조치가 있었지만, 통신상 착오가 발생하여 발파 시 다수 차량의 손실과 병력 희생이 발생했다. 과연 몇 명이나 희생되었는가?

3인 종군기자들이 바로 당일 수원에 도착해서 작성한 기사들은 인명 손실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폭발로 지프가 땅에서 들렸고, 전면 유리가 깨져서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오직 뒷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부상을 피할 수 있었다. 우리 앞에 있던 한 트럭 가득한 남한 군인들이 산산이 조각났다. 우리는 어둠 속을 비틀비틀 걸어갔다. 나는 출혈로 앞을 못 보는 크레인을 인도했다. 불타는 다리에서 적의 탱크가 있는 서울 쪽으로 돌아나갈 때 시신들과 죽어가는 군인들이 우리 발길에 걸렸다. 희생자가 구해달라 외치는데 어둠 속에서 부상자들이 손을 뻗고 있었다.” (카이스 비치, “목격자 전쟁 보고(Eyewitness War Report,” 밴쿠버 데일리 프로빈스 1950. 6. 28.)

“우리와 함께 한강 다리로 향하던 트럭 행렬의 병사들은 허둥대지 않았다. 장교들은 그렇지 못했다. 한강을 최후 방어선으로 확보하여 남한 육군이 재결집할 수 있도록 하려고, 또한 북한군 탱크 행렬(tank column)이 밀고 내려와서 그렇게 할 수 없을까 두려워서 그들은 다리를 폭파해서 수백 명 아군 병사들을 죽였다. 우리 통신원들이 탄 지프는 폭파 지점에서 불과 25야드(23미터) 떨어져 있었는데, 군인들로 가득 찬 커다란 트럭 뒤에 있어서 보호를 받았다. 그 군인들은 모두 죽었다.” (버튼 크레인, “남한, 성급한 폭파로 자체 병력 살해,” 뉴욕타임스 1950. 6. 30.)

바로 사고 당일(6.28.)과 다음날(6.29.) 게재된 칼럼에서 비치와 크레인은 모두 희생자가 전원이 트럭에 실려서 이동 중이던 군인들이라고 기록했다. 비치는 희생자 인원을 추산하진 않았다. 대신 그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널브러진 다리 상판 위의 참혹한 상황을 생생한 언어로 묘사하는 데에 그쳤다. 섣부른 추정이나 판단을 배제하고 철저히 직접 경험한 바를 있는 그대로 재생하려는 기자 정신이 돋보인다.

비치와 달리 크레인은 “수백 명의 군인들”이라는 다소 애매한 일상어로 사상자 수치를 대략 제시했는데, 그 이유는 쉽게 설명된다. 크레인은 안구 주변 심한 출혈로 앞을 볼 수 없어서 비치가 그를 인도하며 걸어야만 했다. 반면 부상당하지 않았던 비치는 다리 위를 직접 걸으면서 현장의 구체적 상황을 나머지 두 기자보다 훨씬 더 상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비치와 크레인은 민간인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지만, 기브니는 희생자 중에 민간인과 군인이 섞여 있었다고 기록했다. 그 점은 더 아래서 상세히 논구하고, 일단 그가 제시하는 사상자 수치를 보자. 그는 참혹한 폭파 현장을 묘사한 후(아래 참조), 사상자의 수를 다음과 같이 강한 언어로 추정했다.

“단번의 폭발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이 틀림없다(there must have been over one hundred casualties from the one blast).”

1950년 6월 28일 이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촬영한 한강 인도교 폭파 후의 참상. 1993년 KBS 역사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북한군 동영상 화면 캡처. 이 장면은 비치 기자가 묘사한 폭파 직후 다리의 상황과 매우 유사해 보인다.

여기서 사상자는 사망자와 부상자를 함께 이르는 군사적 개념이다. 이 수치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확인된 경찰 사망자 77명과 대동소이하다. 물론 정확한 현장 조사도, 철저한 사망자 확인의 과정도 없었기 때문에 사망자의 숫자를 확정할 수 없다. 다만 폭파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던 하우스만의 추정치 500~800명보다는 다리 위에서 나자빠진 트럭과 널브러진 시체는 물론 다리 절단면까지 직접 보았던 종군기자들의 추정치가 더 신빙성이 높다. 희생자 규모에 대해서 크레인은 “군인 수백 명”이라 했고, 기브니는 “사상자 100명 이상”이라 했고, 비치는 다분히 의도적으로 피해자 규모에 관한 구체적 언급을 피했다.

쟁점 (3): 민간인 희생자가 있었는가?

이제 가장 민감한 쟁점인 민간인 희생자 존재 여부를 따져 보자. 공영방송의 역사 다큐멘터리에 삽입된 재현 장면에 따르면, 폭파 당시 다리 위에는 민간인들이 구름 떼를 이루고 있었다. 지금도 대한민국 좌파 진영에서는 바로 그 이미지를 선정적으로 부풀려서 이승만 정권의 양민 학살을 운운한다. 그러나 그런 주장에는 아무런 물증도, 정황증거도 없다. 폭파 현장을 목격한 3인의 종군기자는 대다수 희생자가 군인이었다고 기록했다.

폭발 직전 지프 조수석에 앉아 있던 26세의 기브니는 안면에 상처를 입었고, 쓰고 있던 안경알이 박살이 났다. 폭파 후 기브니는 지프의 핸들을 잡고서 비치의 인도를 따라 차를 조금 앞으로 움직였다. 비치와 크레인과는 달리 7월 10일 타임지와 칼럼과 같은 날 라이프지에 실린 축약본에서 기브니는 민간인 희생자도 있었다고 기술한다.

“우리는 계속 불타고 있는 2.5톤 트럭의 유체를 보았다. 그 뒤로 30피트(9미터) 아래 강 수면으로 상판 두 개가 떨어져 있었다. 우리 앞의 트럭에 타고 있던 군인들은 모두 사망했다. 이미 시신들과 죽어가는 민간인과 군인들이 (civilians and soldiers) 다리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다리 위에 민간인들과 군인들이 함께 널브러져 있다고 기록한 기브니는 사상자의 수를 “100명 이상”이라고 거의 확정적으로 “there must have been”이라는 표현까지 써서 기록했다. 위에서 언급했듯 그는 “단번의 폭발로 1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음에 틀림없다”라 적었다.

종군기자라면 전장에서 민간인 희생자의 유무에 가장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다. 이상 3인의 종군기자 중에서 비치와 크레인은 민간인 희생자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기브니는 중지도 부근 상판 위에 널브러진 사망자와 부상자 중에 민간인과 군인이 섞여 있었다고 기록했다. 다만 그가 직접 기록했듯, 폭파 당시 그의 안경은 박살이 났고(“my glasses were smashed”), 머리에서 피가 쏟아졌다.

반면 비치는 완전히 무사했다. 기브니가 지프의 운전대를 잡고 있을 때, 비치는 직접 상판 위를 걸으며 기브니에게 수신호를 주었다. 정황상 비치가 세 사람 중에서 가장 가까이에서 폭파 직후의 참상을 정확하게 목격할 수 있었다. 더군다나 그는 그 상황을 다시 더 심층적으로 파악해서 “서울 탈출기”를 집필했다. “서울 탈출기”의 문장에는 놀랍도록 생생한 디테일이 살아 있다. 예컨대 다리에서 빠져나와서 세 사람은 한 미국인이 살던 어느 집을 찾아서 들어갔다. 비치는 그 집 내부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벽에는 커다란 흰색 냉장고가 있었다. 그 문을 열었는데, 음식이 가득했다. 베이컨, 달걀, 상추, 토마토, 마요네즈, 주스 깡통 등. 벽장 안에는 조니워커 블랙 라벨을 포함한 양주병이 여럿 있었다. 거실에는 밝게 색상의 어린이 음반들이 한 구석의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콜리어스(Collier’s, 잡지), 토요 석간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 토요 문학 리뷰(Saturday Review of Literature)가 있었다.”

이처럼 비치의 글은 직업적으로 오랜 시간 훈련된 전문 기자의 문체를 보인다. 구체적 상황을 묘사할 때 그는 카메라를 들이대고 직접 촬영한 듯 디테일을 살려서 기록했다. 눈에 들어온 모든 사물을 일일이 빠짐없이 열거하는 정확한 기억력과 치밀한 기록의식이 돋보인다.

1950년 6월 28일 오후 북한군 선전대가 촬영한 한강 인도교 상판 위의 사망자. 헬멧 위의 헌병 글자가 선명하다. 동영상 캡처.

그러한 비치가 상판 위를 걸어 다니면서 참혹한 폭파의 현장을 관찰했는데, 민간인 희생자를 단 한 명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37세의 베테랑 종군기자 비치는 다른 두 기자와는 달리 부상을 입지 않은 온전한 상태였다. 반면 26세의 기브니는 기자 경력이 짧았는데, 안경이 파손되었으며, 얼굴이 피로 덮인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3인의 증언을 취합해 보면, 민간인 희생자의 존재 가능성을 전면 배제할 수는 없으나 사망자의 대다수가 군병력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신화를 넘어 역사를 찾아서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1918-1995)의 증언록 <<한국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 대위>>(한국문원, 1995)에는 한강 다리 폭파로 “5백~8백 명의 인명 희생”이 있었다는 언급이 나온다. 당시 미 군사고문이었던 제임스 하우스만은 다리가 폭파되기 직전 다리를 건넜고, 그 순간 폭음과 열이 너무나 강하여 지프 전체가 불바람에 휩쓸려 날아가는 것 같았다는 짧고 강렬한 기억을 기록했다. 하우스만이 추정한 500~800명 희생자는 미군 측 공식 입장처럼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던 듯하다.

가령 미군 전쟁사가 로이 애플만(Roy E. Appleman, 1904-1993)은 6.25전쟁 초기 미국의 위업을 기록한 <<남으로 낙동까지, 북으로 압록까지(South to the Nakdong, North to the Yalu>>(1961)에서 “가장 정보가 많은 미군 장교들에 따르면 다리 폭파로 500~800명이 폭사하거나 익사했다”는 언급이 있는데, 각주를 보면 하우스만과의 인터뷰도 인용했다. 문제는 비록 하우스만이 다리를 건너면서 폭발음을 직접 들었던 것은 사실이라 해도 그는 곧바로 수원으로 내려갔으므로 현장의 실상을 직접 볼 기회는 없었다는 점이다.

다리 위에 있었던 3인의 종군기자와 달리 미 군사고문단 스털링 라이트(Sterling Wright, 1907-2009) 대령과 함께 움직였던 종군기자 마거릿 히긴스(마거릿 히긴스(Marguerite Higgins, 1925-1966) 기자는 한강 이북에서 다리 폭파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는 다리가 폭파된 후 집합한 59명의 군사고문단 앞에서 라이트 대령이 경멸조의 음성으로 말했다고 기록했다.

“남한 군대가 우리에게 경고도 주지 않고 너무 빨리 다리를 폭파했어! 도시 대부분이 아직 적의 손에 있는데 말야. 주요 상판 위에서 여러 트럭을 타고 있던 군인들을(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 날려버렸어. 자기편 인원 수백 명(hundreds of their own men)을 죽였어.”

라이트 대령의 이 발언 역시 누군가의 전언에 따른 부정확한 정보일 뿐이다. 라이트는 긴박한 상황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대략의 추정치를 말했을 뿐인데, 여기서 “자기편 인원 수백 명”은 바로 앞 문장의 “truckloads of their own troops)”을 가리킨다고 볼 수밖에 없다. 라이트 역시 사망자의 거의 절대다수가 병력이라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50년 6월 28일 오후 북한군 선전대가 촬영한 한강 인도교 상판 위의 사망자. 헬멧 위의 헌병 글자가 선명하다. 동영상 캡처.

미군뿐만 아니라 국군 역시도 다리 폭파 직후 곧바로 수원으로 향했으므로 직접 피해 상황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를 작성하지도 못했다. 하우스만은 대략적인 추정치를 말했을 뿐, 피해자 규모에 관해선 그 어떤 구체적 증거도 제시하지 않는다. 결국 하우스만이 말하는 500~800명의 사망자 수는 시체 수습도, 현장 검증도, 사후 조사도, 유가족 인터뷰도 없이 대충 눈대중으로 어림잡아 내놓은 최대한의 희생자 수치일 뿐이다. 그것도 스스로 직접 목격한 장면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에 기초한 숫자이다.

위의 사진들이 보여주듯, 6월 28일 낮에 한강 다리를 접수한 북한군은 파괴된 다리 위 상판에 널브러진 사망자를 동영상으로 촬영했다. 1993년 제작된 KBS 다큐멘터리 <<한강 인도교 폭파와 부산 정치파동>>의 도입부에는 바로 문제의 그 영상이 삽입되어 있는데, 다리 위에 널브러진 최대 10여(?) 구의 시신이 보이는데, 모두 군용 차량 옆에 쓰러져 있는 군인이나 경찰로 보인다.

만약 하우스만의 증언대로 500~800명이나 몰살당했다면, 다음날 다리를 접수한 후 상판 위 참혹한 현장을 촬영했던 북한군은 왜 그 민간인 희생자들을 찾아내서 찍지 않았을까? 단 하루 만에 수백 명의 시신들이 모두 수장되거나 산화하여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 민간인 희생자 수백 명이 널려 있는데도 북한군 선전대가 그들을 외면하고서 오로지 국군의 시체만을 골라 촬영했다고 볼 수는 더더욱 없다.

현재까지 밝혀진 77명 경찰 사망자 외에 민간인이나 군인 희생자들이 400~700명 이상 더 있었다면, 북한군이 당연히 그 처참한 상황을 찍어서 정치선전에 활용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알려진 동영상은 KBS 다큐멘터리에 포함된 그 짧은 영상밖에는 없는데, 그 영상 속 희생자 10여 명은 모두 국군 사망자들로 보인다. 결국 한강 인도교 폭파로 민간인 500~800명이 몰살됐다는 주장을 뒷받침할 물증은 없다!

정황상 민간인 희생자가 다수였을 가능성도 희박해 보인다. 500~800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면 왜 지난 70여 년의 세월 그 많은 이들의 가족들, 친지들, 친구들, 동료들, 지인들 그 누구도 진상 규명이나 국가 배상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상식적으로 500~800명이 사망했다면 그 이상 되는 사람들이 부상당한 채로 또는 멀쩡하게 생존했어야 하지 않나?

이제 한강 인도교 폭파의 ‘신화’를 넘어서 ‘역사’를 찾을 때가 되었다. 그 첫걸음은 지금껏 3회에 걸쳐 소개한 3인 종군기자의 기록을 면밀하게 샅샅이 분석하는 일이다. 폭파 순간 발파 지점 지척에 있다가 폭풍(暴風)을 맞은 후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서 당시 상황을 세상에 알린 종군기자 3인의 기록이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중요하고도 신빙성이 큰 목격자들의 직접 증언이다. 반면 이미 수원의 임시 사령부로 후퇴한 하우스만의 주장은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전혀 신빙성이 없는, 불확실한 사망자 최대치의 추정일 뿐이다.

폭파된 한강 인도교, 1953년 1월 1일 존 리치 촬영. /월간조선

이렇게 중대한 사건의 진상이 지금껏 제대로 규명되지도 못한 채로 가담항설과 유언비어만이 나돌고 있었다는 점은 한국 역사학계의 오점이다. 무엇보다 종군기자 3인의 가장 중요한 증언이 제대로 알려지지도 않았다니 한국 학계의 무성의와 불성실에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지난 70여 년 “이승만 괴뢰 도당과 미제”를 악마로 만들면서 남로당 빨치산을 “민족해방의 전사들”로 미화해 온 세력은 한강 인도교 폭파 사건의 비극을 제멋대로 왜곡해서 사료 분석도, 자료 점검도, 현장 검증도, 증언 취합도 없이 “카더라”에 “거봐라”를 뒤섞어서 양민 학살이라 우겨왔다.

그들이 제멋대로 거짓 선동과 허위 조작을 일삼고 있을 때, 역사의 진실을 담은 가장 중요한 기록들은 왜 방치되었을까? “시간이 더 흘러야 역사의 진실이 밝혀진다”는 누군가의 말은 전혀 현실성이 없다. 목숨을 건 3인의 종군기자들이 지친 몸으로 타자기를 들고 다니면서 밤을 새워가며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었다면, 우리는 영원히 거짓부렁에 속고 신화에 세뇌되어 음험한 정치 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했을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땅속에 파묻힌 공룡의 화석과도 같다. 공들여 파헤치지 않으면 영원히 묻히고 만다. <계속>

1950년 서울 수복 전투. David Douglas Duncan. /공공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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