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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포은 정몽주

鶴山 徐 仁 2014. 7. 15. 20:40

포은 정몽주    2014/07/15 10:01 추천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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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은 정몽주

오늘날 고려말기의 충신 정몽주에 대한 인식이 조금은 퇴색한 것같은 생각이 든다.

그가 그냥 대단한 충절로서 자신이 봉사했던 고려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같다.

그러나 포은 정몽주에 대해 조금은 남다르게 알고 있는 필자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조선 500 년 사에서, 유학의 나라 조선에서 활동했던 그 대단한 수많은 유학자들이 한결같이 전조의 사직을 지키려다 순절한 정몽주를 유학의 조종으로 받들고 있음은 주목할만하다.

조선 유학의 맥을 이어간 강호 김숙자, 점필재 김종직, 한원당 김굉필, 정암 조광조, 퇴계 이황,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등 기라성같은 유학자이 한결같이 포은 정몽주를 동방 이학의 조종으로 받들고 있다.

사실 이것이 포은 정몽주의 학문의 내용이다 하고 내세울 것이 뚜렷이 있는 것도 아닌 듯하다. 동시대인인 목은 이색이나 양촌 권근이 오히려 뛰어난 저술들로 자신들의 학문을 정리하여 후세에 남기고 있다.

자신이 태어나고 생을 주는 사직에 헌신하는 것을 유자의 생명으로 알고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이 자신의 나라의 개국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이었기에 죽음을 당한 포은 정몽주를 충신 일호에 추증하고,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신라시대의 최치원과 고려시대 안향에 이어 세 번째로 문묘에 배향하기로 한 것은 무슨 까닭이었을까.

사직의 개창자의 아들인 이방원의 칼에 목숨을 잃어버린 탓이었을까. 그런 면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포은의 나라 사랑의 정신 탓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의 이런 나라 사랑 정신은 성리학에서 오고 있다.

성리학이란 다른 말로, 줄여서 이학(理學)이라고도 하고, 정주학, 도학, 주자학, 송학이라고도 한다.

핵심 이론은, 만물의 근원을 이(理)와 기(氣)로 본다. 기는 음양과 오행으로 파악한다. 이는 만물에 성(性)을 주고, 기는 만물에 형(形)을 준다. 이는 지상에 혹은 우주에 존재하는 오만 만물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총제성이나, 성은 사물 개개가 가지는 내면의 특징을 말함이다. 그래서 성에 있어서는 선악의 구별이 있고, 완전한 인격을 가지려면 경(敬)과 궁리(窮理)가 필요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서는 독서를 해야하며, 여기에 서서오경이 있다. 사서는 대학, 중용, 논어, 맹자이고 오경은 시경, 서경, 춘추, 주역, 예기를 이름이다. 이 책들에 정통하여야 참다운 인간의 구실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하다.

삼봉 전도전은 삼봉집에서 사서오경을 포은만큼 정밀하게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적고 있다.

송나라에서 고려말에 사서집주라는 책이 전해 졌는데,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이 없었다.이 책은 그만큼 고차원적이고 난해하였다. 그러나 포은은 자신이 맡고 있던 성균관 사예직에서 학생들에게 이 책을 쉽게 강의하여 유생들을 놀라게 했다. 유생들은 포은의 강의를 들으면서도 반신반의하였다. 책이 하도 어려워 아무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후에 송나라의 대학자 호병문의 사서통이란 책이 조선에 전해졌는데, 사서집주의 해설서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이 이 책을 구해 읽게 되었는데, 자신들이 성균관에서 포은으로부터 들었던 것과 전혀 틀리지 않아서, 포은의 해박한 지식에 탄복했다고 한다.

포은 정몽주가 어떻게 사서오경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혼자 스스로 익혔다는 학설이 제일 유력하다.

불교에 대한 포은의 사상은 그리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포은은 유학의 서책들을 절간에 가서 읽었다고 한다. 당시 무신집권기에는 문신들의 피난처는 절간이었다. 그러나 불교가 가지는 교리에서는 단연코 반대였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만물을 공(空)으로 파악하고, 실체와 인간의 자아를 부정하며, 사람의 눈 코 입 귀 혀 몸의 6경과 색 냄새 맛 소리 법의 6근의 조화로서 우주의 공의 철학을 설명하며, 이것의 윤회설과 연기설로서 우주간의 존재물의 근원을 설명하려는 불교의 교리를 전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친척을 버리고 자식과 어버이와의 인연을 끊고, 나라까지 멀리하고, 토굴 속에 들어앉아 밥을 굶으면서 적공을 바로보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무슨 뜻이 있는가라고 자문하고 있다.

이와 기의 조화와 음양의 작용으로 지상의 모든 물체와 우주공간의 실체를 설명하는 성리학에서는 어버이와 임금은 자신의 존재를 가능케하는 무상의 존재이다. 사람의 죽음은 영혼의 승화로 보기 때문에 3년 여묘살이를 하고 사당을 지어 4대 봉사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지말자 불에 태워 재를 산하에 뿌려버리는 불가와는 대조적이다.

포은은 자신이 태어난 영주(현 영천) 임고면에서 16세까지 살았고, 이어서 관향인 포항 오천으로 옮겨 7,8년을 살았다. 영천이나 오천에는 이름난 유학자가 없어서 포은이 이런 성리학의 난해한 유서들을 사사받을만한 사람이 없었다.

기록에 의하면 포은은 출사하고난 뒤 고향 영천과 오천을 단 한번도 찾지 못했다고 한다.

그의 실력이 객관적으로 테스트 당한 것이 21세(1357)에 어사대부 신군평의 주관하에 치른 국자감시에서 3등을 하였다.이어서(1360) 24세 치른 예부시과거의 연괴삼장에서 모두 장원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당시 주관자는 정당문학 지공거 김득배와 추밀원직학사 동지공거 한방신이었다.

당시 관례대로 과거에서 관리자와 합격자 간에는 좌주라는 관계가 성립되어 일생 사부로 모시게 되었다. 김득배가 후에 원의 대군을 물리치고서도 김용의 모함에 빠져 참형을 당하고 시신이 버려졌을 때, 포은이 오해를 무릅쓰고 시신을 수습하고 장례를 치러 모신 것이나, 한방신이 여진정벌에 나섰을 때, 그의 부장으로서 포은이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호종한 것등은 이런 관계를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사서오경 중에서도 특히 춘추가 군신간의 강상의 예를 다루고 있어서, 포은은 이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 방대한 양을 다 외우고 있어서 그는 언제 어디서나 이 책의 구절대로 행동하고 사고하였다.

포은은 거창한 학문적인 저서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203편의 시를 실은 포은 문집은 전해지고 있다. 이 문집 속에서 아내에 대한 언급은 단 한마디도 없고, 두 아들 종성과 종본에 대해서는 할 일을 다하고 여가가 날 때에만 잠시 생각한다는 구절이 나온다. 그는 죽으나 사나 나라 걱정이고 임금 걱정이다.

그는 출사하고 난 후 여진과 왜구와의 싸움터에서 보낸 몇 년을 제외하고 5.5년간 성균관에서 보냈고, 15,6년은 명과 일본의 사신으로 보냈으며, 말년 4,5년간에 비로소 조정으로 들어가 수문화시중의 막중한 직책을 맡았다. 수문화시중은 문화시중과 같은 비중의 수상직이었다. 좌의정 우의정 정도였다.

포은의 일생은 춘추의 가르침을 따르다보니, 나라를 보살피느라 잠시도 엉덩짝을 방석위에다가 붙일 수 없었다. 그는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합격하자말자, 나라가 당하고 있던 야인들의 침략을 쳐부수기 위해 한방신장군의 종사관으로 나서게 되고, 여진 정벌에 나선 이성계의 조전장군으로 전장에 나서게 된다.

포은 정몽주의 보살핌을 받아본 정벌군의 장군들은 그의 해박한 전략적 지식에 탄복하였다고 한다. 손자병법은 물론이고 육도삼략에 이르기까지 그가 구사하지 못하는 병술이 없었다고 한다.

포은이 군략가로서의 진가를 발휘한 전투가 황산전투이다. 당시 왜구의 침략은 사실 심각한 문제였다. 그것은 어쩌면 명나라나 원나라의 군대가 쳐들어오는 것 이상으로 고려로서는 골치덩이였다. 사실 왜구의 노략질 때문에 왕도인 개경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진 적도 있었다. 왜구 서너명이 훈도시와 일본도를 차고 조선의 해안에 침입해와서 어부 서너명을 죽이거나 납치해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많을 때는 백 여척 혹은 5백여척의 배가 수천명의 왜구를 싣고 와서 간이성을 짓고 장기간 주둔하면서 조선의 남해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아녀자를 납치해가는 것은 물론이고 어떤 때는 대읍도 공략하여 노략질을 했다. 청주까지 올라와서 아녀자를 납치하기도 하고, 상주를 통째로 점령하기도 했다. 이들은 해적으로서의 왜구가 아니라, 당시 남북으로 갈라져 긴 싸움을 하던 일본 땅 서부의 군벌들이 모자라는 식량과 병졸들을 보충하기 위한 전쟁이었다.

조정에서는 긴급히 이성계를 운봉 황산전투에 투입하였다.이성계는 문관 포은 정몽주를 자신의 조전장수로 배치해줄 것을 왕에게 요청하였다. 오랫동안 지고 이기는 지루한 전투가 지리산 서쪽사면 운봉전역에서 벌어졌다. 결국 이성계는 포은의 전략을 채택한 결과 적을 괴멸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개경으로 회군길에 자신의 관향인 전주의 오목대에서 승전을 축하하는 잔치를 벌였을 때, 이성계는 포은의 공을 적극 치하하였다. 그러나 그는 내심으로는 만사에 만만하지 않은 역량을 보이고 있는 포은의 존재에 일종에 공포심을 느끼게 시작하였다고 한다.

야인정벌과 왜구정벌에 투입되었던 포은은 점차적으로 안정을 얻어 성균관에서 일을 하게 된다.

당시 고려를 지배하던 유학의 거성은 목은 이색이었다. 목은은 성균관 대사성으로서 존경과 힘을 아울러 갖추고 있었다. 목은은 포은의 학문과 인품을 잘 알고 있었다. 포은에게 “해동 유학의 조종”이라는 평가를 내린 사람이 바로 목은 이색이었다. 도대체 포은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사서오경을 제대로 이해하고 학생들에게 강의할 수 없다는 평가였다.

당시만 하더라도 성균관에는 목은 이색을 비롯하여, 양촌 권근, 삼봉 정도전, 도은 이숭인, 야은 길재, 둔촌 이집, 척약재 김구용, 반남 박상충 등등 쟁쟁한 신진사대부들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들은 이인임등 친원파들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고, 불교와 도교와는 거리를 두고 성리학을 신봉하기 시작하는 신진사류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새로이 중원의 주인이 되어가고 있는 명과의 친선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들 신진사류들은 반원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던 공민왕의 지원을 받아 승승장구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과감하게 개혁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친명정책은 서리를 맞게 되었다. 공민왕이 시해되고, 그의 개혁정책을 추진하던 신돈이 암살되었기 때문이었다.

고려조정의 이런 낌새를 눈치챈 명의 홍무제(주원장)는 고려에 대해 강경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래서 고려조정에서는 사신을 파견하여 황제의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 사신으로는 포은이 뽑혔다.

사신으로 선듯 나서려는 사람이 없었다. 당시 재상이던 임견미는 칭병하고 적극적으로 고사하였다. 우왕은 정사 홍사범의 서장관으로 포은을 선발하였다. 목숨을 내건 일대 위험한 사행길이었다. 왜냐하면 앞선 사행단들이 홍무제의 노여움을 사서 전부 중국 남부지방으로 귀양을 갔기 때문이다. 친원정책을 버리지 못하고 양다리 외교를 펴는 고려의 사신들을 살려서 보낼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조정의 입장에서는 반원정책을 급속하게 취할 수도 없었다. 원이 중원의 대전에서 명에게 져서 북쪽으로 쫓겨가서 상도에 북원을 세우고 있지만, 100년 가까이 원의 사위국으로서 모든 황녀가 원나라 공주였고, 모든 문물이 원나라 식으로 되어 있는 마당에 하루아침에 정책을 바꿀 수도 없었던 것이다.

성리학의 선봉이랄 수 있는 목은 이색의 소극적인 자세와 친원파의 거두인 최영의 그늘도 짙었고, 뭐니뭐니 해도 당시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인임이 친원파의 거두였다. 성리학을 수입하여 진작시키고 나라 정책의 근간으로 삼으려던 신진사류의 두목이던 목은 이색은 친원파까지는 아니더라도 이들 젊은 학자들의 조류에 소극적이었다.그것은 그가 그의 아버지 이곡으로부터 원의 수도이던 대도에 오래 머물렀고 거기에서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까지 살았던 경력 때문이었다.

북원은 그들의 심양왕 납합출을 보내, 적극적으로 사위국으로서의 책무를 다해줄 것을 주문하였다. 이런 마당에 포은이 명의 사신으로 뽑힌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사신이 귀양가는 것은 물론이고, 강력한 신진 명나라 대군의 침략을 부를 수 있는 찰나였다.

35세부터 51세까지 인생의 황금기를 포은은 명나라와 왜에게서 나라룰 구하기 위한 사신생활에 투입하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아니면 이 죽음을 부르는 무서운 사신행을 수락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라정신은 춘추의 최고 지향정신이다.

포은은 도합 여섯 번의 명나라 사신행을 감행하여 나라를 명의 출병에서 구한다.

그리고 십 개월 동안 일본행을 감행하여, 왜구들의 침략을 막는 조약을 체결했고, 그 동안 왜구들에 붙잡혀갔던 수많은 여자들과 청년들을 데리고 왔다.

명나라로 사신 간다고 하지만, 그것은 사실 목숨을 내어놓고 떠나는 죽음의 길이었다. 당시 명의 수도는 북경이 아니라, 양자강 북쪽에 있는 남경이었다. 개경에서는 약 8천리 길이었고, 말을 타고 가더라도 최소한 3개월이 걸리는 거리였다.

포은이 하평촉사(촉나라를 평정한데 대한 축하사신)로 선발되었을 때, 그에게는 겨우 두 달이 남아 있었다. 우려하는 우왕의 우려를 달래기를 포은은 잠을 자지 않고 말을 달리겠다고 했다. 석달간을 잠을 자지 않고 말을 탈 수 있겠느냐고 물으니, 말 위에서 자면서 가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경축식 바로 전날 남경에 닿아 그는 가까스로 홍무제 주원장을 알현하였다고 한다. 그래도 정성으로 홍무제의 노여움만은 풀었다.

그러나 귀국길에 발해만의 허산에서 광풍을 만나 정사 홍사범을 비롯한 전원이 익사하였고, 포은만이 겨우 헤엄을 쳐서 무인도에 올랐다. 그는 수초의 일종인 말다래를 먹으면서 13일간을 버티었다. 마침 지나가던 중국배에 발견되어 정신을 잃은 채 중국으로 실려가게 되었다.

포은은 자신은 죽어도 좋으나, 황제께서 고려국왕에게 내린 계문을 잃어버렸으니 황제를 다시 한번 알현하게 해 달라고 청하였다. 그의 모습이 너무나 진지하고 처량하여 중국의 성주는 그를 황제에게로 데리고 가서 면담의 기회를 가졌다.

황제는 너무나 아름다운 중국시를 짓던 이 고려의 젊은 시인을 기억하고 있었다. 사실은 전번에도 이 자들을 전부 귀양보내려고 했으나, 포은의 중국어 필담으로 보여주는 중국어문의 실력에 감복하였기에 그에게 은전을 내린 것이었다.

이 신통한 고려국의 젊은 사신을 재 접하고 놀란 홍무제는 운남으로 귀양가 있는 전번 고려사신을 비롯한 사신 호종인들을 불러올려서 고려로 무사히 귀환케했고 고려국에 대한 괘심한 마음을 풀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포은은 일년 반이란 세월을 소비하였다. 그 험한 사행길에서 호위력과 보조인력마저 잃어버린 상태에서 기아와 굶주림에 시달린 포은이 무엇을 먹고 입으며 사신의 행색을 갖출 수 있었으며,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다.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초인적인 인내와 나라와 고려왕을 존경하고 모시는 누구도 흉내내지 못하는 그 특출난 존왕의식만이 그를 지배했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고려의 대명정책은 쉽게 풀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포은이 불려갔다. 그것은 조정내의 실권을 잡고 있는 파들이 친원파이들이기 때문이다. 급기야는 고려고관인 김의가 고려국의 특산물인 제주도말을 2000 필 사러온 명나라 사신 채빈을 죽여버리고, 병졸 200명과 말 천 필을 가지고 북원으로 도망친 사건이 발생하였다.

명은 크게 노하여 조선에 철령위 설치를 요구하게 되었다. 1388 년 고려조정은 명의 철령위 설치요구에 격노하여, 요동공격군을 편성하고 명나라 사신 21명의 목을 땄다. 그리고 철저하게 친명파들을 숙청하였다. 포은은 경상도 언양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런 정책의 채택은 꼭 명나라와 한판 붙자는 것이 아니라, 명이 원을 완전히 잡지 못한 상태에서 고려에 파병할 여유가 없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조정은 다시 귀양가 있는 포은을 불러올려 대명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우왕 초기 포은은 거의 일년에 한번 꼴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는 것을 보게된다. 포은은 자기 한 목숨이 문제가 아니라 사직과 왕의 안위가 언제나 우선 순위였다.

1372년 3월부터 1397년 3월까지 25년간 고려조정은 16번이나 명나라에 사신을 보냈다. 포은 정몽주가 제일 많은 6번이고, 이숭인이 4번, 정도전이 3번, 권근이 4번이다. 첫 번 네 번의 사신을 포은 정몽주가 먼저 다녀왔다. 그래서 다음 번의 사신들은 포은이 개척한 사신길을 답습하면 되었다. 포은의 경우 6번 중에서 3번은 고려와 명 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요동에서 입국이 불허되어 돌아오는 경우였다. 얼마나 당시 고려 조정이 명과 원 사이에서 곤욕을 치루었는가를 이 사행길 하나만을 보고서도 알만하다.

위화도 회군도 사실은 친원파와 친명파간의 일대 회전이었다. 위화도 회군이 성공함으로써 절대적인 우위에 서게된 것이 친명파이다. 위화도 회군이 성공함으로써 난공불락의 친원파의 거두 최영이 거세된 것이다.

일본 사신길은 사실 명 사신길보다 훨씬 더 위험했다. 일본의 정국이 안정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군벌들이 서로 얽혀 살육전을 벌리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리고 포은다운 생각으로 일본은 미개국이었다. 국제관계에서 철저한 화이(華夷)론자였던 포은은 미개국과의 외교를 가장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들에게는 문화인다운 원칙과 금도가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중화와 오랑캐를 분명히 구분하는 것이 포은외교의 원칙이었다. 군벌 패가대를 만난 포은은 글 할줄 아는 사람과의 대화을 요구했고, 몇사람이 불려왔다. 서로들 한문으로 마음을 전한 끝에 당시 일본 최강의 군벌 패가대의 부하들은 다들 포은의 무릎 앞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포은의 글이 너무나 아름답고 정정당당하기 때문이었다. 그날 이후, 포은을 면담하려는 일인 지식인들이 장사진을 쳤다. 그래서 포은은 귀국길을 근 열달 이상 미루어야만 했다.

포은은 나라와 임금에게만 충성의 절의를 보인 것이 아니었다. 사서오경의 정신인 충과 더부러 효에 있어서도 그를 따를 사람이 없었다. 그는 자신의 아버지인 정운관(일성부원군)의 여묘살이를 3년하였고, 모친인 경주이씨의 여묘살이도 3년간 하여 백성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여묘살이란 묘소 옆에 초막을 치고 묘를 지키면서 죽만 먹고 아침 저녁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을 의미한다. 백년 가까이 원의 지배를 받았던 고려에서는 원의 풍습을 따라 이런 시묘살이를 1년만 하는 것으로 거의 풍습화하였으나, 포은의 효심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충과 효의 실천궁행에 있어서 포은을 따를 만한 신하와 후손은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털어도 그 누구도 없었다.

이방원의 사주를 받은 조영규의 철퇴로 삶을 마감한 포은은 죽음 후에 잊혀졌는가 하면 요원의 불길처럼 그의 애국충정의 성리학 정신은 불타올랐다.

그의 죽음 9년만에 그는 복권되었고, 충신서열의 제일 앞자리에 서게 되었다. 영의정으로 추승되었고, 문충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포은의 복권을 제일 먼저 주장한 사람은 좌상 권근이었다. 태종 이방원이 자신이 포은을 죽인 장본인이기는 했지만, 그는 이제 창업이 아니라 수성이 입장에 서게 되니 포은 같은 충신이 필요하다는 절실한 감정을 가지게 되었고, 무엇보다도 비록 나이는 포은보다 어렸지만 그의 생시에 접해본 포은의 한결같은 우국충정의 정신에 감화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16년간 중국을 발로 뛰는 그의 모습을 자신의 뇌리에서 지울수 없었던 것이다.

세종도 고려에서 구해낼만한 신하로는 포은과 길재가 있을 뿐이라는 말을 했고, 포은과 길재 사이에도 차이가 있다는 말을 했다. 고려조의 대학자 목은 이색은 그 절의가 포은에 미치지 못함을 지적하였다. 세종은 사직이 지녀야할 충신도에 제일 먼저 포은의 얼굴을 그릴 것을 명했다.

세조 때 집현전 직제학 양성지가 처음으로 포은의 문묘제향을 건의하였다.

성종 때에는 대사간 김수손이, 충신 일호인 포은의 자손들이 대가 자주 끊겨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있어서 생활이 어려우니 특별급료를 내리거나 사직에 등용하여 포은을 제대로 제향토록 해 달라고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시행했다.

중종 때에는 재야의 유생들의 한결같은 청원으로 드디어 포은을 문묘에 배향하는 결단을 내리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이방원에 의해 충신일호로 복권된 후 거의 백년만의 쾌거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난 후, 조선사직의 신하가 아닌 고려의 신하로서 문묘배향 제일호를 기록하였다. 얼마나 조선의 유학자들이 포은의 충절과 높은 학문을 숭앙하였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결과였다. 조선 개국 백여년만에 이루어진 이 포은의 문묘(공자묘) 배향 결정은 포은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하였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비록 전조였지만, 임금을 섬기는 신하로서 포은이 보여준 충의의 정신과 그가 남긴 학문의 경지는 그를 워낙 조선사에 우뚝서게 한 것이다.

우암 송시열은 포은의 가문은 개인의 것이 아니라 사직과 함께 해야함을 강력히 주장하여 언제 어디서나 포은의 가문을 나라의 차원에서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퇴계 이황은 자신의 문생들인 영남유생들을 움직여 포은의 출생지인 영천에 임고서원을 짓게 하였다. 임고서원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13개의 서원에서 포은을 주신으로 모시게 했다. 용인땅에 삼백만평의 묘원을 조성하여, 대현을 모신다는 뜻의 모현면이라는 현의 명칭을 내림과 동시에 그의 묘소를 정리했다.

용인시와 영천시에서는 포은의 묘역과 임고서원을 대대적으로 보수하여 성역화하였다. 봄과 가을로 포은 추모의 문화재를 열고 있다. 대한민국이 비록 왕조국가는 아니지만, 목숨을 던져 나라를 지키고자 한 포은의 애국정신을 본받고, 초인적인 6년 시묘살이에서 오는 육신의 고달픔을 인내로 이기고 생을 주신 부모에게 효를 다하고자한 포은의 조상숭배의 정신을 기리기 위함이다.

우리 조선족의 정부인 대한민국이 아무리 서양문물에 물들었다고는 하지만, 우리민족의 정신사의 기저를 흐르는 근본은 역시 성리학의 정신인 충과 효임에 틀림이 없는 것같다. 그런 면에서 한국사 5000년에 포은만큼 온 국민을 감동시키는 인물이 있겠는가.

포은 종약원에서는 청량리 재기동에 칠층건물을 종약원건물로 마련하여서 운영하고 있다. 묘역의 땅 약간을 처분하여 마련하였다는 소문을 들었다. 영일정씨 포은공파에서는 종보를 간행하고 있는데, 말손(22대)의 한 사람인 필자는 최근에 종보에 “고려왕조와 포은 정몽주”라는 졸문을 기고하여, 4회째 연재하고 있다.

포은 사진.JPG

 포은 정몽주의 영정은 두 가지가 있다. 화를 당한 개경의 숭양서원본이 있고,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에 있는 충열서원 본이 있다.임고서원 본도 있는데 이것은 후대의 것이다.

 

모현면 능.JPG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에 있는 포은의 묘소이다. 이 묘역에는 두 아들 종성과 종본의 묘가 있고, 장손 정보의 묘도 있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용인시 포은의 묘역일대를 성역화하였고, 묘역 일대를 대현의 묘소가 있는 곳이라 하여 모현면으로 명명하였다.



 

출처 : 경대사대 부중고1215회 동기회
글쓴이 : 정소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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