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人物情報 參考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김정행 대한체육회장의 ‘용인대’/ 동아일보

鶴山 徐 仁 2014. 7. 20. 13:30

[블랙야크와 함께하는 내 마음의 그곳]김정행 대한체육회장의 ‘용인대’

기사입력 2014-07-19 03:00:00 기사수정 2014-07-19 03:00:00

 
꼴찌 신입생서 총장까지… 유도 10단의 인생 업어치기

 

용인대를 배경으로 서있는 김정행 회장. 그는 1961년 입학 이후 학생 조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교수 총장(1994-2014)을 두루 거쳤다. 그의 인생 팔 할은 용인대가 키웠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인=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김정행 대한체육회장(71)은 뼛속까지 유도인이다. 각진 얼굴에 무뚝뚝한 표정. 체구(171cm, 97kg)가 산처럼 당당하다. 몸무게가 선수 시절(93kg 이하)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이 없다. 근육질에 부리부리한 눈. 주름살도 잘 보이지 않는다.

김정행은 단순하다. 솔직담백하다. 꼼수 같은 걸 모른다. 내성적이고 의외로 섬세하다. 6남매 중 유일한 아들로 컸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광복이 되던 세 살 때 어머니 등에 업혀 대한해협을 건넜다. 밑으로 5명이 여동생이다. 포항의 부잣집 아들. 아버지는 트럭 120여 대를 굴리는 화물회사 사장이었다. 집에선 별도로 명태 꽁치잡이 배를 부리고 있었다. 뭐 하나 남부러울 게 없었다.

집안에선 김정행을 상과대학에 보내 사업가로 키울 요량이었다. 하지만 김정행은 유도에 미쳐버렸다. 설마 그러다가 말겠지 했는데 커갈수록 그게 아니었다. 급기야 유도장 출입금지령이 떨어졌다. 김정행은 등교 거부로 맞섰다. 포항고에 합격해놓고도 한 달 동안 가지 않았다. 집안에선 난리가 났다. 결국 뒤늦게 동지상고(현 동지고)에 입학했다. 당연히 유도를 계속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1학년을 마치고 유도부가 있는 대구 대건고로 전학을 갔다. 대구 하숙집에서 나는 밥을 가장 많이 먹는 학생으로 통했다. 그런데 그렇게 먹고도 늘 배가 고팠다. 거의 매일 우동에 오뎅을 사먹고, 짜장면, 빵 같은 걸 간식으로 먹어야 허기가 가셨다. 어머니는 꿀에 인삼을 재거나 개소주를 내어 보내주기 바빴다. 내 동료들은 사카린 물을 마시며 운동을 했던 시절이었다. 난 아마 전생에 유도와 무슨 인연이 있었던 것 같다. 어린시절 대한유도학교 학생들이 포항에 내려와 우리 동네에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그 학생들의 유도자랑 ‘뻥’에 그만 넋이 나갔다. 세상에 유도만큼 멋있는 스포츠가 있을까 싶었다. 한때 배웠던 태권도는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그 뒤 내 친구 아버님인 문달식 선생(전 포항시장)이 운영하는 유도장에서 낙법을 처음 배웠다. 꿈만 같았다. 포항중 3학년 때였는데 그만큼 남들보다 유도입문이 늦었다. 그래도 행복했다.”

1961년 김정행은 당시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있던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에 들어갔다. 그런데 유도실력이 50명 중 꼴찌였다. 한심했다. 선배들은 연습하자면서 김정행을 사정없이 매트에 내동댕이쳤다. 그만 때려치우고 싶었다. 몇 번이나 보따리를 쌌다. 그래도 서울역까지 갔다가는 되돌아왔다.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이를 악물었다. 눈에 불을 켜고 유도에 매달렸다. 우선 매달 열리는 교내선수권대회에 열중했다. 그래도 처음 한두 달은 밑에서 헤맸다. 하지만 셋째 달부터는 슬슬 성적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2학기엔 선두권에서 놀았다. 결국 김정행은 수석졸업을 했고, 1965년 졸업과 동시에 조교로 학교에 남았다. 그 뒤 그는 학생과장, 훈련과장, 학생처장, 기획처장, 부총장을 거쳐 1994년 용인대 총장에 올랐다.

“올 2월에 총장에서 물러났으니 입학(1961) 때부터 치면 53년 동안 내 생의 대부분을 용인대에서 보냈다고 할 수 있다. 나이 열여덟에 입학해서 일흔하나까지 학생 조교 전임강사 조교수 부교수 총장을 두루 거쳤다. 우스갯소리지만, 흔히 우리나라 3대 끈끈한 집단으로 해병전우회, 호남향우회, 고대동문회를 꼽는데 용인대도 이에 못지않다고 생각한다. 5만 동문들의 결집력이 대단하다. 선후배 간의 예의와 배려가 따뜻하고 훈훈하다. 의리가 있다고나 할까. 아마도 서울헬스장 코치의 70∼80%가 용인대 출신일 것이다. 용인대 출신이 운영하는 태권도장도 전국 곳곳에 깔려있다. 20년 동안 용인대 총장을 한 사람으로서 정말 뿌듯하다.”

김정행은 지난해 봄 제38대 대한체육회장에 선출됐다. 이에리사 의원(60)과 막판까지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체육회장 선거사상 최초의 성대결, 최초의 국가대표(유도-탁구) 맞대결이었다. 공교롭게도 용인대 총장과 교수의 경쟁이기도 했다. 김정행은 총 54표 중 28표를 얻어 과반을 아슬아슬하게 넘었다. 마침내 3번 도전 끝에 대한민국 스포츠대통령이 된 것이다. 25표를 얻은 이 의원도 선전했다(무효 1표).

선거후 김정행은 이 의원을 부회장으로 모셨다고 발표했다. 이에 이 의원은 ‘어떤 제의도 받은바 없으며, 일방적인 보도자료 배포는 비상식적인 행위’라고 펄쩍 뛰었다. 김정행은 당황했다. 선거후 수차례 시도 끝에 이뤄진 통화에서 ‘우리 함께하자, 조만간 만나자’고 하자, 이 의원은 ‘건강 잘 챙기세요’라고 했었다. 김정행은 그걸 ‘동의한 것’으로 해석했다.

“지금도 이 의원 몫으로 부회장 자리를 비워놓았다. 우리 두 사람의 스포츠철학은 다른 게 하나도 없다. 이 의원 같은 체육계 인재가 힘을 보태줘야 한다. 이 의원은 내가 용인대교수로 임용했고, 학교기획처장을 맡길 정도로 아꼈다. 지금도 변함없다. 태릉선수촌장으로도 적극 추천했었다. 난 경기인 출신 회장이다. 정말 잘 해보고 싶다. 그런데 막상 체육회장이 되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 여기저기서 흔드는 사람이 많다. 예산은 이미 다 짜여있고, 그대로 집행할 수밖에 없다. 행정부 입법부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구조다. 우선 대한체육회의 재정자립이 중요하다. 뭘 해보려고 해도 돈이 없다. 정부에서 주는 돈은 이미 쓸 곳이 정해져 내려온다. 물론 우리 체육회도 내부적으로 바꿔나가야 한다. 타성에 젖어 정체된 느낌이 있다. 많이 아쉬운 게 사실이다. 조금씩 서서히 바꿔나가고 있다.”

김정행은 1978년 결혼했다. 맞선을 봤는데 어머님이 좋다고 해서 두말없이 따랐다.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던 조명자 여사와는 여덟 살 차. 딸(35), 아들(34) 연년생을 두었다. 요즘 손자들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는 해물을 좋아한다. 삼시 세 끼 갯가음식만 먹은 적도 부지기수다. 고래 고기도 많이 먹었다. 생선이나 미역국도 좋아한다. 고교 하숙시절 간식으로 먹어댔던 국수도 즐긴다.

김정행은 하루 1시간 정도 걷는다. 그게 운동의 전부다. 골프는 싫다. 몇 년 전만 해도 마지못해 나갔었지만, 요즘은 아예 골프장 발걸음을 끊었다. 하기야 인도어골프장 한번 안나갔으니 공이 제대로 나갈리 없다.

그는 자기 PR를 못한다. 그저 묵묵하게 한 우물만 판다. 그의 신조도 ‘초지일관’. 그는 생각보다 꼼꼼하고 치밀하다. 용인대 총장 시절 250여 명의 교수 신상명세를 머릿속에 다 입력해놓고 다녔을 정도다. 교수의 습관에서부터 가족사항까지 훤히 꿰뚫고 있었다.

김정행은 TV사극을 즐겨본다. 최근에 끝난 ‘정도전’도 빼놓지 않고 보았다. 정도전과 정몽주의 우정에 눈시울을 붉혔다. 정도전도 대단하지만, 이방원도 똑똑했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이씨왕조도 없었을 것이다. 세종대왕 같은 아들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이방원 부인 민 씨의 내조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었다.

“결국 사람을 잘 써야 한다. 나도 사람 쓸 때는 조심조심 몇 번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그래도 실수할 때가 있다. 이젠 나도 삶의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난 평생 유도인이자 체육인으로 살았다. 단 한번도 한눈판 적 없다. 체육회장 마치면 체육계 원로로 남고 싶다. 지저분하게 뭘 하겠다고 나서고 싶지 않다. 차기 체육회장 출마? 허허허. 더이상 유도회장, 체육회장에 눈곱만치도 미련 없다. 마음 다 접었다. 집사람과 손자들하고 시간 보내는 게 좋다. 내 호가 ‘月浦(월포)’인데 그곳은 아버지의 포항 고향이다. 자주 찾고 싶다. 이제 그만해야지. 그게 맞는 답이다. 그래야 죽을 때 욕이라도 덜 먹을 게 아닌가.”  


▼ 연습하다 팔목 뚝… 끝내 못이룬 올림픽 꿈 ▼

“안병근 이원희 왕기춘… 제자들 보면 안먹어도 배불러”


 

10여 년 만에 유도복을 입어본다는 김정행 10단.
김정행 회장은 유도 10단이다. 생존인으로서는 장경순 전 국회부의장(92), 이방근 재미유도인(90)과 함께 세 사람뿐이다. 고인이 된 석진경(1912∼1990), 신도환 씨(1922∼2004)를 포함해도 역대 5명이 전부다.

유도 7∼10단은 명예다. 선수생활에서부터 심판활동, 한국유도 기여도 등 한 유도인의 일생을 심의위원회에서 심사해 결정한다. 김 회장은 5단에서부터 10단까지 연거푸 최연소로 승단했다. 9, 10단은 허리에 빨간 띠를 맨다. 6, 7, 8단은 흰색과 빨간색이 섞인 알록달록한 띠를 맨다.

김정행은 1967년 도쿄유니버시아드에서 은메달(93kg 이하)을 따냈다. 하지만 올림픽과는 인연이 닿지 못했다. 그 이듬해 멕시코올림픽에서 유도가 정식종목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무척 아쉬웠다. 당시 김정행은 빗당겨치기로 강호를 휩쓸고 있었다. 유니버시아드대회 때도 빗당겨치기 한판승으로 승승장구 결승까지 올랐다. 빗당겨치기는 후배 이원희 왕기춘의 간판기술이기도 하다.

“결승에서 일본선수에게 밭다리후리기 한판으로 졌지만 막상 붙어보니 일본과도 한번 해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일본유도는 넘을 수 없는 산이라고 여겼다. 민관식 당시 체육회장(1918∼2006)이 ‘돼지야, 잘했다’며 내 등을 두드려 주던 생각이 난다. 유니버시아드은메달 소식에 신문들은 호외까지 냈고, 고향 포항에선 해병대군악대의 연주와 함께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그 이후 1969, 1971년 세계선수권에 나가며 올림픽 꿈을 다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연습하다가 그만 팔목이 부러졌다. 1972 뮌헨올림픽 출전 꿈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그렇다고 거기서 멈출 수는 없었다. 후배들이 있었다. 어찌 보면 한국유도는 종주국 일본유도를 넘어서기 위한 피와 땀과 눈물의 역사였다. 나는 못했지만 내 후배들이라면 얼마든지 그들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렇다. 안병근, 김미정, 이원희, 최민호, 김재범, 송대남(교육대학원졸업)…. 이들이 해냈다. 모두 김 회장이 키운 용인대 출신 역대 유도 올림픽금메달리스트들이다. 그뿐인가. 올림픽은메달을 따낸 장은경, 황정오, 윤현, 김민수, 정선용, 현숙희, 조인철, 왕기춘 등도 김 회장의 가르침을 받았다. 금메달과 은메달은 종이 한 장 차이. 그것은 그날 컨디션과 운이 따라줘야 한다.

용인대 유도는 역대올림픽에서 금 6, 은 9, 동 11개를 따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도 금 18, 은 5, 동 28개를 따냈고, 아시아경기대회에선 금 21, 은 12, 동 20개를 캐냈다(용인대는 태권도에서도 올림픽 금 2, 은 1 그리고 배드민턴에선 금 1, 은 2, 동 1개를 따냈다. 레슬링, 복싱, 탁구에선 모두 은 5, 동 6개).

 

“후배들만 보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다. 난 못했지만, 내가 키운 후배들은 일본을 넘어 세계유도 정상에 섰다. 올림픽메달리스트는 아무나 되는 게 아니다. 일단 순발력 근력 등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 그 다음엔 유도기본이 탄탄해야 한다. 어릴 때 한번 기본을 잘 못 배우면 평생 고치지 못한다. 그만큼 지도자가 중요하다. 마지막으로 성실하고 사람 됨됨이가 갖춰줘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타고났어도 게으름을 피우면 끝이다. 남 놀 때 같이 놀고, 남 잠잘 때 잠자면서 어떻게 올림픽금메달리스트가 될 수 있겠는가. 더욱 중요한 것은 먼저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이다. 품성이 좋지 못하면 잠시는 반짝할지 몰라도, 길게 가지 못한다. 간혹 그런 후배들을 볼 땐 참 안타깝다.”

한국유도는 한때 용인대와 비용인대 출신의 집안싸움으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1995년 김 회장이 대한유도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잠잠해졌다. 김 회장이 비용인대 출신들을 대부분 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용인대 출신들이 역차별을 받는다’는 말이 들릴 정도였다. 김 회장은 그런 이야기가 들릴 때마다 알고도 모른 척 한쪽 귀로 흘렸다.

현재 용인대 무도대학엔 조용철 안병근, 김미정, 전기영, 이원희, 최민호, 윤현, 조인철, 장성호 등 유도 올림픽메달리스트 출신 교수들이 수두룩하다. 모두 김 회장의 작품이다. 알게 모르게 그의 입김이 절대적이었다.

“명색이 올림픽유도 메달리스트인데, 그들이 선수생활뿐만 아니라 그 이후에도 잘살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유도선배로서 그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그들은 또 학교에서 미래의 올림픽꿈나무들을 키우고…. 그러다보면 한국유도가 백년 천년 우람한 느티나무로 자라지 않겠는가.”  


●김정행 약력

♣학력 ▽1943년 8월 16일(음력) 일본 후쿠오카 출생 ▽포항중앙초 졸업(8회) ▽포항중 졸업(13회) ▽대구대건고 졸업(1961) ▽대한유도학교(현 용인대) 유도학과 졸업(1965) ▽건국대행정대학원 졸업(교육학석사·1976) ▽일본대 이학박사(스포츠의학·1997) ▽중국호남사범대 명예체육학박사(2007) ▽러시아레스카프트대 명예체육학박사(2010) ▽스페인카밀로호세셀라대 명예체육학박사(2012) ▽일본체육대 명예체육과학박사(2014)

 
♣경력 ▽도쿄유니버시아드대회 유도 은메달(1967) ▽용인대총장(1994∼2014) ▽대한유도회장(1995∼2013) ▽대한올림픽위원회위원(1995∼2002)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한국선수단장(1998) ▽동아시아유도연맹회장(2003∼2011) ▽대한체육회부회장(2005∼2013) ▽아시아유도연맹회장(2006∼2007)▽국제유도연맹부회장(2006∼2007)▽베이징올림픽 한국선수단장(2008)

♣상훈 ▽대한민국체육상지도상(1987) ▽대한민국체육훈장백마장(1992) ▽대한민국국민상(1997) ▽대한민국체육훈장청룡장(1998) ▽몽골NOC올림픽훈장(2001) ▽국제유도연맹공로은상(2002) ▽IOC훈장은상(2003) ▽국제유도연맹공로금상(2008) ▽스페인올림픽위원회특별공로상(2010)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