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현의 Behind War:롬멜⑮"가족이 공개재판을 피하려면 자살하라!" 히틀러의 최후 통첩에 롬멜은... [끝] |
- 남도현
- DHT AGENCY 대표
- E-mail : knclogix@yahoo.co.kr
- 젊은 시절부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세계사, 전쟁사 및 군..
입력 : 2014.02.22 05:46
어이없는 최후
“자살하여 귀관과 귀관의 가족이 공개재판의 수치를 면하게 하라. 재판을 택한다면 귀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롬멜은 음독하여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자살이 아닌 강요에 의한 타살이었고, 한때나마 존경했던 잔인한 독재자로부터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히틀러는 롬멜이 부상으로 인하여 전사하였다고 발표하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하지만 일말의 동정심이 남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단지 마지막까지 롬멜을 이용했던 것뿐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영웅이 되어버린 그를 암살사건과 관련된 인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만일 롬멜이 이번 사건에 연관되어 죽은 것이 알려진다면 총통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도 그만큼 약화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롬멜이 전상을 당해 집에서 요양하고 있던 10월 14일, 예전부터 안면이 있던 부르크도르프가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의례적인 인사가 오고간 후,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나서 부르크도르프는 다음과 같은 총통의 전갈을 전했다.
“자살하여 귀관과 귀관의 가족이 공개재판의 수치를 면하게 하라. 재판을 택한다면 귀관의 가족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질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롬멜은 음독하여 목숨을 끊었다. 그것은 자살이 아닌 강요에 의한 타살이었고, 한때나마 존경했던 잔인한 독재자로부터 사랑하는 가족을 지키기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히틀러는 롬멜이 부상으로 인하여 전사하였다고 발표하고 성대하게 장례를 치러주었다. 하지만 일말의 동정심이 남아서 그랬던 것은 아니었고 단지 마지막까지 롬멜을 이용했던 것뿐이었다. 히틀러는 독일 국민들에게 영웅이 되어버린 그를 암살사건과 관련된 인물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만일 롬멜이 이번 사건에 연관되어 죽은 것이 알려진다면 총통에 대한 국민들의 믿음도 그만큼 약화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 강요에 의해 자결한 롬멜의 장례식. 이처럼 나치와 히틀러는 끝까지 그를 선전도구로 이용하고자 했다.
롬멜이 그동안 히틀러를 발판으로 의지를 펼치려 했지만, 군인으로서의 야망 이외에 다른 쪽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점은 이후에도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요소다. 적어도 그가 책임졌던 전선에서 전쟁 범죄 행위로 규정할 만한 추악한 모습은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전쟁터에서 적을 상대하였을 때 매몰차게 공격하여 승리를 엮어냈지만 예의에 벗어난 행동은 하지 않았다.
동부전선에서 활약한 장군들이 나치와의 관계 여부를 불문하고 전후에 일단 전범으로 기소된 것만 보아도, 롬멜이 히틀러나 나치가 세세히 간섭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진 북아프리카전선에서 주로 활약한 것은 오히려 그의 흠결사항을 줄여주는 촉매제였는지 모른다. 군인으로서 명예욕이 컸던 롬멜은 그가 그토록 의지했던 인물이 너무나 잔혹한 악의 화신이어서 결국에는 잔혹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
역설적이지만 롬멜의 죽음은 그의 삶을 극적으로 만들어버렸다. 만일 살아서 종전을 맞았다면 역사에 유명한 독일군 장군 중 한 명으로만 남았겠지만, 생전에 이미 전쟁 영웅이 된 그는 그렇게 죽음으로써 오히려 그의 삶을 신화로 만들어버렸다. 그렇다 보니 추축국, 연합국 막론하고 당시 활약한 모든 지휘관을 통틀어 이처럼 강렬하게 발자국을 남긴 인물을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다.
- 최전선에서 정열적으로 지휘하는 롬멜. 최연소 독일 육군 원수라는 하나만으로 그의 업적을 충분히 알 수 있다.
인간 롬멜
아마 롬멜만큼 시공을 초월하여 대중에게 인기가 많은 장군도 드물다. 제2차 대전 당시 독일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적국이었던 연합국에서도 그에 대한 공공연한 찬사가 있었을 정도였다. 하지만 롬멜이 명장이라는 것은 틀림없고 이를 부인할 생각도 없지만, 그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한 부분이 의외로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들라면, 그가 최종적인 승리를 달성하지 못한 패장이었다는 사실이다.
제2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했으므로 독일의 모든 장군들은 패장이 맞지만 각 전역별로 세분한다면 그래도 승리를 이끈 인물들을 고를 수 있다. 그의 의지대로 지휘한 북아프리카전선에서 그는 신화가 되었지만 결국 패했다. 본국의 지원이 부족하여 어쩔 수 없었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지만 적어도 원수의 지위에 오른 인물이라면 이런 최악의 상황까지 고려하여 전선을 전략적으로 이끌었어야 했다.
- 토부룩에서 끝가지 저항하다 포로가 된 영국군. 롬멜은 전투도 잘했지만 신사적으로 상대를 대해 적들로부터도 경외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전략적으로 전쟁을 이끄는 방법은 부족했다.
그는 상부의 명령을 툭하면 무시하면서 정작 자신의 명령에 이의를 제기한 부대장들은 즉각 교체해버리고는 했다. 또 이탈리아군을 너무 불신하여 어려움 속에서도 보급과 진지 구축을 책임졌던 그들의 노고까지 무시했다. 대서양 방어 문제를 놓고 타협보다는 다른 장군들과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결국 그에게 아무런 득이 되지 못했다. 또한 지휘체계를 무시하고 총통을 직접 연결하던 행위도 올바른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융화하지 못하고 독단적으로 행동한 데는 자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은 긍정적으로 작용하기도 했지만 최후까지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뛰어난 장군이 되려했으나 가로막고 있던 장벽은 너무 많았다. 그런데 그런 장벽을 혼자의 힘만으로 돌파하려다 보니 많은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론적으로 그는 영웅이었지만 만들어진 영웅이었고, 신화를 썼지만 그것은 신이 아닌 인간이 쓴 신화였다.
- 롬멜의 데드마스크. 그는 영웅이었지만 만들어진 영웅이었고 결국 비참하게 내팽겨졌다.
남도현의 Behind War:롬멜⑭
히틀러 암살 제의를 받다. 그러나 암살은 실패하고…
- 남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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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4.02.14 03:53
독일군 최고 연장자인 룬트슈테트 원수가 사령관으로 있는 서부전선최고사령부는 방어의 중심이 되어야 했지만 정작 권위가 없었다. 대서양 방어 임무를 같은 원수 계급장을 달고 있는 롬멜이 전담하게 된 것도 하나의 이유였는데, 그는 북아프리카에서처럼 서부전선최고사령부는 물론이고 국방군최고사령부, 육군최고사령부도 거치지 않고 툭하면 총통에게 직접 보고하여 상급자나 지휘체계를 무시하는 행태를 재현했다.
그러나 이처럼 우려스러울 만큼 엉망진창인 지휘체계보다도 더 큰 문제는 연합군이 침공할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을 놓고 지휘부가 극단적으로 대립했다는 사실이었다.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방어의 중핵이 될 기갑부대의 배치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롬멜은 기갑부대를 해안 가까이 집결시켜놓았다가 적이 상륙하면 즉시 투입시켜 바다로 적을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북아프리카전선에서의 뼈저린 경험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우려스러울 만큼 엉망진창인 지휘체계보다도 더 큰 문제는 연합군이 침공할 경우에 대처하는 방법을 놓고 지휘부가 극단적으로 대립했다는 사실이었다. 롬멜과 룬트슈테트는 방어의 중핵이 될 기갑부대의 배치를 놓고 심각한 논쟁을 벌였다. 롬멜은 기갑부대를 해안 가까이 집결시켜놓았다가 적이 상륙하면 즉시 투입시켜 바다로 적을 몰아내자고 주장했다. 북아프리카전선에서의 뼈저린 경험 때문이었다.
- 서부전선최고사령관 룬트슈테트와 롬멜(오른쪽). 둘은 기갑부대의 활용 방안을 놓고 격론을 벌였지만 정작 기갑부대에 대한 통제권은 히틀러가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룬트슈테트는 연합군이 영국에서 가장 가까운 파드칼레 지역으로 상륙할 것으로 예상하고 기갑부대를 내륙 깊숙한 곳에 집중시켜놓았다가 연합군을 끌어들여 단 한 번의 기동전으로 일거에 격멸하는 전술을 구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일체의 양보도 없는 두 원수의 고집과 대립은 지휘부를 양분시켜놓을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롬멜의 견해가 옳았으나 이번에는 히틀러가 룬트슈테트의 견해에 손을 들어주었다.
하지만 양측 모두 가장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모두 다 기갑부대를 자신이 지휘하고 싶어 했지만, 어느 누구도 히틀러로부터 기갑부대의 지휘권을 받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막상 연합군이 상륙했을 때, 잠들어 있던 히틀러가 깨어날 때까지 독일의 전차들은 시동만 켜놓고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록 이후에 롬멜이 기갑부대를 지휘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끝난 상태였다.
-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 롬멜의 예측대로 연합군이 침공하였지만 정작 그는 베를린에 출장 중이어서 가장 중요한 날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은밀한 제의
1944년 6월 6일 미군과 영국군이 주축이 된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하자, 지난 4년간 평온했던 서부전선에서도 포탄과 화염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7월이 되었을 때 영리한 롬멜은 이 전쟁에서 독일이 승리할 수 없음을 깨닫고 총통과의 면담에서 정치외교적인 방법으로 서부전선을 종결할 것을 건의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충언에 히틀러는 분노했고 이것은 공고했던 그들의 관계를 완전히 멀어지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롬멜이 총통에 대한 실망감과 지휘체계에 대한 분쟁으로 엄청난 회의에 빠진 바로 그때, 프랑스 군정사령관인 슈튈프나겔의 밀명을 받은 호파커 중령이 그를 은밀히 찾아와 중대한 제안을 했다. 롬멜이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해주기를 바랐던 것이었다. 여기에 대해 롬멜이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대부분이지만 암살 계획에 적극 동의했다는 주장도 있다.
-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현장을 살펴보는 괴링. 극적으로 살아남은 히틀러는 복수에 혈안이 되었다.
총통의 비서관이자 나치 실세 중 한 명이었던 보어만이
1944년 9월 27일에 기록한 내용에 따르면, “슈튈프나겔, 호파커, 그리고 많은 피고들이 롬멜이 이 계획을 전적으로 이해했고, 암살 계획이 성공하면 새 정부를 위해 자신이 나설 것이라고 밝혔다고 한다”고 하였다. 보어만이 평소부터 롬멜을 싫어했기 때문에 음해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쨌든 롬멜이 총통 암살에 관한 모의를 미리 알고 있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롬멜은 B집단군 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선을 독려하다가 7월 17일 캉 인근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공습으로 머리에 커다란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는데 이것은 전선에서 보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7월 20일 드디어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서 희대의 독재자를 암살하기 위한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살아났고, 이때부터 엄청난 피의 복수극이 자행되었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던 히틀러의 복수극은 그야말로 잔인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는 즉시 비밀경찰이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 중 약 5,000명 정도가 교수형을 당했다. 히틀러는 사형수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촬영하게 한 뒤 이를 보면서 즐거워했을 만큼 눈이 뒤집혀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보어만의 음모가 더해져 무자비한 복수극의 칼날이 롬멜에게도 다가오게 되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롬멜은 B집단군 사령관으로서의 임무를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선을 독려하다가 7월 17일 캉 인근에서 벌어진 연합군의 공습으로 머리에 커다란 부상을 당해 후방으로 후송되었는데 이것은 전선에서 보았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 되었다. 7월 20일 드디어 동프로이센의 늑대굴에서 희대의 독재자를 암살하기 위한 커다란 폭발음이 울렸다. 하지만 히틀러는 살아났고, 이때부터 엄청난 피의 복수극이 자행되었다.
죽음 바로 직전까지 갔던 히틀러의 복수극은 그야말로 잔인했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가는 자는 즉시 비밀경찰이 체포하여 모진 고문을 가했다. 이 중 약 5,000명 정도가 교수형을 당했다. 히틀러는 사형수들이 죽어가는 장면을 촬영하게 한 뒤 이를 보면서 즐거워했을 만큼 눈이 뒤집혀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이를 기화로 보어만의 음모가 더해져 무자비한 복수극의 칼날이 롬멜에게도 다가오게 되었다.
- 그동안 든든한 후원자였던 히틀러가 롬멜에게 칼날을 겨누었다./사진=Independent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남도현의 Behind War:롬멜⑬
히틀러 명령 어기고 후퇴해 신임을 잃다
- 남도현
- DHT AGENCY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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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젊은 시절부타 역사에 관심이 많아 취미로 세계사, 전쟁사 및 군..
입력 : 2014.02.07 05:07
군부에 의해 거부되다
1942년 11월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은 무책임한 현지사수 명령만 남발하는 히틀러의 조치에 실망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타 독일 장군들과 달리 총통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정면으로 항거하여 부대를 후퇴시켰다. 사실 지금까지 북아프리카에서 보여준 독단적인 롬멜의 행동을 고려한다면 결코 이상할 것도 없는 결정이었지만 당연히 히틀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어서 이듬해 1월 트리폴리 함락 직전에 롬멜이 튀니지로 다시 철수하자 히틀러는 그를 인사조치하여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그런데 연속 된 후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롬멜의 군복을 벗기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다른 장군들에 대한 문책성 조치에 비하면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히틀러는 현지사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후퇴한 장군들의 군복을 벗기고는 했는데 그는 예외였던 것이다.
1942년 11월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롬멜은 무책임한 현지사수 명령만 남발하는 히틀러의 조치에 실망하였다. 하지만 그는 여타 독일 장군들과 달리 총통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지 않고 정면으로 항거하여 부대를 후퇴시켰다. 사실 지금까지 북아프리카에서 보여준 독단적인 롬멜의 행동을 고려한다면 결코 이상할 것도 없는 결정이었지만 당연히 히틀러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이때부터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지게 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어서 이듬해 1월 트리폴리 함락 직전에 롬멜이 튀니지로 다시 철수하자 히틀러는 그를 인사조치하여 본국으로 소환하였다. 그런데 연속 된 후퇴에도 불구하고 히틀러가 롬멜의 군복을 벗기지 않은 것은 지금까지 다른 장군들에 대한 문책성 조치에 비하면 그야말로 파격이 아닐 수 없었다. 히틀러는 현지사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후퇴한 장군들의 군복을 벗기고는 했는데 그는 예외였던 것이다.
- 엘 알라메인 전투 당시 독일군을 격파하고 전진하는 영국군 기갑부대. 이 전투에서 엄명을 어기고 롬멜은 부대를 후퇴시켰는데, 이후 히틀러와 관계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형식상 항복은 아르님이 했지만 엄밀히 말해 패장은 롬멜이었다. 그는 전술적으로 많은 승리를 엮어냈지만 전략적으로 전장을 다루지 못해 결국 패했고, 분명히 이런 결과에 대해 책임져야 했다. 하지만 어느덧 독일 국민에게 영웅이 되어버린 그를 함부로 쫓아낼 수는 없었다. 롬멜을 해임한다면 국민들에게 충격을 줄 가능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총통은 그를 계속 이용하기로 하였다.
하지만 본국에 소환된 롬멜은 한직에 머물러야 했다. 그것은 패전에 대한 일종의 문책이기도 했지만 군부에서 그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고 동부전선은 더욱 격렬하게 변해가던 중이었지만 히틀러에 의해 수많은 명장들이 해임되거나 면직되는 바람에 전선에서는 단 한 명의 장군도 아쉬운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롬멜을 원하는 곳은 없었다.
만일 명성만큼 뛰어나다고 평가하였다면 최연소 원수인 롬멜을 군부가 그냥 내버려둘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고집불통인 총통과 그나마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장군이라면 군부 입장에서 금상첨화였다. 하지만 정작 롬멜은 논외의 대상이었다. 이것은 무소불위의 히틀러조차도 군부의 반발을 무릅쓰고 그를 전선에 우격다짐으로 끼워 넣지 못했을 만큼 롬멜이 군부에서 배척당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 1943년 동안 동부전선의 하르코프, 쿠르스크, 오렐 일대에서 제2차대전의 명운을 결정지은 건곤일척의 대전투 들이 연이어 벌어졌지만 정작 명성을 얻은 롬멜은 10개월 동안 한직을 전전해야 했다. 군부에서 특별히 그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동안 총통을 믿고 상부의 명령을 밥 먹듯이 무시하던 롬멜의 행태를 쉽게 용서해줄 수 없었던 육군최고사령부는 만일 그가 동부전선에 뛰어든다면 또다시 임의적으로 작전을 펼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또한 갈수록 총통의 전횡에 몸서리치는 군부에서 히틀러와 친하다는 것은 그다지 자랑거리가 되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군부가 총통의 총애로 벼락출세했다고 수군거림을 당하던 롬멜을 거들떠볼 리 없었다.
롬멜이 지휘관으로 다시 복귀하게 된 것은 아프리카에서 소환된 지 10개월 만인 1944년 1월 15일, 동부전선이 아닌 북부 프랑스를 담당하던 B집단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면서부터다. 그곳은 연합군의 상륙이 예상되는 곳으로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었지만, 당시 독일의 주전선은 아니었다. B집단군은 후방의 해안 경계 및 상륙 저지가 임무였고, 예하부대는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약한 2선급 부대였다.
- B집단군 사령관으로 부임한 롬멜이 예하 부대를 시찰하고 있다. 영국군으로 참전했다가 독일군으로 전향한 인도인들도 병력으로 충원했을 만큼 B집단군은 전력이 약한 2선급 부대였다.
우여곡절 끝에 야전 지휘관으로 복귀한 롬멜은 방어막이 부실한 것을 깨닫고 서둘러 보강에 나섰다. 이번에도 롬멜은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히틀러에게 직접 지원을 요청하여 그 동안 지지부진하던 대서양 방벽을 조기에 완성하는 리더십을 보여주었다. 그런데 서부전선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아니, 그것은 어쩌면 서부전선만의 문제가 아니라 독일군 전체의 문제라 할 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지휘체계의 난맥상이었다.
서부전선을 총괄한 부대는 서부전선최고사령부였다. 예하에 프랑스 북부와 대서양을 관할하는 B집단군과 프랑스 남부를 관할하는 G집단군이 있었고 직할부대로 강력한 서부기갑집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롬멜이 새로 사령관으로 부임한 B집단군은 노르망디를 담당하는 제7군과 파드칼레를 방어하는 제15군이 편제되어 있었다. 그런데 겉으로 보이는 이런 깔끔한 전투서열과 달리 지휘체계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었다.
일사불란하던 독일군의 지휘체계는 시간이 경과할수록 엉망이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사사건건 모든 것을 간섭하려 들던 히틀러의 광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런 총통의 행태에 휘둘려 중심을 잡지 못하고 분열된 군부 스스로의 책임도 컸다. 서부전선은 공식적으로 국방군최고사령부가 파리의 서부전선최고사령부에 지시를 내렸지만 비공식적으로 군부의 헤게모니를 계속 장악하려는 육군최고사령부의 간섭도 받고 있었다.
- 롬멜은 특유의 추진력을 발판삼아 대서양 일대 방어선을 조기에 구축하였다. 흔히 ‘롬멜의 아스파라거스 선인장’이라 불린 해안가 방어물을 순시하는 롬멜.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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