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군부독재 정권의 내막을 파헤치며 명성을 날리던 조갑제 기자의 월간조선 편집국 시절 모습.
[사진 조갑제닷컴]
언론인 조갑제(趙甲濟·69)에 대한 평판이 대표적이다. 보수세력은 ‘시대적 양심’이라며 높이 보나, 진보세력은 ‘극우 수구’라고 폄훼한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 당시 그는 대중들의 전폭적 지지를 받는 언론인이었으나 지금은 호불호(好不好)가 명확히 갈린다. 지금 북한에서 가장 싫어하는 언론인이 조갑제다.
그러나 여러분은 아는가. 과거 북한이 가장 좋아하고 존경까지 했던 남조선 기자가 조갑제였다는 사실을?
1995년 11월 이스라엘 라빈 총리와 인터뷰하는 조갑제 월간조선 편집장.
라빈 총리는 이 인터뷰 후 34시간 만에 암살된다.
87년 12월, 민주화 이후 첫 대선을 앞두고 대한항공(KAL) 858 여객기가 공중 폭발했다. 탑승자 280여 명 전원이 사망했다. 다행히 기내에 폭발물을 설치한 공작원 김현희를 체포해 북한 소행임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듬해 2월 노태우의 6공 정부 출범을 앞두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문제의 858기 폭발사건을 놓고 첨예한 남북대결이 시작됐다. 뉴욕에 있던 나는 직접 현장을 가 취재했다. 안보리 분위기는 우리 측에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북한 박길연 유엔대사의 발언이 시작됐다.
“남조선 군부파쇼 집단은 자기들이 저질러 놓은 일을 모두 우리에게 덮어 씌운다. 작년(1987년) 초 서울대생 박종철군을 누가 죽였나? 바로 남조선 괴뢰경찰이 물고문으로 죽였다. 그들은 수많은 민주인사 학생들을 투옥하고 고문하고 죽였다….”
그는 이 사건의 본질과는 관계없는, 한국의 군사독재 상황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끌고 갔다. “지난 1980년 민주화를 바라는 광주의 애국시민·학생들을 살육하고 정권을 강탈한 무리들이 누구인가? 지금 전두환 괴뢰도당 아닌가….”
박길연은 민주화 탄압 사례를 교묘히 조합하면서 이 사건이 남한의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회의장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얼마 전 남조선 스파이집단 두목을 지낸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이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와 인터뷰를 했다. 그는 1973년 박정희의 지시로 김대중을 일본에서 납치,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폭로했다….”
내용이 왜곡된 ‘이후락 증언’의 충격파는 컸다. 서방국 대표단들의 표정도 곤혹스럽게 변했다. 마침내 박길연의 주장이 클라이맥스에 도달했다.
“여러분, 그 김대중을 죽이려던 괴수 박정희는 또 어떻게 됐나? 자기 부인은 동족의 손에 잃었고, 자신도 자기 오른 팔인 김재규 중정 두목 손에 암살되지 않았는가….”
하도 한국 쪽의 아픈 데만 건드리는 통에, 어느새 사건의 본질은 없어지고 분단된 약소국 내부의 험담이 난무하는 토론장으로 변해버렸다.
사실 북한 박길연이 인용한 월간조선의 이후락 인터뷰는 조갑제가 아니라 오효진 기자가 한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 측이 이를 조갑제 기자로 안 것은 당시 월간조선의 특종이나 폭로기사 상당 부분이 조갑제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절 최고의 취재력을 과시하던 대한민국 ‘대표’ 기자였다. 박정희의 유신은 물론 5공 군부독재 정권의 실상을 집요하게 파헤쳤다. ‘히로뽕-코리언 커넥션’ ‘고문과 조작의 기술자들’ ‘부마사태와 10·26 사건의 내막’ ‘국가안전기획부’ ‘한국 내 미 CIA의 내막’ ‘주한 유엔군 사령부’ ‘전두환의 금맥과 인맥’ ‘공수부대의 광주사태’ 등등….
뉴욕에서 돌아온 이듬해(89년) 국방부를 담당하게 된 나는 판문점 군사정전 회담을 취재하러 갔다. 관례에 따라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기자단 대표에게 ‘신고식’을 했다. 상대는 북한 정부기관지 민주조선 기자인 김상현. 그는 자기 이름이 김대중의 측근이었던 김상현 의원과 권투 세계챔피언을 지낸 김상현과 같다며 껄껄 웃었다.
그는 우리 내부 사정에 해박했다. 집이 어디냐고 묻길래 “개포동”이라고 했더니 “땅값 좀 올랐겠구먼”이라면서 빙그레 웃었다.
그때 북한 기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남조선 사람이 바로 월간조선 조갑제 기자였다. 북한 기자들은 그와 같은 신문사에 근무하는 나를 볼 때마다 우르르 몰려와 근황에 대해 물었다(지금 생각해 봐도 웃음이 나오는 진풍경이다).
“조갑제 어떤 사람이야?”
“어떻게 그런 기사 쓸 수 있지?”
“거 ‘남산’(지금의 국정원이며 당시는 국가안전기획부) 아이들이 가만 놔두나?”
“미 8군이니 CIA니 다 까발렸던데 양키들이 항의 안 해?”
내가 “우리 이제 민주화되고 있잖아. 남산이 함부로 하던 시절은 지나갔어”라고 말해주면 북한 기자들은 부러운 듯한 표정을 짓고 당부했다.
“조갑제 최고야. 안부 좀 전해줘….”
북한 기자의 ‘큰 형님’격인 김상현은 나를 따로 불러 능청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함 기자, 스파이(남파 간첩) 50명보다 조갑제 한 명이 더 나아….”
공산권 붕괴 후엔 처참한 북한 주목
89년 동구권 붕괴 이후 가난한 중국 옌볜 동포들이 우리나라에 쏟아져 들어오면서 도저히 믿기지 않는 북한의 처참한 생활상이 속속 전해지기 시작했다. 조갑제 기자는 이들 보따리 장수의 북한 여행기를 다룬 ‘목탄차로 달리는 공화국’(월간조선 1990년 12월호)을 기획하면서 그 실상에 놀라고 분노했다.
당시 월간조선에서 함께 근무하던 나는 그의 분노가 ‘반공’이라는 이념의 틀이 아니라 휴머니티에서 출발한 것이라고 느꼈다. 겉으로는 그럴싸한 자주와 이데올로기를 들먹이며 호의호식하는 권력층 밑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북한 동포들의 현실에 분노한 것이었다.
조갑제는 나아가 자신이 북한의 실상을 폭로해 현실을 바꾸겠다고 마음먹었다. 과거 우리 군부독재의 성역에 도전했던 그가 민주화 이후 북한이란 새로운 성역에 도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취재력을 북한에 집중함으로써 훗날 북한이 가장 싫어하는 기자가 됐다.
40년 전인 1970년대 초 김민기는 ‘친구’라는 노래를 통해 이렇게 외쳤다.
눈 앞에 보이는 수많은 모습들
그 모두 진정이라 우겨 말하면
어느 누구 하나가 홀로 일어나
아니라고 말할 사람 어디 있겠소
그때는 모든 것이 군사독재정권 탓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민주화가 돼도 ‘홀로 아니라고 말할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갑자기 언로(言路)가 뚫린 ‘좋은 세상’이 도래하자 군사정권 시절 침묵 내지 동조하던 지식인 중에서 ‘열혈’ 정의의 사도들이 등장했다. 그들 중에는 진정한 의미의 개방·진보적 인사도 있었겠지만, 사이비 인사들도 많았다. 그들은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밀착해 시대에 영합하고 여론에 아첨했다. 사건의 본질은 외면한 채 적당히 주변 여론에 호응하는가 하면 비현실적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해답인양 말했다.
그러나 조갑제는 정권과도, 시대와도 불화(不和)했다.
군부 독재 때는 군사정권을 비판했지만 민주화된 후에는 민주화 정권을 비판했다. 93년 김영삼 정권이 등장하자 그들의 섣부른 대북접근 정책을 비판해 미움을 샀고, 햇볕정책을 추진했던 김대중·노무현 정권과는 아예 처음부터 담을 쌓았다.
통일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아지면서 대북 유화론이 대세를 이뤘지만 그는 타협하지 않았다. 그의 확실한 대북 논조에 많은 사람들이 등을 돌렸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권력자에게 아첨하는 이가 B급 아첨꾼이라면 시대에 아첨하는 이야말로 A급이다. 조갑제는 정반대다. 그는 소신을 위해 평판이고 뭐고 다 던져버렸다.
조갑제는 대단한 집중력의 사나이다. 그가 영어와 일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은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덕이 아니라 청소년기 미·일 프로야구에 미쳐 자나 깨나 중계방송을 들은 덕분이다. 한마디로 그는 미치는 사람이다. 미칠 줄 아는 사람이다.
예전과 다르게 단정적이고 주장 강해져
신문 기자 시절 글을 쓸 때 의견(opinion)과 사실(fact)을 구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예컨대 ‘그가 선하다’는 것은 ‘의견’이요, ‘그가 선행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의견을 사실처럼, 사실을 의견처럼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오피니언 리더나 지식인들이 당파성에 매몰돼 판단하고 그것을 정의나 신념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어쩌면 시대의 전반적 상황으로 고착화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며 조갑제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요즘 조갑제를 보면 예전과 다르게 단정적이고 주장이 강하며 의견을 사실처럼 이야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한 기자가 아니라 행동가(activist)가 돼 전면에 서서 싸워온 탓인지 온유함 대신 거칠고 딱딱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오랜 투쟁에서 나오는 피로감도 엿보인다. 어떨 때는 “내가 정의요”라고 외치는 것 같다. 정의란 누구의 독점물도 아닌데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조갑제의 치열한 삶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일신의 영달이 아닌,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사람에 쏟아붓는 관심과 애정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조갑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가끔씩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당신은 살아오면서 조갑제처럼 치열한 소신과 열정을 가져본 적이 있소?”
그러나 그 생각은 곧 메아리쳐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비수처럼 찌른다.
“나도 조갑제만큼 미쳐본 적이 있었나?”
함영준 조선일보 사회부장·국제부장 등을 역임하고 국민대 겸임교수를 거쳐 청와대 문화체육관광비서관, 평창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저서로 『마흔이 내게 준 선물』 등이 있다.
함영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전무 jmedia21@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