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션 디자이너가 전방위 아티스트로… '대한민국서 가장 바쁜 백수' 정구호
10년 다닌 대기업, 왜 떠났나
"디자이너로 조직에 들어가
보여줄 만큼 보여줬죠…
이젠 타협과 조율 대신
새로운 일, 하고 싶은 대로"
옷 입히던 남자, 무대 입히다
영화·무용·건축·인테리어…
야쿠르트 여사님들 옷도 바꿔
"옷이나 만들라는 분도 있지만
도전은 내 인생의 키워드"
'운명이다' 포기하기 前에…
"무조건 최선을 다 한다
안되면 더 최선을 다 한다
안되면 목숨 걸고 최선을…
그다음부터가 운명이죠"
게이 아니냐고?
미혼에 잘나가는 중년男
요리 잘하는 것도 說 부채질
"수년간 사귀는 여친 있는데…
상관 안해요, 재밌잖아요"
내 사랑, 요리
직접 담그는 김치만 7종
한때 뉴욕서 분식점 열어
10大 맛집에 뽑히기도…
"요리백과 365권 내는게 꿈"
지난해 11월 디자이너 정구호(50)는 10년간 재직한 제일모직(현 삼성 에버랜드 패션 부문)을 퇴사했다. 일주일 후 10명이 모이는 중학교 동창회에 나갔다. 친구들이 작정한 듯 물었다. "앞으로 뭐 하려고 그 좋은 델 나왔어?" "돈 있을 때 빌딩이라도 하나 사야 하는 거 아냐?" 한 질문이 유달리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그런데 넌 도대체 직업이 뭐냐?"
대기업 삼성의 전무로 패션 사업을 이끌다 자칭 '백수'가 된 정구호는 "지금은 그냥 오지랖이 넓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제 직업은 늘 제가 만든 게 아니었어요. 회사에서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reative director)'라고 했고, 영화판에서는 옷과 세트를 만든다고 '아트 디렉터'라고 했죠. 지금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디자인하는 사람' 정도가 아닐까요."
넓은 '오지랖'으로 세상을 디자인하러 나선 정구호는 요즘 패션쇼장이 아니라 공연장에 출몰한다. 지난달 25일에는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26일에는 강동아트센터로 출근했다. 이틀간 지켜본 그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쁜 백수'였다. 예술의전당에서는 오는 6~7일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과 발레리나 김주원 등이 나오는 무용 '투 인 투(Two in two)'를, 강동아트센터에서는 내달 25일 강동스프링댄스페스티벌 개막작 '진화의 예술'을 올린다. 둘 다 가장 인정받는 현대무용 안무가인 안성수(52)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와 함께 만든다. 두 사람은 20년 지기다. 정구호는 의상과 조명, 무대 등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맡았다. 6월에는 국립무용단의 '단(壇)'과 '묵향' 재공연, 9월에는 국립무용단의 '더 게임', 연말에는 매우 실험적인 무용을 올릴 예정이다.
-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동 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 연습실에서 작품 ‘투 인 투(Two in two)’를 만드는 네 무용수와 연출가 정구호가 손을 맞대고 있다. 6~7일 예술의전당 자유소극장에서 공연하는 ‘투 인 투’는 탱고와 플라멩코가 어우러진 현대무용으로 안성수 한예종 교수가 안무했다. 왼쪽부터 김지영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무용수 김보람, 정구호, 무용수 장경민, 발레리나 김주원. / 허영한 기자
이것만도 숨이 찬데, 건축과 인테리어도 한다. 롯데호텔이 추진하는 6성급 호텔, 비즈니스 호텔의 총괄 비주얼 감독을 맡았다. 맡을지 고민 중인 대형 패션쇼도 있다. 컴퓨터에 저장된 '진행 중' 프로젝트가 8가지다.
◇내 자식 '구호(KUHO)', 의젓한 성인 됐으니 제 갈 길로
퇴사 당시 공식 발표는 '개인 사정으로 그만둔다'였다. 세간의 시선은 "진짜로 왜 그만뒀느냐"는 의문과 "이제 뭐 먹고사느냐"는 호기심으로 그를 둘러쌌다. 후자(後者)의 답이 될 뉴스는 지난달 중순 나왔다. 44년 만에 처음으로 유니폼을 바꿔 입게 된 야쿠르트 '여사님'들에게 '핑크'를 선사했다는 소식이었다. 정구호는 황토색 일색의 옷깃에 파스텔 분홍을 입혔다. 마른 장작 같은 몸매의 모델이 선보이던 그의 옷을 방방곡곡 경향 각지 골목에서 '여사님'들이 보여주게 된 것이다.
―독창성으로 승부해야 하는 디자이너가 규격화된 유니폼을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요.
"예전에 하나은행과 SKⅡ화장품 유니폼도 만들었어요. 유니폼은 틀에 맞춰야 해서 큰 도전이에요. 그래서 좋아요. 상대적으로 뒤처진 분야라, 제가 발전시켜보고 싶다는 사명감도 있었고요."
―야쿠르트 유니폼은 처음 바뀌는 거라 특히 까다로웠을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재미있었어요. 어디에서나 노출되는 옷이라 회사 쪽과 타협도 많이 해야 했고요. 전체적으로 싱싱해 보이는 파스텔 색으로 하고 싶었는데, 기본 색은 유지했으면 좋겠다는 회사의 방침이 있어서 비율을 조절하기로 했어요. 겨울옷으로 가면서 점점 분홍색이 넓어질 거예요."
- 김연아, 평창 PT 때도 ‘구호(KUHO) 패션’2011년 7월 피겨 선수 김연아가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개최된 평창 동계올림픽 프레젠테이션 때 입었던 구호의 원피스와 망토형 재킷. 매장에 내놓자마자 모두 팔리는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변태' 정구호는 10년 만에 브랜드 '구호(KUHO)'를 연매출 70억원에서 900억원으로 키웠다. 단순하고 고급스러운 옷, 고소득층 여성들이 좋아하는 옷으로 자리 잡았다. 지난해 10월 인수 10주년 기념 패션쇼가 그의 깔끔한 마침표였다.
―대기업에 잘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왜 나오셨나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고 생각했어요. 첫 3년은 집중하느라 아무 생각 못 했고, 다음 2년은 성과 내느라 정신없었어요. 나머지 5년간 그만둔 이후를 고민했어요. 후배 디자이너를 위해서 좋은 선례를 만들었다고 보고요. 그다음은 저의 만족이 중요하잖아요. 저도 쉰인데, 더 늦기 전에 새 일에 도전해야죠. 초보자 취급을 받더라도 죽기 전에 다 도전해보고 싶어요. 회사(삼성)도 향후 10년 계획을 세워야 하고요."
―나와 보니 아쉬움은 없던가요?
"100퍼센트 미련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죠. 딱 하나 있다면 글로벌 브랜드 '헥사 바이 구호'를 더 키우지 못한 것이지만, 그것도 할 만큼은 했어요. 인생에 100퍼센트 만족이 어디 있겠어요."
―10년간 잃은 것과 얻은 것이 있다면?
"타협과 조율을 배웠죠. 이제는 타협하기 싫어요. 제가 하고 싶은 걸 해보고 싶어요. 무용은 그 점에서 패션보다 자유로워요. 제가 낸 아이디어를 안무가가 춤으로 최대한 구현해내면 되니까요."
―'구호' 브랜드는 그대로 삼성에서 나오는데, '자식'을 두고 온 허전함은 없으신가요?
"지금 구호를 만드는 디자이너들은 저와 오래 일해서 구호를 잘 알고 있어요. 자식이 어엿한 성인이 됐으니 부모인 저는 저 좋은 걸 해서 각자 행복해져야죠."
◇운명을 믿는다, 죽을 만큼 노력한 후에
그는 국내 톱 디자이너이지만 정식으로 패션 디자인을 공부한 적은 없다. 미국에서 광고미술과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을 배우고 책 표지 디자이너로 일하다 서른셋에 데뷔했다.
―검정 바지 한 벌에 반해서 패션에 뛰어들었다면서요.
"콤 데 가르송(일본 디자이너 레이 가와쿠보가 만든 전위적인 브랜드)의 바지였죠. 영어 수업 시간에 어느 학생이 입고 온 짧고 특이한 옷이었어요. 수업 시간 내내 째려보다가 물어물어 매장을 찾아갔어요. 가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평범한 사람을 비범하게 바꾸는 패션의 힘을 깨달았죠. 그 바지가 500달러가 넘었는데, 졸업할 때 입겠다고 결심하고 돈을 모았죠. 졸업식장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콤 데 가르송을 입고 갔어요."
그 옷은 그에게 '내 인생의 옷'이 됐다. 정구호가 입버릇처럼 강조하는 '가치 있는 옷'이다. "잠잘 때 눈을 감으면 천장에 떠다니는 옷, 절대 버릴 수 없는 옷, 그런 옷을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르고 살아요. 패션은 판타지라서 귀하고 가치 있는 건데 패스트 패션들이 늘어나면서 흥분과 가치가 없는 옷들이 넘쳐나는 거죠."
뉴욕 무대에 도전한 것은 2010년 2월이었다. '헥사 바이 구호'로 데뷔하는 그의 쇼 취재진 중에 기자도 있었다. 패션쇼 하루 전날, 옷을 걸어둔 쇼 룸에서 만난 정구호는 아이같이 들떠 있었다. 재킷 3벌과 조끼 1벌, 셔츠 1벌이 해체 후 합체된 재킷, 허리띠가 세 겹인 바지 등을 일일이 보여주며 자세히 소개했다.
흥분은 거기까지였다. 쇼 당일인 10일, 새벽부터 눈이 쏟아졌다. 30년 만에 처음이라는 폭설이었다. 원망스러운 것은 날씨만이 아니었다. 의상과 소품 10여벌이 도착하지 않았다. 악어가죽이 소재라 원산지 표기가 필수라는 걸 몰랐다. 세관에 걸린 옷을 찾기 위해 직원이 뛰어갔으나, 폭설로 공항 직원이 휴무였다. 오후 6시 눈을 뚫고 모델들이 도착하긴 했는데, 이번에는 회전 무대가 작동하지 않았다. 제조업체의 실수였다. 악재란 악재는 모두 일어났으나 현지 평가는 후했다. '드레스로 다시 태어난 재킷에는 예술성이 살아 있다' '지적이고 독창적이다'. '헥사'는 이후 3번 더 뉴욕에서 선보였다.
- 지난해 10월 한 호텔에서 열린 브랜드 구호 10주년 기념 패션쇼. ‘구호 스타일’로 알려진 절제된 검정에 입체적인 재단이 돋보이는 옷들이 선보였다. / 김연정 객원기자
"그것도 운명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된 이유가 있을 거라고요. 전 운명론자예요. 예전에 동양철학을 공부한 적도 있어요. 오랜 역사에서 쌓인 삶의 경험치가 일상의 대책을 세울 커다란 틀을 보여줄 것 같아서요."
―모든 걸 운명으로 돌리면 쉽게 포기하게 되지 않나요?
"운명이라고 받아들이기 전에 꼭 거치는 3단계가 있어요. '무조건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안되면 더 최선을 다한다, 그래도 또 안되면 정말 목숨 걸고 최선을 다한다'는 거죠. 그다음부터가 운명이에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노력했기 때문에 도와준다기보다는 노력한 만큼의 대가는 온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좌절해본 적이 있나요?
"구호 브랜드를 다른 회사에 넘겨주고 나온 적이 있어요. 제가 계약서를 잘못 봐서 생긴 일이었어요. 처음에 부티크 열 때는 건물주가 부도를 내서 사무실이 경매에 넘어갔어요. 보증금이 없어서 나와야 했죠. 토털 라이프 스타일 회사를 차리자고 어느 벤처기업에서 제안이 와서 직원 십여명을 뽑아놨는데, 그 벤처가 망하면서 수포로 돌아간 적도 있어요. 제가 똑똑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죠. '이걸 어쩌지'에 골몰하기보다 '이다음은 어쩌지'를 빨리 결정해 나간 게 제 장점이었던 것 같아요."
- 지난해 12월 국립무용단 윤성주 예술감독의 안무로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공연한 한국무용 ‘묵향’. 정구호는 연출과 의상, 무대를 맡았다. 흰 막이 네 폭의 화선지처럼 무대 전체를 덮고, 그 위로 영상을 투사해 수묵 채색화를 그려내듯 아름답게 표현했다. / 국립무용단 제공
세상 모든 걸 디자인하겠다고 나선 그가 손댄 장르 중에서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알바나 해볼까' 하는 심정으로 시작했던 '정사'(1998) 이후, 대종상영화제 의상상을 두 번('스캔들―조선남여상열지사', '황진이')이나 받았다.
무용에 끌린 것은 뉴욕에 체류하던 1993년 즈음이었다. 빡빡머리로 유명한 현대무용가 안은미가 "끝내주는 한국 애가 있다"고 소개해서 보러 간 공연이 안성수 교수의 작품이었다. 1999년 '수류'가 무용으로는 첫 작품이다.
도전 영역이 넓어질 때마다 뒷말도 많이 들었다. "네가 무슨 영화 미술감독이냐? 그냥 옷이나 만들어라" "디자인이나 잘할 것이지 무용을 뭘 안다고 덤비느냐."
―패션은 물론이고 초보로 뛰어든 분야에서 여러 비평을 들었을 텐데.
"창조의 세계에 100점이 어딨어요. 100점을 받기 위한 도전만 있는 거죠. 100점이 있다고 해도 받고 나면 할 게 없어지잖아요. 그렇게 재미없고 시시한 세상보다는 도전하고 평가받는 세상이 훨씬 낫죠."
- 3남1녀 중 장남인 정구호는 제사상과 차례상을 혼자 직접 차린다. 사진은 지난 설날 차례상. “전 부치는 게 얼마나 재미있는데요. 일주일 동안 맛있게 먹을 음식이 생기잖아요.” / 정구호 제공
미혼의 남성 디자이너인 그에게는 "게이(동성애자)가 아니냐"는 의문이 늘 붙어 다녔다. 정구호가 요리를 잘한다는 사실은 루머를 부채질했다. 그는 "수년간 사귀어온 여자친구가 있다"고 했다. "게이 설이요? 무슨 상관이에요. 재밌잖아요. 의심하면 하는 거죠. 굳이 뭘 변명하겠어요."
어린 시절 3대 대가족 14명이 한집에 살았다. 덕분에 할머니와 어머니 손맛을 다섯 살 때부터 익혔다. 1997년에는 호주 시드니로 건너가 요리학원 르코르동블루를 다녔다. 요즘도 백김치, 파김치, 보쌈김치 등 김치 7종을 담근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데 '의외로' 3남1녀 중 장남이다. "장남이라고 왜 모든 걸 포기해야 하나요? 책임을 다하고, 그다음에 원하는 걸 하면 되죠." 그가 말하는 '책임'에는 수년 전 작고한 모친의 제사상도 포함된다. 기제사며 명절 차례상까지 혼자서 2박3일간 직접 차린다.
패션 부티크를 열 종자돈도 요리로 벌었다. 뉴욕 파슨스디자인스쿨을 졸업하고 웨스트빌리지에 분식점을 차렸다. 메뉴가 무려 40가지였다. 솥밥, 잔치국수, 떡볶이 등 없는 게 없는 음식점이었다. 이름은 발음하기 좋으라고 '세모네모'였다. 요리는 그가 하고, 서빙 1명, 설거지 1명, 도합 3명이 일했다. 구석에서 조그맣게 했는데 뉴욕의 일간지 데일리뉴스에 10대 맛집 중 하나로 뽑힌 적도 있다고 했다. 그의 꿈 중 하나는 365가지 식재료를 소개하는 방대한 요리백과 365권을 내는 것이다.
―'구호 레스토랑'을 열어 동업하자는 제안을 많이 받으셨다면서요.
"음식은 올인해야 제대로 할 수 있어요. 지금은 음식만 할 때가 아니고요. 무엇보다 가장 사랑하는 한 가지는 밥벌이에 구애받지 않는 영역으로 남겨 두고 싶어요. 나중에 도전이나 창작욕이 다 떨어지면 편안한 마음으로 하면 되죠."
―가장 좋아하는 식재료는?
"변신의 여왕 소금이죠. 스스로는 짠맛만 내는데 다른 재료와 합쳐지면 변화무쌍한 맛을 끌어올리지요. 패션에서 디자이너의 역할과 같다고 할까요? 그런 점에서 요즘 스파(SPA) 브랜드는 소금 빠진 음식이에요. 디자이너 없이도 적당히 베껴서 내놓으니까요."
그가 말하는 스파(SPA, Specialty store retailer of Private label Apparel) 브랜드는 한 회사에서 기획·생산·판매를 모두 처리해 유통과 관리비를 줄일 수 있는 저렴한 옷을 말한다. 자라(ZARA)나 H&M 같은 브랜드다.
"스파 브랜드는 많은 사람이 공유한다는 장점은 있지만 철학과 가치가 없어요. 여러 벌 살 걸 모아서 정말 갖고 싶은 옷 한 벌을 사던 특별함이 사라진 거죠. 명품 디자인을 빠르게 베껴서 내놓지만 소재와 독창성은 못 따라와요. 그 가치를 알아볼 소비자가 많아야 우리나라 패션계도 더 발전하지 않을까 싶어요."
―대한민국 옷이 이탈리아 옷만큼 세계적으로 인정받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최고를 인정할 줄 알아야 해요. 고급문화에 대한 인식이 없어요. 영국 여왕은 외국 사절이 오면 최고급 옷과 장신구를 하잖아요. 왜 대통령이 '이 브로치는 5만원짜리'라고 저렴함을 강조해야 하나요? 수백만원짜리라도 우리나라 최고 공예작가의 브로치를 달고 외국에 나가서 찬사를 받으면 우리 문화가 알려지는 건데요."
―구호의 '동생'이 될 새 브랜드를 만들 생각은 없나요?
"독특한 동생을 만들어볼까 싶어요. 아주 실험적이거나, 아주 기본이거나 둘 중 하나만 할 거예요. 패션이 참 어려운 분야인 게, 달인이 있을 수 없다는 거예요. 기술자는 한 분야를 수십년 파면 달인이 되는데, 패션은 수십년 이름을 날렸다가도 하루아침에 '맛이 갔다'는 말이 나와요. 매번 정답이 바뀌는 수학과 같아요. 일 더하기 일은 삼도 됐다가 삼백도 되니까요. 끊임없이 도전하고 노력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는 "인생은 꿈의 비율을 높여나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꿈의 몇 퍼센트가 현실화되느냐에 주력하면 되죠. 백점, 백퍼센트는 없잖아요. 퍼센트를 높이려고 도전하는 거, 그거면 인생 잘 산 거 아닌가요?"
―정구호가 어떤 일을 했는지 훗날 역사가 평가해준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으로 평가받고 싶으신가요?
"정구호, 죽을 때까지 죽자고 도전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