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사위의 출범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사위 측은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에 따라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전후 1945년 8월 15일부터 권위주의 통치시까지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 민간인집단희생 등 사건의 진상을 규명해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자 2005년 12월 1일 출범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앞서 2005년 4월에는 여당인 열린우리당과 한나라당이 합의 끝에 과거사법을 통과시킨 바 있다. 2004년 총선에서 탄핵 역풍에 힘입어 과반의석을 확보한 열린우리당은 과거사법을 △ 국가보안법 폐지 △ 사학법 개정 △ 언론법 개정과 함께 ‘4대 개혁법안’으로 규정하고 이를 통과시키기 위한 여론몰이를 진행했다.
반면 한나라당은 2004년 가을까지만 해도 이들 4개 법안을 ‘4대 악법’이라고 규정했으나 의석수의 부족으로 인해 결국 2005년 4월에 합의 처리를 수용했던 것이다.
그간 과거사위가 중점을 두고 진상규명을 시도한 ‘과거사’들은 △ 거창-노근리 등 6.25 당시 국군과 유엔군에 의한 민간인 사망 △ 보도연맹 사건 △ 간첩 조작사건 등이다. 그러나 과거사위는 6.25 전쟁의 가해자이며 원인 제공자였던 북한과 중공군에 의한 만행에 대해서는 진상규명을 시도한 바가 없다.
2008년 11월 서울시청 광장에서 열린 과거사위 주최의 사진전시회는 이 위원회의 이념적 편향성을 여실히 보여줬다. 당시 과거사위는 ‘6.25 당시 국군·경찰에 의한 양민학살’을 다룬 사진들을 전시했다.
이에 보수우파 진영에서는 “국군·경찰에 의해 희생된 사건에 대한 사진만 전시돼 있을 뿐 인민군 및 좌익에 의한 학살 장면을 담은 사진은 없다”며 “국가기관인 과거사위가 과거사를 왜곡하고 있는 것”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과거사 규명’이 현실적으로 가능한가
과거사위를 출범시킨 노무현 정권은 ‘과거사 진상 규명’의 필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과 6.25 당시 국가권력에 의해 행해진 일들에 대한 진실을 규명하겠다는 것이 참여정부와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이 내건 명분이었다.
그러나 과거사에 대한 ‘진상 규명’은 애초부터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미 해당 사건으로부터 수십년이 지났기에, 과거사위가 ‘가해자’로 지목하고 조사하려고 한 인사들 중 상당수는 이미 고령으로 세상을 떠난 상태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 중 하나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다. 검찰에 의해 용의자로 지목되고 기소되더라도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죄인으로 공인될 수는 없다는 원리다. 물론 용의자가 외부의 압력 없이 자신의 범죄 사실을 모두 자백한 경우에는 무죄 추정의 원칙이 예외적으로 묵인될 수도 있다.
우리 헌법은 강력범죄를 저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용의자들조차도 변호인을 선임하고 재판을 통해 자신들의 결백을 주장하거나 정상 참작을 요구할 수 있도록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진리대로, 이미 고인이 된 인사들은 과거사위의 일방적인 조사와 여론몰이에 대항해서 자신을 변호하거나 사실관계를 해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죽은 자들을 대상으로 한 과거사위의 ‘진상 규명’ 시도는 민주주의 원리에도 맞지 않을 뿐 아니라 정략적이고 이념적인 의도에서 비롯된 정치공세에 불과하다.
과거사위 뺨치는 의문사위의 현대사 난도질
과거사위와 비슷한 시기에 노무현 정권에서 활동했던 조직 중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이하 의문사위)가 있다. 대통령 직속 기관이었던 의문사위는 2004년 총선 직후 남파간첩들을 민주화 인사로 승격시키며 우리 사회의 이념 논쟁에 불을 지폈다.
2004년 7월 한상범 위원장이 이끌던 의문사위는 남파 간첩, 혹은 빨치산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들이 사상 전향을 거부하는 과정에서 옥사한 데 대해 “민주화운동의 일환이었다”고 인정해 논란을 일으켰다.
의문사위는 손윤구.박융서.최석기 씨 등 비전향 장기수 3명의 의문사에 대해 “전향 강요는 기본적으로 불법이었고 헌법이 보장한 사상-양심의 자유는 내심(內心)의 자유로 강요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또 인간으로서 기본 권리를 침해당했고 그에 맞서 저항하는 과정에서 전향제도나 준법서약서 등 악법이 철폐된 것은 민주화에 기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우파단체들은 강하게 반발했다. 일부 청년단체들은 ‘의문사위 체포조’를 결성할 정도였다. 좌파 언론이 의문사위를 두둔하고 우파 진영을 조롱하는 내용의 보도를 하자 우파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국민행동본부도 2004년 7월에만 세 차례 신문광고를 내고 “노무현 정권은 대한민국 해체에 나서고 있음이 분명하다”며 “국군은 헌법과 국가의 체제와 자유를 파괴하려는 그 어떤 위헌적 명령과 영향력도 거부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한나라당도 “정부 및 여당이 국가정체성을 흔들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념 전선에 불을 붙였다. 이에 당시 여론은 우파진영의 주장에 손을 들어줬다.
내일신문과 한길리서치가 ‘국가정체성’ 공방이 한창이던 2004년 8월 1일과 2일 양일간 전국의 성인남녀 10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노무현 정부 및 여당이 국가정체성을 흔들고 있다”는 한나라당의 당시 주장에 대해 54.6%의 국민이 ‘잘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부정적인 평가는 33.9%에 불과했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7월 30일 “대통령을 공격하기 위해 의문사위를 공격하는 측면도 있는 것 같다”면서 “의문사위의 판단이 정치적으로 왜곡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사실상 의문사위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또한 노 전 대통령은 의문사위 관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격려하기도 했다. 이듬해 과거사법을 통과시키며 과거사위를 구성했던 노무현 정권의 이념적 좌표가 어디에 있었는지를 암시하는 대목이었다.
김주년 기자 anubis00@naver.com
위 기사의 출처는 미래한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