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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

鶴山 徐 仁 2010. 9. 30. 12:35


세계적인 육종학자 "우장춘 박사의 눈물" 

 
한국원예연구소장 재임시


우장춘 박사가 왜 아직도 "씨없는 수박 만든 사람" 으로만 
알려져 있는지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더구나 씨없는 수박은 '기하라 히토시' 라는 이름의 
일본인 박사가 처음 만들었고,   
그걸 우 박사가 한국에 들고 온것인데도 말이다. 
짧게 요약하자면,    
우장춘 박사는 일제와 6.25전쟁이 말아먹은 불모지 한반도를,   
먹고 살만한 땅으로 바꿔 놓은 구국의 위인이다. 
우박사는 출생부터가 기구했다. 
1898년 생인데,   아버지가 친일부대의 대대장으로 
명성황후 시해에 가담한 역적 우범선이었다. 
아관파천으로 전세 역전,   일본으로 망명한 '친일파' 우범선,   
일본인 '사카이 나카'와 결혼해 2남을 생산하는데 
그중 장남이 우장춘이었다. 



우장춘(가운데) 가족 사진. 
아버지 우범선(왼쪽)의 죽음으로 이 가족은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진다 


조국을 배신한 역적의 최후는 비참했다. 
우범선의 증언에 따르면 억울한 면도 있다는데 
뭐 어쨌든 그 문제는 그 정도 해두고... 
우범선은 우장춘의 나이 5살 때 대한제국이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된다. 
이때부터 우장춘 가족은 그야말로 떠돌이 집시만도 못한 
최악의 삶을 살게 된다. 
조선에선 배신자 역적의 가족,   일본에선 이용가치 없는 
쓰레기 트기 가족으로 전락,   
과부가 된 장춘의 어머니는 극심한 경제적 빈곤에 시달려,   
우장춘을 고아원에 맡겨 버린다. 
그리고,   무슨 동화책 속의 주인공마냥 조선인 우장춘은 
고아원생들의 무지막지한 이지메 공격에 시달린다. 
일반적으로 어린 시절 가난하고 힘들고 
폭력에 시달리며 크면,   
나중에 일탈행위를 하기 마련인데 우장춘은 그 반대였다. 
그는,   
'기어코 훌륭한 사람이 돼서 너희들에게 복수하겠다' 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장춘의 어머니도 훌륭한 여인었던 모양이어서. 
기어코 돈을 벌어 장춘을 집으로 데려와 대학까지 보낸다. 
그것도 그냥 대학이 아니라 명문 동경제국대학을.




동경제대 재학시절


도쿄제국대학 농학실과을 졸업한 장춘,   
일본 농림성에 취업해 혁혁한 업적을 쌓으며 
승승장구한다. 
근데 1937년 어느날 일본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갑짜기 해임된다. 왜? 
장춘이 일본에서 살아남는 길은 일본인이 되어서 
일본 이름을 쓰는 것 밖에 없었다. 
실제로 그는 결혼하려고 일본인의 양자가 돼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근데 정작 자신의 업적을 남기는 논문과 공문 기록에는 
고집스럽게 자신의 한국 성인 "우"를 집어 넣었다. 
우장춘에게 일본은 혹독한 굶주림과 차별과 
폭력의 나라였다.
일본에서 이민자가 얻을 수 없는 엄청 높은 지위를 
얻긴 했으나 그건 순전히 장춘이 혼자 잘나서 
그리 된 거고.
자신의 가족을 그토록 짓밟았던 제국주의에 미쳐 
날뛰는 나라,   
일본은 우장춘에게 영원히 함께 하지 못할 
적국일 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에 매달렸다. 
괴롭게도 조선은 우장춘을 역적의 아들로 낙인 찍었으나,   
여전히 조선은 그의 뿌리이자  일본에게 짓밟힌 약자였다. 
해임 후 지방의 농장장으로 재취업,   
연구 활동에 몰두하던 우장춘은 여생을 그냥 그렇게
행복하게 보낼 수 있었다.
육종학계 최고 권위자라는 명예를 간직한 채 
일본 이민자 역사에 빛나는 태양으로 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우장춘에겐 운명이 정해준 사명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 조선,   
아니 대한민국이 그를 애타게 찾기 시작한 거다. 
해방 후 대한민국은 1947년부터 농업의 근대화를 위해 
일본에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실력자 우장춘을,   
"같은 민족" 이라는 미끼로,   영입하고자 했다. 
당시 한국은 미리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를 
만들어 놓고,   
소장 자리를 우장춘을 위해 공석으로 둔 상태였다.
우장춘의 가족에게 "이적료"로 1백만엔을 
보낼 정도로 열성이었다. 
당시 1백만엔이면 엄청난 돈이었다. 
우장춘은 이미 골수 깊은 민족주의자였는지도 
몰랐다. 
난 조선에서 죄인이겠지라는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조선이 먼저 "어서오쎄요" 하는것을 보고 
무척 감격했던게 분명했다. 
그는 가족을 위해 쓰라고 준 돈 1백만엔을 탈탈 털어 
한국에 심을 종자를 사는데 다 써 버렸다. 
그리고 당시(1950년) 한국 전쟁이 한참이었던 
부산에 와서 그 나이에 군복무까지 했다. 
당시 높으신 양반들은 군 면제시켜 주려고 했는데 
우장춘은 거부하고 입대를 했단다. 
(허허... 이런 때는 헛웃음만 흘릴수 밖에 없다.)
암튼,   공석으로 남겨뒀던 한국 농업 과학연구소 
소장으로 취임한 우장춘. 
근데 소장이면 뭐하나. 
전쟁으로 쑥대밭된 나라엔 아무것도 없었다.  
당시 연구소는 소장 자리만 만들어 놓고 
잠 잘 곳도,   씻을 곳도,   수돗물 나오는 곳도,   
전기 들어오는 곳도 안 만들어 놓았단다. 
(심지어 입을 옷도 없어서 우장춘 소장은 
행사장에 누더기 외투에 고무신 끌고 나갔다한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 10 여년 동안 
우장춘은 대한민국을 기어코 구원하고야 마는데,   
그 업적의 핵심은 바로,   우량 종자 개발.
농업만 그랬겠냐만은 일제 치하의 조선은 
철저하게 일본에 종속된 '식민농업지',  였다. 
일본에서 종자를 들여와 일본식 기술로 
농사를 지어야 했는데,   
일본이 패망한 뒤로는 그게 불가능해졌다. 
식량조차 자급자족이 안되는 나라,   
이 처절한 대한민국에서 가장 중요한 건 
우수 종자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우장춘은 가장 먼저 우량 종자 개발에 주력,   
최단시간 내에 배추,   무,   고추,   오이,   양배추,   양파,   
토마토,   수박,   참외 등에 걸쳐 20여 품종에서 
종자를 확보한다. 
(그 외에도 한해 두번 수확하는 벼 품종 개발 등 
무수히 많다) 
이로서 대한민국에 현대 농업기술이 시작 됐고 
국민들은 기아에서 점차적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우장춘이 손을 댄 우량 종자들은 
외국 것을 능가하는 엄청난 품질이었다. 
우장춘이 얼마나 천재였는지 보여주는 가장 두드러진 
사례는 바로 제주 감귤 이었다. 




한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최우수 과일 품종 "제주 감귤.


이 엄청난 작물의 종자와 재배 기술을 창작해 낸 것도 모자라,   
우장춘은 이걸 제주와 남해안 일대에 생산지를 구축,   
제주 감귤 산업을 일으켜 세웠다. 
이뿐이 아니다 . 
강원도 감자가 특정 바이러스에 너무 취약해 
한번 창궐하면 전멸 하곤 했단다. 
그때마다 강원도민들의 상당수는 굶어죽는 거였고. 
이걸 종자를 변형시켜 면역을 가진 강력한 작물로 
탈바꿈 시켰다. 
그리고 페튜니아를 화초로 가꿀수 있도록 개발해서 
원예 산업을 일으켜 세웠고... 
이건 일본에서도 깜짝 놀랐던 엄청난 업적이라는 것이다.. 
우장춘 박사는 먹고 사는 것만 해결해 준게 아니라 
먹는 걸로 경제와 산업을 창출하는 기반까지 닦아 준 
그 당시엔 말 그대로 하늘에서 내려온 
구원의 천사였던 것이다. 
처음 한국에 올 때 우 박사는 한국에 뼈를 묻겠다고 
했다는데,   솔직히 그게 사실인지는 알수가 없다. 
솔직히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라도,   
별로 뼈를 묻고 싶은 나라는 아니었을게다. 
우장춘 박사는 말 그대로 대한민국을 위해 온몸을  
불살은 영웅이었다. 
십이지장 궤양으로 병원에 입원한 상태에서,   
그 때 한참 실험 중이던 일식이수(一植二收)의 
벼를 비닐 봉투에 넣어 링거병이랑 같이 
걸어 놓고 관찰할 정도였다. 
근데 이승만 정부는 우장춘을 우습게 여겼다. 
왜냐하면,   우리말을 잘 못했으니까. 
당시 정신나간 권력자들은 일본에 대한 적개심으로 
활활 불타고 있었고,   
일본말만 잘하는 우장춘을 밉게 보았다. 
우장춘 박사는 사실 한글에 도통한 분이었다. 
읽기,   쓰기,   듣기 다 잘 하는데 말하기만 서툴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예 대놓고 구박하고 모욕을 줬다. 
아예 공개석상에서 일본말만 지껄일 줄 알면서 
무슨 애국을 하겠냐며 망신을 준 정치인도 있었다. 
세계적인 유전학석학이 한국에 와서 졸지에 
외국인 노동자가 된 거다. 
이 때부터 그 잘난 대한민국의 처절한 과학자와
엔지니어 냉대 전통이 시작된 거라는 얘기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어머니가 작고하셨을 때도,   딸이 결혼을 했을 때도 
우장춘은 일본으로 건너가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이 출국 금지를 시켰던 것이다.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평소 바른 말을 잘하는 우장춘이 이데올로기 문제에 관해 
입바른 소릴 한 모양이었다. 
그 소릴 들은 이승만 정권은 '사상에 문제가 있네' 라며 
그를 출국 금지시켜 버렸다. 



  
한국 땅에서 어머니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우장춘


어머니의 죽음,   딸의 결혼도 함께 하지 못한 우장춘. 
아들로서 아비로서 가슴 찢어지는 고통이었겠지만,   
그러나 우장춘은 끝까지 조선인을 위해 
마지막 생을 바쳤다.
그는 1959년 죽는 순간까지 더 우수한 벼 품종을 
만들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자신의 마지막 작품을 
완성시키려는 생각 밖에 없었다고 한다. 
죽기 하루 전 정부로부터 문화 포상받은 우장춘,   
이렇게 말하며 눈물을 철철 흘렸다고 한다. 
"조국이 날 인정했구만... 근데 좀 일찍 좀 주지..."
한국의 모든 전후 세대는 이 위대한 인물에게 
큰 빚을 졌다.
이승만 정권은 우장춘을 철저히 이용만 해 먹었다. 
그들은 우장춘의 업적을 기록에 남기는 것조차 
소홀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직도 구국의 영웅이자 
만능 천재 과학자 우장춘에 대해 아직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 것이다. 
60 년이 흐른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터넷에서 검색해도,   서점에서 책을 찾아도,   
우장춘에 관한 콘텐츠는 코흘리개 애들 교과서 
한귀퉁이에 실릴 정도의 분량 밖에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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