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슈바이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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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베르트 슈바이처(독일어: Albert Schweitzer 1875년 1월 14일 ~ 1965년 9월 4일)는 독일의 의사, 음악가, 철학자, 개신교 신학자이자 루터교 목사이다. 그는 그가 설파하였던 '생명에 대한 경외'[1]라는 그의 고유한 철학이 인류의 형제애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공로로 1952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이 철학은 그가 중앙 아프리카 서부 지역의 랑바레네에서 알베르트 슈바이처 병원을 세울 때에 설립 이념이 되었던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한편 음악가이자 오르간 연주자이기도 했던 그는 독일의 작곡가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연구했으며, 20세기 초의 오르간 개선 운동(Orgelbewegung)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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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생애
[편집] 유년 시절
슈바이처는 1875년 알자스의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 루터교 목사인 루이 슈바이처 목사의 큰아들로 태어났으며, 몸이 약한 아들의 건강을 걱정한 부모의 뜻에 따라 농촌 귄스바흐에서 자랐다. 형제로는 누나와 2명의 여동생, 남동생 1명이 있었다. 그가 태어난 알자스는 독일과 프랑스의 영토 다툼이 심하던 곳으로 그가 태어날 당시에는 독일 영토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프랑스로 넘어가 현재에 이른다. 카이제르스부르크에서의 유년시절은 슈바이처의 기독교믿음과 정신 성숙에 영향을 주었다. 루터교회 목사인 아버지는 아들이 성서를 읽으며 궁금해하는 내용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었으며, 교우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농부들이었던 주위환경은 슈바이처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슈바이처의 아버지는 성찬예배[2]때 아프리카 사람들의 비참한 삶에 대해서 자주 설교했다. 이러한 성장환경은 슈바이처를 역사적 예수연구 1세대에 참여한 신학자이자, 아프리카 의료봉사자가 되는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편집] 신학 공부
대학생 시절, 19세 이상의 독일국민은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하였으며, 중대장의 배려로 특정시간(오전 11시-오후 3시)에 군인신분으로 대학교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1899년 슈트라스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이듬해 신학박사의 학위를 취득했는데, 신학생 시절 그는 당시 서구 신학계에 등장한 예수전들을 연구하면서 예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신학적으로 맞는가를 연구하였다. 이러한 신학적 사유는 예수는 종말론적 하느님 나라즉, 앞으로 도래할 하느님의 나라를 주장한 종말론자였다는 연구성과로 열매를 맺는다.
[편집] 사목(목회)
학위취득 후 모교에서 강사로 일했으며, 성 니콜라이 루터교회의 부목사로 사목하였다. 당시 슈바이처 목사는 견진성사를 준비하는 청년들과 자유롭게 토론을 했는데, 이는 그가 사목하던 교회에서 놀라운 일로 받아들여졌다.
[편집] 의료 봉사
군대 복무 중 성령강림주일 휴가를 집에서 보냈는데, 이때 "나는 이렇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휴가를 보내는데, 이러한 행복을 나만 누려도 되는가?"라는 생각을 했다. 어려서부터 갖고 있던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나만 행복하게 살 수 없다"라는 인식으로 성숙한 것이었다. 그래서 30세 되던 해인 1905년 의학과정에 진학했으며, 1912년에 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듬해인 1913년 아내 헬레네 브레슬라우(스위스에서 별세)와 함께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현재 가봉 공화국)의 랑바레네에서 의료봉사를 시작했다. 통역은 백인 선교사들과 동역한 흑인 누쳉이 해주었으며, 병원건물은 선교사가 사용했던 닭장을 수리하여 사용했다. 제1차 세계대전동안에는 프랑스의 적성국가였던 독일 사람이라는 이유로 구금되었으며, 나중에는 전쟁포로로 프랑스에서 억류당하는 수모를 당했다. 하지만 전쟁이 그에게 준 가장 큰 상처는 어머니가 1916년 프랑스 군인들의 군마(軍馬)에 치여 죽은 사건이었다.[3] 그 후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패하자 슈바이처의 고향은 프랑스 영토가 되었고, 이에 따라 그는 프랑스 국적을 선택할 수 있었다. 슈바이처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가봉에서 활동하는데 어려움이 없도록, 국적을 독일에서 프랑스로 바꿨다. 1924년 아프리카 병원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한센병 환자 거주지도 추가로 세우는 등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의 이러한 활발한 활동은 36명의 백인 의사, 간호사 그리고 다수의 원주민 직원들의 봉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병원운영에 필요한 돈은 3년에 한 번 꼴로 유럽으로 돌아와 연주회를 열어 번 돈과 저서의 인세, 강연으로 받은 돈과 기부금으로 충당되었다. 1957년 라디오 강연과 신문 기고를 통해 핵무기에 반대하는 반핵운동을 하였으며, 1965년 랑바레네에서 그가 사랑하는 바흐의 음악을 들으면서 숨을 거두었다.
[편집] 신학 연구와 사상
알베르트 슈바이처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1913년작,원제:《라이마루스에서 브레데까지..》)에서 자유주의 신학의 예수전들이 사실은 저자가 갖고 있던 생각과 당시 시대배경을 역사적 예수에게 투사한 것이라고 규명하여,예수전들에서 묘사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초기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생각하던,도덕적으로 이상적인 인간의 이미지일 뿐이지,역사적 예수의 진짜 모습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4] 슈바이처는 예수가 말한 하느님의 나라를 앞으로 오게 될 종말론적인 나라로 이해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정의와 평등이 실현되는 현실속의 나라로 이해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제국 시기의 독일에서 태어난 그는, 예수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그의 생존 당시 일부 학문 집단을 중심으로 유행했던 역사적 관점에 기초하는 비종교적 접근 방식과 예수를 세상의 종말을 예언한 그리스도로 보는 전통적인 종교적 접근 방식에 모두 반대하였다. 실제로 슈바이처는 역사적 예수론에 대해 예수를 완전한 윤리적 인간으로 이해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그리스도론이 투영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슈바이처는 일생동안 현실에 근거한 보편적 도덕 윤리를 찾고자 하였으며, 또한 이것이 모든 인류에게 전파되게 하고자 노력하였다.[5] 이러한 그의 정신은 그가 생전에 남겼던 다음과 같은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동정심이라는 이름의 원을 모든 생명에게로 넓히기 전까지는, 인간은 진정한 평화를 느낄 수 없다."
(Until he extends his circle of compassion to include all living things, man will not himself find peace.)
"나는 여러분의 운명을 알지는 못 하지만, 이 한 가지만은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 정말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봉사란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를 끊임없이 탐구하여 깨달은 사람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I don't know what your destiny will be, but one thing I do know: the only ones among you who will be really happy are those who have sought and found how to serve.)
[편집] 주석
- ↑ (영어)Nobel Peace Prize 1952 — Presentation Speech
- ↑ 루터교회의 예배양식은 즉, 전례는 성서정과에 근거한 말씀의 선언과 성만찬이 균형을 이루는 성찬예배이다.
- ↑ 슈바이처의 자서전《나의 생애와 사상》(범우사 刊)을 보면 어머니가 제1차 세계대전당시 프랑스 군마에 치여 죽은 일이 언급되어 있다.
- ↑ 《주요 주제를 통해서 본 복음서들의 신학》/김득중 지음/한들출판사, 《복음서신학》/김득중 지음/컨콜디아.
- ↑ (영어)Albert Schweitzer. Worthy Lives. International Network on Personal Meaning (2007년 1월 5일). 2007년 1월 12일에 확인.
[편집] 저서
- 나의 생애와 사상
- 사도 바울로의 신비
- 현세계의 평화문제
- 바흐의 오르간 작품
[편집] 바깥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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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옹 주노(1951) · 알베르트 슈바이처(1952) · 조지 마셜(1953) · UN 난민고등판무관실(1954) · 레스터 볼스 피어슨(1957) · 조르주 피르(1958) · 필립 노엘베이커(1959) · 앨버트 루툴리(1960) · 다그 함마르셸드(1961) · 라이너스 폴링(1962) · 국제 적십자 위원회(1963) · 마틴 루서 킹 주니어(1964) · 유니세프(1965) · 르네 카생(1968) · 국제노동기구(1969) · 노먼 볼로그(1970) · 빌리 브란트(1971) · 헨리 키신저 / 레득토(수상 거부)(1973) · 숀 맥브라이드 / 사토 에이사쿠(1974) · 안드레이 사하로프(197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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