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러리가 방한(訪韓) 가방에 챙긴 것들
작년 연말 상원의원 존 케리와 힐러리 클린턴이 차기 국무장관 후보로 거론됐을 때
미국의 한 칼럼니스트는 힐러리가 더 적임자라고 했다.
케리는 미국에서 '같이 차를 마시고 싶지 않은 상원의원' 10명을 뽑으면
반드시 그 안에 들어갈 성격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했다.
반면 힐러리는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오래전에 잠깐 스쳐간 사람을 알아보고
어떤 주제로든 열띤 토론을 벌일 수 있는 놀라운 붙임성과 다양한 화제의 소유자이기 때문에
더 낫다는 것이다.
힐러리는 중동 평화협상 같은 어려운 일을 시작하면 6개월 정도는 집에 가지 않고 버틸 수 있을 정도로
끈질긴 근성을 갖고 있다. 조직 장악력도 뛰어나서
파월 전 국무장관이 체니 부통령에게 주도권을 빼앗겼던 것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더더욱 국무장관에 적격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힐러리의 국제적인 인기였다.
미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될 뻔했던 거물인 데다, 퍼스트레이디와 상원의원을 지내는 동안
80개국 이상을 방문하며 주목받았다. 부시 대통령 시절 손상된 미국의 인기를 복원하는 데
이보다 더 효과적인 인물도 없는 것이다.
그 힐러리 국무장관이 19~20일 방한한다. 이명박 대통령과는 오찬이 예정돼 있고 여성계 인사들과의
만남도 추진 중이라고 한다. 미 국무장관의 첫 해외 나들이는 전통적으로 유럽이나 중동이었다.
그런데 힐러리는 아시아를 택했다.
오바마는 힐러리의 여행 보따리에 어떤 의제를 담아주었을까.
공식적으론 국제 금융위기와 기후변화 등이 안건이다.
그러나 2007년 오바마가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즈(Foreign Affairs)'에 기고한 글을 보면,
아시아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오바마는 아시아에 "더 효과적인 틀을 만들겠다"고 했다.
양자 합의나 가끔씩 하는 정상회담, 북핵 6자회담 같은 임시기구를 넘어서,
필리핀의 테러에서 인도네시아의 조류 인플루엔자까지도 다 다룰 수 있는 포괄적인 기구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물론 첫 방한에 힐러리가 이렇게 구체적인 안건을 들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오바마 취임 후 달라진 미국과 함께 일하고 싶은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한
목표일 수 있다. 조지프 바이든 부통령도 이미 이달 초 유럽으로 날아가
"미국 외교가 새로운 시작버튼을 누를 때가 됐다"는 오바마의 메시지를 전해 호의적인 반응을 얻었다.
바이든은 오랜 우방인 유럽국가들에 "미국은 파트너들에게 더 많은 참여를 요구할 것"이라고 했다.
오바마와 바이든, 힐러리가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 것은 국제사회의 합의와 협력이다.
부시 대통령의 일방주의에 질려 미국에 냉담해진 국제사회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
우선과제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의 강력한 지도력을 추구한다는 점에선 부시와 다를 바 없지만,
오바마는 제도와 틀과 국제기구 등을 통해서 지도력을 행사하겠다고 다짐한다.
뼛속 깊이 정치인인 힐러리는 외교에서도 '정치감각'을 중시한다. 동맹을 강화하고,
적대세력과 대화하고, 반드시 적은 아니어도 미국에 도전하는 세력들을 제대로 관리해
미국의 리더십을 회복하려면 외교에서도 '정치가다운 능력'이 중요하다고 본다.
오바마의 메시지는 결국 국제사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많은 국가들이 책임과 부담을 나누자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오바마식 외교에서
미국의 동맹국들은 이전보다 더 복잡하고 무거운 짐을 나눠지게 될 것이다.
힐러리의 첫 임무는 어쩌면 아시아 국가들이 자원봉사자의 심정으로
그 짐을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강인선 기획취재부 차장대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