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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한 인기 드라마에서 공부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등학생이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해 자살하는 이야기가 방영되었다. 아이는 감성적 성격으로 미술을 공부하고 싶었지만 엄마의 강권에 못 이겨 특목고에 진학한 인물이다. 아이는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해 퇴학하기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끝내 자살을 선택한다. 아이의 엄마는 아들이 우울증을 앓고 있었음에도 성적이 오르면 좋아질 것이라고 애써 외면했고 결국 아들이 죽은 후에 죄책감으로 자책하기에 이른다. 공중파 드라마에서 청소년의 자살을 그렇게 직접 다룬 것은 꽤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많은 이에게 충격을 주었던지 방영된 다음날은 만나는 사람마다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사실 청소년의 자살이 그렇게 드문 일만은 아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나라의 자살인구는 일 년에 11만명을 웃돌고 있으며, 국내 사망 원인 가운데 5위이고, OECD 국가 가운데 선두를 달리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갑작스러운 아노미 상태에 들어간 인구가 많은 데다 정치·경제적 부침이 심해서인지 최근 10년간 자살률의 증가는 폭발적일 정도다. 전체 자살자 수 가운데 10대가 차지하는 비율은 2.5% 정도로 비록 적지만(가장 많은 연령대는 40대로 약 20%를 차지한다) 10대 사망 원인 가운데는 2위를 점하고 있다. 점점 커지는 입시 압박, 학내 폭력, 급격히 늘어나는 가족 해체로 인한 대상의 상실 같은 것이 여기 작용한다고 본다. 하지만 청소년의 경우, 부모 혹은 주변사람이 주의를 기울여서 미연에 방지할 수 있을 가능성은 성인이나 노인보다 훨씬 높다.
올해 3월에 성남시에서 ‘소아·청소년 정신보건사업’을 시작하였다. 정신보건사업이라는 것은 병원에 찾아오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지역사회 안에서 정신 건강에 관한 위험 요소를 찾아내고, 교육과 정보 제공을 통해 정신장애를 예방하며, 고위험군을 미리 발견해서 조기치료하려는 공공보건사업이다. 정신보건사업의 도입 초기에 주로 대상이 되는 것은 만성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5~6년 전 본격적으로 시작된 소아·청소년 정신보건사업은 주로 학교를 통해 아이들의 정신 건강을 살피고 도와주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올해 사무실을 열고 6월부터 학교에서 정신 건강 문제를 가진 아이들을 선별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우선 참여 학교의 신청을 받고, 정신보건 사회복지사와 임상심리사로 구성된 팀이 학교에 나가서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우울증과 기분조절장애, 자살위험도, 사회성 문제 등을 선별할 수 있는 설문지를 나누어 주었다. 일부는 부모님께 전해 드렸고, 어떤 학교는 교사가 아이들에 관해 작성해주도록 부탁하였다. 중·고등학교 학생의 경우에는 주로 아이들 스스로가 설문에 답하도록 하였다. 결과가 다 취합된 뒤 일정 점수 이상을 받은 아이들, 즉 정신 건강에 이상이 있을 ‘가능성이 있는’ 아이들의 보호자에게 결과를 설명하는 우편물을 보내고, 2차 정밀검진에 들어갔다. 설문지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단지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므로 진짜 정신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직접 아이와 부모를 만나 보고, 이야기를 들어 보고, 체계적인 평가를 해야만 하는 것이다. 마치 직장 신체검사에서 간기능 수치의 이상이 발견되었는데, 그것이 전날 과음한 탓이나 아침을 굶지 않고 피검사를 했기 때문인지 정말 간질환에 의한 것인지 알기 위해서는 간염 항체검사도 하고 간 초음파검사도 해보아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막상 2차 검진대상자를 선정해놓고 정밀검진을 하러 오라고 일일이 전화를 하기 시작하면서 좀 의아한 현상이 나타났다. 정밀검사를 받으러 센터로 나오겠다고 응답하는 비율이 애초 예상보다 턱없이 낮은 것이다. (검사비용은 전액 무료다.) 오지 않겠다고 하는 이유는 다양하다. 그 중에는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 아이를 왜 정신병자로 모느냐”고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정신과라는 말이 주는 거부감이 아직도 강력하구나. 게다가 그것이 소아·청소년과 붙어 있을 때 느껴지는 생경함이라니. 아마 막연한 낯설음 때문이겠지’라며 자조 섞인 이해를 하면서도 막상 좀 안타까워지는 것은 사실이다.
자살위험도 같은 경우에는 약 3.5%의 중·고등학생이 자살생각에 대한 정밀검사가 필요한 수준이라고 생각되었다. 자살생각 설문지에서는 자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자살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있는지, 자살을 문제 해결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인생에 대해 얼마나 가치를 두고 있는지 등을 본인에게 직접 묻게 되어 있다. 어쩌면 거기서 선별된 아이들 중의 적어도 일부에게는 삶과 죽음이 걸린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에, 자살위험이 있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2차 검진을 권할 때 조금 더 분명하게 통보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많은 부모가 “그럴 리가 없다. 아이가 장난으로 작성했을 것”이라거나 “우리 아이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가만히 두라”고 냉랭한 반응을 보일 때 가장 난감하다.
중학생쯤 되면, 아이들은 부모에게 자기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는다. 게다가 자살의 원인 가운데 80%를 차지하는 우울증은 그 증상이 밖으로 잘 나타나지 않고 단지 좀 짜증스럽거나 게으르거나 집중력이 부족한 아이로 인식되기 때문에 주의 깊게 보지 않으면 부모가 먼저 발견하기는 어렵다. 자살생각 역시 부모에게 숨기는 경우가 많은데, 일단 아이가 그것을 표현하게 되면 ‘도움을 청하는 징후’로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어느 날 학교에서 나눠 주는 설문지에 정말 죽고 싶다고 표시했다면, 그것이 정말 장난이 아닌 다음에야, 일시적인 것이든 오랜 기간 고통 받아 온 것이든 아이는 뭔가 압박을 느끼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통보했을 때 부모가 보이는 반응을 보며, 어쩌면 ‘부정(否定)’이라는 기제가 많은 아이의 극단적 선택을 막는 데 저해요인이 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드라마 속의 엄마 역시 자기 마음속 부정에 속은 것이다. 사람은 큰 일을 당하거나 중요한 상실을 겪을 때, 거기에서 오는 심리적 불균형 상태를 처리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어기제를 작동시키는데 그 중 첫 번째 것이 부정이다. 다시 말해 이미 벌어진 일을 무의식중에 ‘없던 일’로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자녀가 자살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면, 엄마 마음속에는 자녀의 안녕에 대한 불안이 밀려오게 되고, 자연스럽게 ‘듣지 않은 일’로 처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자녀에게 직접 듣는 것도 아니고 낯선 사람으로부터 그 사실을 통보 받고 나니, 타인이 자신의 가족 일에 침범해 들어오는 것에 대한 불안까지 더해져 더 단호하게 거절해 버리게 되는 건 아닐까?
이 험한 시절에, 더구나 급변하는 격동의 청소년기라면 부모는 자녀가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곧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아니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받아들여지고, 도움을 받을 때 행동으로 옮겨질 확률이 낮아진다. 자녀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 불안해 하지 말고 일단 비판 없이 듣고 볼 일이다. 원한다면 도와줄 수 있는 방법도, 부모의 편이 되어 줄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 ▒
/ 유희정 | 경희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의학박사. 현재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분당서울대학교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 전문의.
- [닥터 유희정의 마음 클리닉] 강남 엄마 따라잡기 전에 아이의 생각을 따라잡아라
- 이 험한 시절에, 더구나 급변하는 격동의 청소년기라면
부모는 자녀가 그 어떤 생각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 곧 ‘행동에 옮긴다는 것’은 아니다. 자살에 대한 생각은 오히려
그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받아들여지고, 도움을 받을 때 행동으로 옮겨질 확률이 낮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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