鶴山의 草幕舍廊房

유럽 아프리카

(15) 13월의 태양이 뜨는 나라

鶴山 徐 仁 2007. 2. 25. 19:57

 

섣달 그믐날이 가면 오는 ‘설날’이 한해의 시작을 의미하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우리도 서역(西曆)이 아닌 우리 고유의 달력을 쓰던 때가 있었으니까. 그때는 설날이면 설날이지 그걸 다시 음력설이나 양력설로 나누어 기념하는 번거로움은 없었다. 우리가 ‘설날’이라는 말을 되찾은 게 그리 오래되지 않는다. 그 사이 ‘음력설’도 모자라 ‘민속의 날’로 바꿔 써야 하는 수모를 겪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아직도 ‘신정’, ‘구정’이라며 새날을 구분하는 사람들이 있다. ‘설날’은 가만히 그 자리에 있는데 정작 그 날을 기념해야 할 사람들에게 기준이 없어서 벌어진 일인지도 모르겠다.

’설날’이라는 말은 되찾아 왔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의 기준으로 보면 그날은 더 이상 새해 첫날이 아니다. 한국이나 중국, 베트남처럼 음력을 사용하는 나라들은 다 그렇게 ‘설날’과 새해가 다르다. 남이 쓰는 달력을 사용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 하는 일들이다.

▲ 에티오피아 달력. 에티오피아 달력으로 1999년 1월 1일은 한국에서의 2006년 9월 11일. 에티오피아 캘린더만 표시하기도 하지만 최근에는 사진에서처럼 보편적인 서역을 같이 표시하는 경우가 많다.

▲ 커피 생두를 볶는 모습. 집에서 커피를 마실 때도 생두를 직접 볶아 절구에 곱게 빻은 후 이 가루로 커피를 만들어 마신다. 에티오피아에서는 커피를 ‘분나’라고 한다.

에티오피아에 오기 전에는 새해와 ‘설날’을 두 번씩 기념하는 나라가 우리나라를 비롯해 음력을 사용하는 나라들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에티오피아도 그런 나라 중에 하나였다. 우리는 새해와 ‘설날’의 차이가 양력과 음력의 차이라서 날짜가 길어도 두 달을 넘지 않는다. 달력의 한해가 바뀌고 한달 이내, 혹은 한달이 조금 넘으면 설날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티오피아는 무려 아홉 달이 지나서야 설날을 맞이할 수 있다. 게다가 연도도 우리 역법으로 따지면 7년이나 늦다. 따라서 에티오피아의 신년 풍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들의 독특한 캘린더 시스템을 알아야 한다.

에티오피아에는 태양이 13개월이나 뜬다는 사실을 아는가. 에티오피아는 우리처럼 서역인 그레고리안(Gregorian) 역법을 사용하지 않고 율리우스 역법(Julian Solar Calendar)을 사용한다. 그 때문에 에티오피아 캘린더는 우리 보다 약 7년이 늦어 이들에겐 아직 2007년이 오지 않았다. 에티오피아 캘린더로는 올해가 1999년이다.

율리우스 역법에 따라 에티오피아에서 한달은 30일이다. 이렇게 12달을 계산하고 남은 5일 혹은 6일은 이들이 ‘뽜그메(’뽜’는 파열음)’라고 부르는 13월이다. 이들의 캘린더 시스템을 모르면 도저히 왜 에티오피아에는 13월의 태양이 뜨는지 이해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들에게는 1년이 12개월이 아닌 13개월이 되고, 신년은 매년 1월 1일이 아닌 9월 11일부터가 된다. 온 세계가 다 치른 밀레니엄을 이들은 올해 맞이하게 된다. 참고로, 우리가 쉬는 매년 1월 1일은 이들에게 공휴일이 아니기 때문에 에티오피아 관공서는 이날 근무를 한다.

우리가 해가 바뀌는 1월 1일과 곧 찾아오는 설날에 나름의 풍속이 있듯이 에티오피아에도 고유의 풍습이 있다. 우리 달력으로는 9월에 해당되며 9월도 첫 날이 아닌 11일부터 새해가 시작되기 때문에 서역을 사용하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들에게는 9월 한 달이 참 낯설다. 학원이나 헬스클럽, 수영장 등이 9월 12일부터 개강을 하고, 금연이나 금주의 다짐을 9월 11일부터라고 못 박는 경우가 많다. 에티오피아 정교회, 이슬람교, 개신교가 에티오피아 내에서는 아주 사이가 좋은데, 이날 교회나 모스크에서는 그리 요란하지 않은 예배를 본다.

▲ 옥수수 낟알을 볶는 모습. 축제나 명절에는 다들 둘러 앉아 볶은 옥수수를 먹으면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눈다. 와인을 곁들이기도 한다. 옥수수는 에티오피아 말로 ‘보꼴로’.

▲ ‘다보’라고 부르는 에티오피아 전통 스타일의 빵. 단맛이 전혀 없는 아주 심심한 빵이다. 외국인을 에티오피아에서 ‘파렌지’라고 하는데 우리가 즐겨 먹는 단맛 나는 빵은 ‘파렌지 다보’라고 부른다.

가정에서는 우리처럼 차례를 지내는 의식은 없지만 명절을 전후로 한 일주일간 온 집안에 마르지 않은 파란 풀들을 깔아 놓는다. 이 풀들은 거의 1주일 동안 청소를 하지 않은 채로 방치해 둔다. 바닥에 풀들이 깔리기 시작하면 만나는 사람들에게 ‘은콴 아데라사초(Happy Holiday)!’라고 인사한다. 우리가 새해에 만나는 사람들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하는 것처럼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나누는 새해 인사다.

그리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평소 주식으로 먹는 ‘인제라’에는 소스의 종류가 몇 가지 늘어나고, 양을 집에서 직접 잡아 요리를 하기도 한다. 담소를 나누며 주전부리 할 수 있는 음식도 마련한다. 이 때 대표적인 것이 에티오피아 전통 스타일의 빵인 ‘다보’와 ‘보꼴로’라고 부르는 옥수수다. 소수민족의 하나인 거라게족들은 마당 한가운데 불을 피우고 여기에 가마솥 뚜껑을 엎어놓은 것 같은 대형 팬을 내 건다. 팬에 볶는 ‘보꼴로’에서 고소한 냄새가 나는 동안 남자들은 노래를 부르며 키높이 정도의 나무를 묶어 태우면서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매캐한 연기가 온 집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구경하면서 두런두런 서로 이야기들을 나눈다. ‘보꼴로’를 볶는 곳 옆에서는 커피 생두를 직접 볶아 뽑아 낸 커피가 준비되기도 한다.

그러면 서역을 쓰는 나라들이 새해라고 부산을 떠는 때에 에티오피아 사람들은 무엇을 할까. 대개 우리의 1월에 해당하는 이 때가 되면 에티오피아에서는 새해와는 상관없는 두 가지의 큰 행사가 열린다. 두 가지 모두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영향에서 온 행사인데 하나는 그리스도 탄생을 기념하는 1월 7일의 크리스마스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세례를 기념하는 1월 19일의 팀캇(Timkat 혹은 Timket, 암하릭어로 말할 때는 좀 세게 발음해야 한다.) 페스티벌이다.

종교적인 영향으로 에티오피아에서 크리스마스는 12월 25일이 아니라 1월 7일이 된다. 암하릭어로 ‘제나(Genna)’라고 하는 크리스마스가 오면 사람들은 전날부터 교회에서 날을 새우며 예배를 본다. 그리고 당일에는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데, 9월 11의 설날처럼 이 시기에 고향을 떠났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온다. 1월 19일에 대대적으로 거행되는 팀캇 페스티벌은 공식적으로 3일이 휴일인데 대부분 일주일 정도의 연휴를 즐기며 가족들이 함께 시간을 보낸다. 이 날도 사람들은 광장으로 모여 축제를 즐기는데 특히 세례의식이 포함되기 때문에 서로 물을 뿌리며 그리스도의 세례의식을 기념한다.

▲ 축일이나 명절이 되면 집안 곳곳에 이런 풀들을 깔아 놓는다. 보통 기념하는 날 앞뒤 일주일 정도 청소도 하지 않은 채 방치해 둔다. 명절이 가까워 오면 시장이나 길가에서 이 풀을 묶어 파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에티오피아 정교회의 최대 축제 중의 하나인 마스칼. 우리 달력으로 매년 9월 27일에 열리며 이들에게는 신년에 치르는 아주 큰 행사이다. 마스칼이 열리는 광장 이름도 ‘마스칼 광장’이다. 이곳에 쉐라톤 호텔에서 세운 대형 전광판이 있는데 한 해의 마지막 날 아디스 아바바 시민들은 마스칼 광장에 모여 불꽃놀이도 보고 쉐라톤 호텔 공연장에서 생중계하는 심야 콘서트를 밤을 새워가며 본다. 볼거리가 별로 없는 ETV(에티오피아 방송국) 프로그램도 호텔 심야 콘서트로 채워진다.

▲ 에티오피아 정교회 신자들의 기도하는 모습. 간절하게 갈구하는 이런 모습은 에티오피아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수천년 전부터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입었던 흰색의 가비를 이들은 지금도 입고 있다.

▲ 명절이 가까워오면 주택가 근방에서는 양을 풀어놓고 파는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장에서 마음에 드는 양을 골라 집에 가지고 와서는 직접 잡아 요리를 해 먹는다.

▲ 에티오피아 달력으로 연말에 방문한 한 카페의 광고판. 에티오피아에는 아직 2007년이 오지 않았다.

▲ 80여 개의 소수민족 중 거라게 그룹의 연말 풍습. 남자들이 노래를 부르며 키높이 정도의 나무를 묶어 태우면서 온 집안을 돌아다닌다. 사진에 흐릿하게 보이는데 앉아 있는 여자는 생두를 볶아 커피를 만들고 있다. 기아와 빈곤으로 피골이 상접한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언론매체에 자주 소개되는데 신장이 180cm가 넘는 이 사람들을 보고 처음에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남자고 여자고 에티오피아에는 이렇게 훤칠한 사람들이 아주 많다.

 

 

 

<윤오순>

기사일자 : 2007-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