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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鶴山 徐 仁 2006. 6. 10. 22:22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 (1)
 <1997년 가을 전통과 현대>
 
  일시 : 1997년 7월 23일
 장소 : 서울 힐튼 호텔 비즈니스센터
 참석자 : 김영작/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장명국/주간 내일신문 편집주간
 조갑제/조산일보 출판국 부국장
 사회 : 함재봉/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본지 편집주간
 
 함재봉
 오늘 좌담의 주제는 "박정희를 어떻게 볼 것인가?"입니다. 최근 들어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 문제가 많이 거론되고 있습니다만 오늘은 이 문제를 좀 더 깊이 있게 다루어 보고자 합니다. 얼마 전 여론조사에 따르면 역대 왕과 대통령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람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세종대왕을 누르고 뽑혔고, 직무를 가장 잘 수행한 대통령에는 80%의 지지를 받았다고 합니다. 게다가 이인화의 소설, 김정렴 전비서실장의 회고록, 최근 모 일간지에 연재되고 있는 시리즈물 등이 출간되면서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재평가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이것은 현정권에 대한 불만이 우회적으로 드러난 사회심리적 현상 또는 우리 사회의 전반적 보수화 현상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만 우선 왜 현 시점에서 이러한 박정희 재평가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김영작
 현상으로는 역시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실망이 반사회물이란 측면이 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개인에 대한 실망뿐 아니라 현 정부가 내세운 '문민성'에 대한 회의가 일고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서 역사를 '문민 대 군인'이라는 이분법적 구조 속에서 획일적으로 재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한 지적인 반성이 일면서 현실정치에 대한 실망이 첨가되어 획일성, 민주화 일변도, 문민 일변도의 시류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업적을 기준으로 한 과거의 정치에 대한 평가가 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를 보는 시각, 역사를 평가하는 기준 등이 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민주화'만이 아니라 정치의 내용과 업적, 능률 등의 가치를 새로운 평가기준으로 삼기 시작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을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현 정치에 대한 실망으로 대중들은 다른 이념형을 찾기 시작했는데, 그럴 경우 바로 앞 정권에서 그것을 찾기는 현실적으로 힘들게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박정희로 거슬러 올라간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도 '독재 대 민주'와 같은 획일적 평가기준으로부터 탈피하는 단계에 왔다고 하겠습니다. 무조건 긍정하거나 부정하는 식의 논리가 설득력을 잃게 된 것입니다. 즉 권력의 창출 과정뿐 아니라 그것의 행사과정에 대한 정당성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일고 있는 것입니다.
 
 장명국
 저는 21세기를 바로 코앞에 둔 현재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대안이 적절치 않고 현 정권의 공허한 민주화에는 실망하고, 그런 결과로 일종의 '박정희 신드롬'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박정희 정권은 우리가 우리 자신만의 모델로 가질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있습니다. 개항 이후 줄곧 서양의 모델만을 수동적으로 따라 왔던 우리에게 자신감을 주는 것입니다.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것이 또 다른 고민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박정희를 단순히 매도하거나 찬양하는 미숙한 단계를 지나 더 큰 고민을 시작하는 단계가 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우리 국민들은 경쟁력을 고려하지 않는 과거형 민주화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박정희 시절에는 성장, 건설, 수출, 개발과 같은 경쟁력의 조건들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보릿고개로 상징되는 절대빈곤의 시대를 이겨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당시의 민주화라는 또 다른 가치가 손상된 것이 사실입니다. 현 정권을 비롯한 기성 정치인들은 바로 민주화를 대변하는 진영이었습니다. 국민들은 이제 양자를 동시에 고려할 것을 요구합니다. 과거의 역사에 대한 재평가가 시대적 조류로 등장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조갑제
 제가 알기로는 이미 80년대 초부터 박정희 묘소를 참배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부분 농촌 출신인 그들의 머리 속에는 박정희가 가난으로부터 민족을 구한 지도자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현재의 신드롬이란 것이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며, 이미 박정희는 일반 국민들 사이에서 꾸준한 지지와 인기를 누렸다고 봅니다.
 
 다만 최근에는 그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지식인층에서도 박정희를 다시 보고 있다는 점이 새로운 것입니다. 지식인들이 언로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현 정권에 대한 실망이 반사적으로 박정희에게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는 제도적, 물질적인 근대화를 추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근대화 혁명가'로 평가합니다.
 
 문민을 표방한 현정권은 정신과 상부 구조적 근대화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으나, 실제로는 근대화가 아니라 복고로 돌아갔습니다. 근대적 정치에서 조선시대의 주자학적 문민정치로 돌아간 것입니다. 중앙청 철거, 청와대 집무실 철거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즉 도덕주의, 명분주의, 풍수사상과 같은 비과학주의에 매몰되어 국민들이 원하지 않는 의제를 제시함으로써 오히려 퇴보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역사발전 단계에서 주어진 과제를 실현하지 못한 것입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정치적인 무력화는 박정희 근대화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는 중산층의 보복의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함재봉
 농촌출신이나 기성세대에서 박정희가 인기가 높은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지만, 20대의 젊은 층이 박정희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김영작
 80년대 한국의 젊은이들은 상황을 떠나 관념적인 비판에 빠져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젊은 세대의 박정희 재평가는 여기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된 것 같습니다. 조선조가 몰락한 주요 이유 중의 하나로 통치계층의 에토스(ethos. 사회의 기풍)를 꼽을 수 있습니다. 문약성, 관념성, 사변성 그리고 정치적 현실을 무시한 형이상학적 문화의식 등이 현실적 문제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게 만든 요약이었던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현대사를 보는, 박정희는 반대로 철저한 '정치적 현실주의자(political realist)'였습니다. 우리 현대사에서는 보기 드물게 목표를 설정하고 거기에 맞는 합리적인 수단을 취하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점이 그 동안 제대로 평가되지 못했습니다. 정치를 바라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치란 여러 가지 가치간에 우열순위를 정해주는 것이며, 그것은 상황여건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을 떠나 '민주화'와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가지고 정권을 비판하는 데서 오는 단세포화에 대한 반발심이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의 획일화된 정치관, 단세포화된 역사관에 대한 반성이 학생들 사이에서도 일고 있습니다. 학생들까지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권력에 대한 저항, 권위에 대한 평가가 그들이 다시 저항하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문민정부를 비판하는 보조수단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또한 과거에는 학생운동이 소수 엘리트가 이끌었고 일반 학생들은 그들에게 광범위한 동의를 보냈지만 현재는 전혀 그렇지 못하고, 이 때문에 많은 학생들이 일반인들의 의견에 따라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장명국
 요즘에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신드롬의 사전적 의미는 병리적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 결코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젊은이들의 이런 심리는 결코 치기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기성세대가 도덕적으로 미래지향적으로 무언가를 확실히 보여주면 젊은이들도 여기에 따를텐데, 지금은 그렇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모델이 없습니다.
 
 사실 박정희 스타일의 통치가 지금 다시 이루어진다면, 젊은 세대는 결코 거기에 적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과거에 연연하는 최근의 신드롬은 말 그대로 병리적 현상인 것입니다.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통해 이런 현상을 극복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조갑제
 지금의 20대는 사물을 볼 때 이데올로기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는 역대 정권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가능케 하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은 학자들의 몫이겠지만, 박정희는 한 마디로 혁명가이며 실용주의자이고 현실주의자입니다. 거기에 비해 김영삼 대통령은 위선적 도덕주의라고 봅니다.
 
 20세기 말의 급변하는 현실에서는 실용주의가 보다 더 호소력을 갖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른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가장 인기가 있다는 김구, 조광조보다도 김유신, 정조, 이승명과 같은 자주적, 실용적 인물들이 더 높게 평가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함재봉
 결국 역사의 재평가와 재해석의 문제로 연결된다고 봅니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현상은 대중들이 이미 다 알고 있던 이야기를 학자들이 뒤따라 정리하고 있는 구도인 것도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실용주의자요, 현실주의자인 박정희의 등정과정과 거기에 대한 평가의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과연 그의 등장은 정당하고 필연적인 것이었는지, 5.16은 쿠데타인가 혁명인가 하는 민감한 문제가 새삼스럽게 대두된다고 보는데, 여기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김영작
 상당히 포괄적인 문제입니다. 박정희의 재평가 작업이 역대 정권에 대한 편향된 평가에서 균형 잡힌 감각을 찾는 것이냐, 아니면 보수화의 현상이냐 하는 질문에 대답한다면, 양면성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정희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공개적으로 재등장했다는 것은 우리의 정신사와 정치문화에서 상당히 바람직한 계기를 마련합니다.
 
 문민이냐 군인이냐 하는 좁은 의미에서가 아니라 관념성과 실용성의 문제라는 보다 큰 구도에서 역사를 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물론 쿠데타에 대한 문제제기는 당연히 인정해야 할 부분입니다. 다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조선시대의 양반과 문민을 이상적인 모델로 설정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군부란 개념도 다소 애매하거나 하필이면 신라의 화랑이 아니라 조선의 양반을 모델로 삼았는가 하는 점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런 구도에 대한 반성이 일어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입니다. 물론 박정희식의 통치가 오늘날 다시 필요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의 실용주의적 정신과 그 에토스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는 작업 그 자체입니다. 재평가하는 회귀나 부활과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보수화라는 주장에 대해, 저는 이념적 차원에서보다는 반복되는 과거부정에 대한 비판에서 오는 것으로 봅니다.
 
 그런데 일부 정치인들은 이를 이념적 보수로 이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들은 박정희 재평가가 가져오는 심각한 의미를 외면하고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모델을 과거에 설정하는 것은 미래지향적인 목표를 위한 현실부정의 경우가 의미가 있는 것이지 단순한 회귀나 연고성을 통해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일입니다.
 
 다음으로 그의 집권이 필연이냐 권력욕이냐는 질문에 대답하자면, 두 가지 측면이 다 있으며, 이때 필연을 역사적 상황과의 인과관계라고 본다면, 결코 우연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일반적으로 군사쿠데타가 발생하는 국가들에서는 유사한 사회경제적 배경이 관찰됩니다. 그런 상황적 요인을 간과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군부의 의지만 가지고 쿠데타가 성공할 수는 없기 때문에 상황적 요인이 더욱 중요합니다.
 
 5.16은 당시 상황적 요인에 목적의식을 가진 정치세력의 구체적인 실천과 행동이 결부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상황이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쿠데타에 의한 권력형성은 민주주의적 정신풍토에서 결코 허락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혁명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쿠데타와 혁명을 구별하지 않은 채, 혁명은 무조건 미화되고 쿠데타는 배격됩니다. 절차상의 비민주성이 쉽게 구별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따라서 권력사용의 정통성과 집권과정이나 절차적 정통성은 동시에 논의되어야 합니다.
 
 장명국
 박정희의 암살 직후 모든 사람이 그를 비난했습니다. 15년 이상이 지난 현재 그가 다시 인기를 모으고 있고 현 정권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다시 15년이 지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질문을 해봅시다.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은 경쟁력과 건설, 개발의 측면에서 약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박정희의 정치는 분명히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였습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우리에게 바람직한 정치는 '권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인가 아니면 '봉사'를 중심으로 하는 것인가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두 번째로 저는 5.16은 인위적인 구데타였다고 생각합니다.
 
 박정희의 최대 치적은 경제성장이라고 합니다. 해방 후 경제성장의 궤적을 살펴보면 50년대 후반 무상원조가 차관으로 전환되면서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4.19로 인한 1년간의 혼란과 공백기가 있습니다. 이 당시 이미 자유당 정권에서 58년 경제개발계획을 수립한 바 있고 장면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민주당 정권의 내부적 취약성을 인정하면서도 나름대로는 장점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회를 갖지 못했습니다. 박정희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50년대 말 자유당 정권에 저항했던 국민적 에너지가 70년대 초에 다시 등장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더구나 21세기의 정치는 권력이 아닌 봉사를 통해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두환, 노태우 그리고 현 정부의 부패와 부정에 비해 박정희가 좀 덜했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룩했다는 것 때문에 아프리카의 다른 독재자보다 낫다는 평가는 가능하지만, 그의 집권이 인위적인 것이었고 다른 사람들의 기회를 차단하고 모든 기회를 스스로 독점했다는 점은 반드시 지적해야 합니다.
 
 게다가 경제성장이라는 측면에서 보더라도, 성장은 일제시대에도 그리고 자유당 시절에도 계속 되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홍보하는 능력과 효과가 달랐고, 워낙 장기집권을 했기 때문에 그만한 성과를 거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갑제
 저는 5.16에 대해서 지지를 보낸 사람도 많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미국도 5.16을 지지하는 입장이었고 한국의 여론도 비슷했습니다. 5.16은 쿠데타로 시작해서 혁명으로 끝났습니다. 권력을 잡은 방법이야 분명 잘못된 것이지만 이런 논의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5.16의 필연성 여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습니다.
 
 군부도 그들이 본질적으로 용병이 아니라 국군이기 때문에 일반 민심과 군심은 함께 간다고 봅니다. 오히려 당시에는 군부의 위기의식이 더 고조되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민주당 정권은 자유당 정권에 못지 않은 부패한 정권이었습니다. 따라서 쿠데타 계획이 공공연하게 알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막지 않은 것은 민주당 정권의 한계를 모두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윤보선 대통령은 쿠데타 소식을 접하고는 "올 것이 왔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당시 상황에 대한 국민의 의식을 대변한다고 봅니다. 5,16 직후 3일간 피신했던 장면의 행위도 쿠데타의 필요성을 충분히 입증합니다. 이런 지휘관을 두고 국가를 경영한다는 것이 당시 군부에게 얼마만큼의 위기감을 주었겠습니까. 물론 개인적인 불만도 개입되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쿠데타가 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대세' 때문이었습니다.
 
 지지선언을 한 학생들도 있었고 미국도 금방 현실을 인정했습니다. 지성계에서도 부패의 고리를 끊고 이제 경제개발을 추진해야 한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쿠데타의 명분과 일치했던 것입니다. 4.19로 나타난 민심의 열망과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과는 달리 박정희는 5.16을 통해 그것을 달성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함재봉
 그렇다면 이제 박정희 시대 경제성장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특히 국내에서보다도 국외 학계에서 먼저 경제성장에 있어서 박정희의 기여를 높이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과연 박정희 스타일의 통치가 경제개발에 알마만큼 기여했는지와 또 그것으로 그의 통치 스타일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를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민주화 세력이 박정희를 비판하던 주된 논거는 바로 그의 통치 스타일에 집중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영작
 어떤 정권도 결국에는 결과를 가지고 평가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설만 가지고는 무어라 평가하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상황을 떠난 평가는 금물입니다. 공과를 따지더라도 당시 상황의 불가피성 내지는 결함을 고려해야만 합니다. 가치 설정과 추진은 항상 상황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오늘날에 와서는 민주화라는 가치가 대단히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지만, 과연 박정희 시대에도 그랬겠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5.16을 두고 절차 문제를 제기하거나 쿠데타냐 혁명이냐 하는 논의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민주당 정부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민주적인 정권이냐 아니면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냐 하는 양면적 평가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저는 후자에 동조합니다. 민주당은 본인들의 힘으로 정권을 잡은 것이 아니라 학생혁명에 의해 정권을 수립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데타를 부르기에 충분한 빌미를 제공할 만큼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었습니다.
 
 당시 4.19에 참여한 학생과 국민 중에는 내심 5.16을 환영한 사람들도 상당히 많았습니다. 출발에 있어서 결함을 갖는 박정희 정권은 인권이 억압되고 민주주의가 발전되지는 못했지만 결과적으로는 고도성장을 달성했습니다. 이것은 당시의 상황으로는 총체적으로 올바른 국가 목표를 설정한 것이 아니었나 평가하고 싶습니다. 당시 우리의 국제위상은 세계의 극빈국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권이나 민주보다는 경제성장이 국가로서는 올바른 목표 설정이었다고 봅니다.
 
 장명국
 이 문제는 경제성장과 민주주의의 관계에 대한 논쟁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일본도 서구의 제도와 문물을 받아들여 빠른 경제성장을 이룩했습니다. 군국주의로 타락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빠른 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입니다. 박정희 역시 일본의 군국주의적 모델을 원용했다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나 대만도 기본적으로는 같습니다. 한국이 경제성장을 이룬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날의 문제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경제성장'과 '경제발전'은 구분해야 합니다. 전자는 양적인 개념이지만 후자는 구조적인 개념입니다. 박정희가 이룬 것은 경제성장이지 경제발전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그가 개인적으로 다른 길을 선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그가 선택한 방향이 옳으냐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그리고 일본식 모델을 한국에 인위적으로 적용한 것에 대한 타당성 논쟁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당시 우리가 가진 선택의 기회 속에서 다른 방향을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요. 특히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난이 구조적인 것임을 고려할 때 박정희식 경제모델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이 우리의 미래에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이제 대량생산의 시대는 가고 다품종 소량생산체제 그리고 보다 유연화된 경제구조가 요구되는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는 민주적인 가치가 더욱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따라서 양적인 성장에 치중한 박정희의 선택에 대해 비판적인 평가를 내릴 때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는 전체적인 경제와 사회의 틀을 바꿔야 할 시기에 있습니다. 박정희 같은 억압적이고 독재적인 방식은 현재 위기의 극복방안이 될 수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적 동의를 이끌어 내는 방법이 요구됩니다.
 
 김영작
 중요한 문제제기를 해주셨습니다만 당시의 상황을 다시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박정희의 경제전략이 군국주의형이라고 하셨지만, 많은 학자들은 '수출주도형 경제개발모형'이라고 평가합니다. 식민지론이나 종속이론을 주장하는 진영의 목소리도 충분히 납득하지만 역시 이런 주장은 이제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다만 여기에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수출주도형 모델을 평가함에 있어서도 시장경제에 부합하는 체제를 유지했기 때문에 성장이 가능했다고 보는 신고전주의와 국가의 개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는 국가주의적 시각, 이 두 가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두 가지에 따라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 이처럼 국가의 기능에 대한 비중에 있어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저는 당시로서는 수출주도형 산업화 모델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다만 분배의 문제나 산업구조의 측면에서 파생되는 많은 문제들은 일정단계가 지난 오늘날과 같은 상황에서 다시 개혁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조갑제
 박정희가 집권하기 이전 우리가 선진국이라 생각했던 나라는 필리핀, 파키스탄 등이었습니다. 이들이 오늘날 처한 상황은 따로 설명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저는 박정희를 평가함에 있어서 경제성장에만 연연하는 것은 다소 문제가 있다는 입장입니다. 참고로 통계를 인용하면, 박정희 시대보다 전두환, 노태우 시대의 GDP 성장률이 더 높습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인 국가의 근대화, 제도의 근대화라는 측면을 봐야 합니다.
 
 그는 물질적 근대화만을 추진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데 , 실제로는 정신적 근대화도 상당히 강조했습니다. 그가 강조한 것은 자조, 자립, 자주 등의 가치였습니다. 그는 가치의 우선 순위가 확고했고 이를 위해 전략을 합리적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는 경쟁의 원리와 인간의 이기심을 경제발전의 조건으로 이용했습니다.
 
 박정희는 혁명을 한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혁명가가 걷는 일반적인 길과 달리 민족주의에 바탕을 두면서도 폐쇄성으로 흘러가지 않고 실용주의적이며 대외 지향적인 정책을 선택했다는 데 그의 위대성이 있다고 봅니다. 또한 그는 장면총리로 대표되는 구(舊)정치인을 봉건적 잔재로 규정하고 자신으로 대표되는 진영을 근대적 국가 엘리트라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민주 대 독재'의 구도가 당시에 적용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박정희도 초기에는 민족자본기업을 육성하고 수입대체전략을 채택하였으나, 현실에 적합하지 않음을 간파하고 방향을 전환했습니다. 여기에는 미국의 조력이 상당한 역할을 했습니다. 미국의 도움과 박정희의 실용주의가 함께 대외 지향전략의 수립으로 작용한 것입니다.
 
 김영작
 분명히 박정희 개인에게는 일본의 군국주의적 가치성향이 있었습니다. 그가 군인출신이었다는 점도 그렇고, 그의 경력이나 성장과정, 심리상태를 봐도 그렇습니다. 일본을 모델로 설정한 것도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국민교육헌장을 만들어 암기하게 한 발상이 그렇습니다. 발상과 형태면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물질적 근대화와 국민들의 의식구조를 국민에게 호소력을 갖는 방향으로 풀어내는 데 성공한 인물입니다. 금욕적인 생활자세나 '잘 살아보세' 같은 구호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군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일반 국민들에게 호소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체제를 자본주의 체제로 유지했고 이를 적극적으로 긍정했기 때문에 산업국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도그마에만 빠지지 않고 현실적인 실천방향을 꾸준히 찾아갔습니다.
 
 조갑제
 박정희의 인물됨을 박정희의 서거장면을 회상해 보면 쉽게 드러납니다. 목격자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총을 맞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두 번이나 "난 괜찮다"고 했습니다. 일반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여기서 그의 사생관이나 인생관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자세는 수많은 위기와 위험을 겪어 오면서 축적된 것입니다.
 
 그는 기본적으로 토종 한국인이었습니다. 가난하고 약한 사람에 대한 동정심이 강한 것도 그렇습니다. 동시에 그는 일본식 교육을 받았고 사회주의에 빠진 적도 있으며 미국식 경영 마인드를 갖추기도 했습니다. 또 자주적인 소양을 가지고 있었기에 미국과의 관계에서 자칫 반미주의자로 보일 만큼 힘있는 자세를 취했습니다.
 
 그는 자주성 위에 실용적이며 현실적인 타개책을 결합했습니다. 그가 표방한 한국적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소설가 이인화는 박정희와 정조를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허위의식에 빠져 있는 지식인의 도그마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박정희는 미국식 민주주의를 교범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그래서 민주주의 앞에 한국적이라는 수식어를 단 것입니다.
 
 김영작
 박정희와 이승만은 모두 현실주의자였지만, 그들간에는 실용적인 목적에 따라 수단을 취사선택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에 차이점이 있었습니다. 박정희에게는 마치 실학자의 입장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비록 야만인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우라는 자세가 박정희의 독특한 면입니다.
 
 조갑제
 저는 박정희야말로 실학을 실천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실학정신을 실천하고 구현할 수 있는 수완인 권력을 잡은 사람이었습니다. 꿈꾸는 실학자가 아닌 '무장한 실학자'였습니다.
[ 2003-07-16, 17:34 ] 조회수 : 554710
출처 : 전통과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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