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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명장열전(2)

鶴山 徐 仁 2006. 5. 28. 17:30
세계 명장열전(2)-더글라스 맥아더 장군
관리자 
독창적 전략·전술의 大家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하면 제일 먼저 떠올리는 것이 전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대담한 인천상륙작전과 9·28서울 수복작전이다.

그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공산침략으로 부터 구출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는 1884년 1월 26일 아칸소 주 리틀록에서 아더 맥아더 장군의 아들로 군인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생을 전쟁터에서 보내면서 지략과 대담성의 군인 삶을 살아왔다. 대부분 그의 생애는 초고속 승진과 연전연승 개선장군의 영광과 환희로 빛나고 있다.

인천상륙작전 성공은 그를 한국전 영웅으로 만들었고 그의 인기는 본국은 물론 한국과 극동지역에서 하늘높이 치솟았다. 그의 일생에 가장 아쉽고 원통한 일은 그와 한국인들의 소원대로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남북통일을 성사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목표는 1950년 10월 중순 중공군 개입으로 아깝게 좌절되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 아더 맥아더는 남북전쟁에서 무공훈장을 받았고 그후 미국-스페인전쟁과 필리핀 내전에 참전하기도 했다.

육사 수석졸업, 1차대전 때 사단 지휘

맥아더 장군은 1903년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한후 소위로 임관, 공병대에 배치되었다. 맥아더는 군생활 초기 필리핀과 일본에서 그의 아버지 부관으로 근무했고 일본에서 러일전쟁(1904-5)을 현장 관찰하기도 했다.

1906년 그는 잠시 데오도르 루스벨트 대통령 군사부관 직책을 맡았고 1914년 대위때 맥시코 베라크루스를 점령했던 원정에 참가했다. 맥아더는 1차대전때 사단을 지휘한데 이어 2차대전 태평양지역에서 연합군을 지휘했고 한국전에서는 유엔군총사령관 직책을 수행했다.

1917년 1차대전에서 <42 무지개> 사단이 프랑스전선에서 싸울때 맥아더는 사단참모장에 이어 여단장과 사단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그는 전투때 적이 자기에게 절대 해를 입히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그는 작전때 마다 선두에서 부하들에게 대담성을 가지고 전진하라면서 쉬지않고 명령하곤 했다. 맥아더는 전투시 헬매트와 가스 마스크를 쓰지 않을 만큼 늘 용감했다.

1차대전후 그는 은성무공훈장 네 개를 받았고 1차대전 전쟁 영웅 존 퍼싱 장군으로부터는 "맥아더 장군은 우리부대에서 일찍이 없었던 위대한 지휘관이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 중의 한 사람

맥아더는 두말할 나위 없이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군들중 한사람이지만 동시에 대통령의 문민우위 권위에 도전, 가장 많은 논란을 빚었던 장군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그는 전략전술등 모든면에서 완벽할정도며 높은 학식과 교양을 갖춘 데다 드문 웅변가였다. 우뚝한 키와 귀족적 미남형의 풍모는 그를 더욱 당당하게 돋보이게 한다.

그는 대담한 군인이면서 동시에 멋을 즐기는 멋쟁이기도 하다. 꾸깃꾸깃한 작업모와 작업복 차림에 옥수수대 파이프와 래이번 안경이 그의 브랜드로 유명하다. 그는 작업복에 훈장을 다는 일이 없지만 5성계급장만은 반드시 달고 다닌다. 1950년 트루만 대통령과 태평양상 웨이크섬에서 만날때도 그는 이런 복장을 하고 나가 은연중 트루만 대통령의 노여움을 사기도 했다.

출중한 능력과 준수한 외모, 명문 군인가문 출신인 맥아더 장군은 군생활에서 항상 남보다 월등 앞섰기 때문에 부러울게 없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를 존경하거나 증오했지만 그의 적들을 포함, 모든사람들이 그의 전략적 독창성과 우수성, 수륙양용 상륙작전 전술의 대가,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를 쟁취하는 백전백승의 능력을 이구동성으로 칭송했다.

전역 후 재소집

그는 1919년 39세때 웨스트 포인트 육군사관학교 교장으로 취임, 역대 가장 젊은 교장이 되었다. 맥아더 교장은 사관학교 행정과 교과과목을 현대화했고 그때 정해진 교과목은 수십년간 거의 변하지 않았다.

맥아더는 1922년 잠시 필리핀에 부임했다가 1930년 대장으로 승진, 육군참모총장으로 발탁되었다. 35년 다시 필리핀에 부임해 독립에 앞서 필리핀 군대를 조직 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는 1937년 12월 31일 전역했다.

1차대전 참전외에 그의 대부분 군생활은 모두 아시아 태평양지역이 활동무대였다. 그가 미국에서 극동통(極東通)으로 알려진 이유다. 그러나 미국 전쟁성(戰爭省)(오늘의 국방부)은 일본의 잇따른 아시아 침략전쟁과 대미 침략전 조짐에 대비해 1941년 7월 26일 그를 다시 현역으로 재소집했다.

그는 극동 미군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임무는 필리핀에 대한 일본군 침공에 대비, 필리핀을 방위하는 것이었다. 일본은 그해 12월 8일 진주만 기습공격을 감행했으므로 그의 현역 복귀시기는 절묘했다.

맥아더 장군은 태평양전쟁에서 1942년초 일본군 공격으로 마닐라를 빼앗기고 오스트레일리아로 후퇴했다. 그는 2차대전때 연합군 남서태평양 방면 사령관으로서 45년 필리핀 수복과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을 때 까지 대일작전을 총지휘 했다.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는 필리핀을 일본군에게 빼앗기고 피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필리핀 국민들에게 약속했다. 맥아더 장군은 45년 7월 필피핀을 완전 탈환함으로써 이 약속을 지켰을뿐 아니라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45년 9월 2일 65세때 도쿄만 미국 미주리호 함상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문서를 받아냈다. 맥아더는 전후 일본 점령군 최고사령관으로서 6년간 일본의 전후복구와 민주헌정 수립 을 지원했다. 전후 일본은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고 국민들은 기아와 질병의 고통속에서 신음했다. 전후복구와 경제부흥을 도와준 맥아더는 옛날 원수였던 일본인들의 존경과 사랑을 한몸에 받았고 많은 일본인들은 그를 ‘왕관을 쓰지 않은 황제’로 불렀다.

맥아더는 전승국 군인으로서 점령지역에서 어떤 정치를 해야 하며 이를 위해 누구와 손잡아야 하는냐에 대한 모범적 해답을 제시했다. 그는 요시다 시게루 전직 외교관 출신 정치인과 협력, 전후 일본 부흥을 이끌어냈다.

그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이란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 6·25한국전도 진주만 기습공격 처럼 북한 공산군에 의한 기습전 남침이었다. 맥아더는 우선 전투부대 (스미스 대대)를 일본에서 한국전선에 급파했고 50년 7월 8일엔 유엔군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인천상륙으로 대한민국 구출

13만명 인민군 보병부대는 소련제 탱크를 앞세워 파죽지세로 남하,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했다. 한국군은 그때 북한의 위장평화공세에 속아 북한의 선의만 믿고 준비를 게을리 했다가 속절없이 당하고 만 셈이다. 인민군은 그후 낙동강 지역까지 밀고내려와 한국의 마지막 교두보를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해 9월 15일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대한민국을 구출했다.

그는 인민군 남침직후 급거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돌아갔다. 인천상륙작전 구상은 이때 맥아더 머리를 섬광처럼 스쳐갔고 그는 이 기본구상을 2개월 반동안 참모들과 수십차례 토론 끝에 마침내 실전 작전개념으로 굳혔다.

그는 인민군이 저항없이 남하를 계속한다면 보급로가 감당할 수 없이 길어질것이고 유엔군이 배후에서 공격, 보급로 허리를 끊으면 서울 이남 인민군은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될것이라고 생각했다.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의 이런 거친 구상이 극비리에 작전개념으로 다듬어져 일부 반대를 무릅쓰고 감행, 성공시킨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 성공은 한국 수도 서울을 재탈환함으로써 상당한 심리적 장점도 살릴수 있다고 믿었고 그것은 적중했다. 이 상륙작언은 그의 충성스런 애국심과 최고지휘관으로서 탁월한 지도력, 정의감, 반공정신, 동맹국에 대한 의리정신이 어우려져 일궈낸 찬란한 승리였다.

최종 작전안은 8월 23일 도쿄 맥아더 사령부에서 로튼 콜린스 합참의장과 해군작전처장 포레스트 셔만 제독, 그리고 자기 참모들과 장시간의 격론끝에 마무리 되었다.

그는 마지막 토론에서 일부 반대하는 장성들에게 특유의 과장법을 빌어 "나는 지금 찰칵 찰칵, 운명의 초침 소리를 듣고 있다. 당장 행동하지 않으면 우린 다 죽는다"고 비장한 결론을 내렸다.

인천상륙작전은 시작되었고 맥아더는 최소한의 사상자로 승리했다. 뒤이어 계속된 수도 서울탈환작전도 성공, 한국군은 그해 9월 28일 중앙청 꼭대기에 태극기를 꽂았다. 맥아더는 이승만 대통령과 나란히 세단을 타고 총탄구명으로 만신창이가 된 중앙청건물 행사장에 도착, 서울수복 축하행사에 참석했다.

"장군은 우리 민족의 구세주"

그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섭리로…, 유엔군은 대한민국 고도(古都) 서울을 공산 전제정치로 부터 해방함으로써 서울시민들은 불가침의 개인자유와 존엄성을 으뜸으로 하는 생활방식을 변함없이 누릴 기회를 회복하게 되었다"고 역설했다.

맥아더는 자기 옆 이(李) 대통령을 향해 "각하, 장병들과 저는 이제 군사작전임무 수행을 위해 민간행정 책임을 각하에게 넘긴다"고 말하자 눈물어린 노 대통령은 장군의 손을 덥석 움켜잡으면서 "우리는 장군을 우리민족의 구세주로 존경하고 사랑합니다"고 감동의 고마움을 표했다.

그러나 그후가 문제였다. 38선 이북으로 진격한 국군과 유엔군이 그해 10월 완전승리를 앞두고 돌연 중공군개입 복병을 만났기 때문이다. 압록강까지 쳐올라간 국군은 통일을 바로 눈앞에 두고 휴전으로 타협해야만 했다. 맥아더는 한국전 승리를 위해 중공폭격등 여러가지 확전론을 제시했다가 1951년 4월 11일 트루만 대통령에 의해 해임되고 말았다.

맥아더 장군은 1937년 이후 14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뉴욕환영 퍼레이드에서 7백만 군중들의 열광적 환영을 받았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는 "노병은 죽지 않고 사라질뿐이다" 라는 감동적 명연설을 남겼다.

그의 대통령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나 1차대전에서부터 핵시대와 냉전시기를 출중한 장군으로 살아온 그는 현대사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저명한 장군의 한사람이라는 점에는 누구도 토를 달지 못할 것이다.

글쓴이 : 여영무 인터넷신문 뉴스앤피플 대표 겸 주필
기사 제공 : 뉴스앤피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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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6-05-02, 1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