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Nelson 作
눈 내리는 12월, 몹시 추운 겨울날이다. 겨울날씨 추운 것이야 얘깃거리도 못되지만, 마흔을 며칠 앞둔 여자의 겨울이 춥다면 한 번 쯤은 들어 줄만할 것이다.
올 여름 지인(知人)에게 책 한권을 선물 받았다. 장안의 화제였던, 전경일씨의 <마흔으로 산다는 것>이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담담하게 들려주는 작가의 마흔 이야기에 한순간 마음을 빼앗겼다. 마흔을 갓 넘긴 남자가 보는 ‘세상과 인생’의 깊이에 움찔 놀라기도 하면서 ‘마흔 증후군’이란 글에는 ‘그래, 맞아’ 무심코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전경일씨의 ‘마흔’은 남자의 마흔이었고 여자의 마흔은 조금 다를 것 같다. 마흔의 경계선에 서면, 남자는 세상과 맞서지만 여자는 자신과 맞서야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여자의 ‘자신’이란 그 안에 자식과 남편도 공존한다. ‘나는 정말 행복해요’, ‘나는 슬퍼요’라는 말 속의 ‘나’ 조차도 오롯이 자신인 경우는 드물다. 자식으로 인해, 남편으로 인해 생기는 모든 기쁨과 슬픔이 내 것이 되는 나이가 바로 마흔 즈음인 것이다.
그러나 나는 감히(?) 자식과 남편을 잠시 뒷전으로 밀어놓고자 한다. 물론 쉽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절반 밖에 살지 않은 내가 자식과 남편을 빼고 무슨 할 얘기가 그리 많을까? 그럼에도 나는 쉽사리 이 유혹을 떨쳐내지 못한다. 서른 아홉의 겨울을 보내는 나에게로 현미경을 들이대며, 흐릿했던 것들을 분명하게 들춰내고 싶다. 훗날, ‘괜히 들춰냈다’는 후회를 하게 될지라도...
* 마흔 문턱에 선 이 여자의 속내 들여다보기.
1. 링컨이 말한 ‘얼굴의 책임’을 이해한다. 그럼에도 부담스럽다.
“나이 40에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을 단지 ‘예쁜 얼굴’로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기미나 주름살 생기지 않게 피부 관리 잘하는 게 비결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제는 피부 관리보다 더 힘든 것이 표정 관리라는 것을 안다. ‘예쁘다’는 말보다 ‘인상 좋다’는 말이 더욱 기쁘게 와 닿기도 한다. 그래서, 때론 속이 상해도 환하게 웃어야하고, 불편한 자리에서도 편안한 척 행복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책임을 진다는 건 어떤 상황에서나 부담스럽긴 마찬가지다.
2. 예쁜 여자보다 어려보이는 여자에게 질투한다.
아주 예쁜 여자를 봐도 샘이 나거나 부럽지 않다. 그냥 ‘예쁜 여자’로만 보인다. 친숙하지 않은 사이인데도 “참 예쁘시네요~”하고 넉살좋게 인사를 건넬 때도 있다. ‘예쁘다’는 것으로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아 보인다. 그럼에도 질투심은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동갑인데도 나보다 한참 어려보이는 여자에겐 샘이 나고 부러운 마음이 절로 든다. 그 비결이 뭘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래도 어지간해서는 물어보지 않는다. 속으로 ‘흥, 남편은 늙수그레할 거야’하고 위안을 한다.
3. 내 몸이 건강해야만 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결혼 전에는 사소한 감기에도 몸져 눕곤 했다. 기침 몇 번만 해도 수시로 이마에 손이 올라오고, 설탕물을 끓여 입안에 넣어주는 엄마의 손길이 있었다. 몇 년 전만 해도, 칼에 손이 베이기라도 하면 ‘이만하기 다행이다’ 치료해주는 남편 손길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뼈마디가 쑤셔대는 감기몸살에 걸려도 웬만해선 드러눕지 못한다. 칼에 손가락이 베어도 혼자 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이고 만다. 드러내놓고 아파하면 내 몸 아픈 것보다, 자식들이 걱정하고 남편이 불편해하는 것을 보는 게 더 아프다. 그래서 여자는 아파도 아내와 엄마는 아프면 안 된다는 말을 비로소 안다.
4. 마흔을 불혹(不惑)이라고? 믿을 수 없다.
공자께서 가라사대 “40세가 되어서는 미혹하지 않았다 (四十而不惑)”고 하셨다. 공자가 살아계신 동안은 혹(惑)할 게 많지 않아서였는지 모르나, 내가 사는 세상에선 눈만 돌리면 마음 빼앗는 것이 늘려있다. 담백한 참 크래커보다 달콤한 초콜릿에 혹하듯이 때론, 남이 가진 것이 커 보이고, 남의 생각이 옳은 것 같고, 남의 남자가 좋아 보이기도 한다. 드러내놓고 말하지 못할 뿐이다. 내가 속물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으나, 나의 불혹은 호호할머니가 되어서야 가능할런지...솔직히, 이것마저도 자신이 없다.
5. 때론, 자판기 커피보다 블루마운틴이 마시고 싶다.
몸도 마음도 편안하게 보낸 하루가 최상의 날이라는 걸 안다. 강물처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하루하루에 감사할 줄도 안다. 하지만, 때론 그 편안함에서 벗어나고픈 욕구가 생긴다. 싸고 부담 없는 자판기 커피를 등지고 커피전문점에서 갓 뽑아낸 블루마운틴을 마시고 싶을 때가 있다. 노래방에서 유행지난 가요를 부를지언정 가끔은 예술의 전당에서 클래식연주회를 듣고 싶다. 장동건이 주연한 영화를 비디오로 빌려보지만 어떤 날은 미술관에서 큐레이터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하고 싶다. 그리하면 나도 한 때는 로맨티스트였고 문학소녀였다는 걸 떠올리며, 새털 같은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을 것 같다.
6. 눈 내리는 겨울에도 사막의 선인장을 떠올릴 수 있다.
나이는 단순히 밥그릇 비운 숫자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나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 있다는 것도 안다. 내가 가진 만큼 누군가는 굶주리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래서 자주 마음이 아프다. 내 욕심을 줄이고 더 많이 나눠야하는데 선뜻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다. 예전엔, 내가 처한 현실이 중요하고 내 생각이 다 옳은 것 같았지만 지금은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보다 현명할 때가 많다는 것을 자주 깨닫는다. 나와 다른 처지에 놓인 사람을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먼저 느낀다.
7. 바람 속의 산불보다 사람 속의 소문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안다.
살아갈수록 이웃의 소중함을 몸으로 느끼고 있다. 떨어져 사는 형제보다 가까운 이웃이 나를 더 잘 아는 것도 같다. 점심 무렵에 만나 저녁까지 수다를 떨어도 지치지 않는다. 아이들 얘기, 남편 얘기, 옆집 누구 얘기... 소재는 다양하다. 누군가 운 좋게 걸리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신데렐라’가 되지만, 누군가 재수 없게 걸리기라도 하면 ‘종이 봉지 공주’로 바뀌는 건 순식간이다. 그래서 이웃이 소중한 만큼 딱 그만큼 조심스럽기도 하다. 동창에게 수다를 떨면 속이 후련하지만 이웃에게 수다를 떨면 혀가 닳아버린 느낌이 들곤 한다. 때문에, 아무리 가까운 이웃이라도 말을 가려서 해야 한다는 걸 안다. 의도적으로 말을 아낄 때도 있어야한다는 걸 안다. 그럼에도 나에겐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속내를 다 끄집어내놓고서는 뒤늦게 아차차! 한다.
8. 시와 숭늉이 만나면 언제나 시가 먼저 숨는다.
떨어지는 낙엽에도 눈물 흘릴 수 있고, 흩날리는 눈송이에도 시 한편 읊조릴 수 있지만 겉으론 잘 드러내지 않는다. 태연하게, ‘낙엽 떨어지니 곧 추워지겠네’, ‘눈길에 운전 조심해야하는데...’ 드러내놓고 말한다. 그러면서 따뜻한 밥을 퍼내고 구수한 숭늉을 끓여낸다. 마음한 켠엔 사춘기적 감성이 그대로 꿈틀거리지만, 드러내면 현실을 모르는 철부지 여자가 되기 십상이니까... 그래서 소녀 같은 나는 자꾸만 숨는다. 안으로 안으로만 파고든다. 대신, 팔뚝 굵고 힘 좋은 여자가 되어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가족의 안위를 먼저 챙긴다. 나 하나쯤 아무 것도 아닌 듯이...넉살 좋게 웃으며 몸도 마음도 풍성한 아줌마로 살아가는 것이다.
“꿈꾸는 자는 바라볼 데가 있어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는 말은, 요즘 내가 품고 있는 화두다. 마흔을 며칠 앞둔 나는, 살아오면서 잃어버린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다는 것을 안다. 노력해서 얻은 것도 있고 행운처럼 그저 주어져서 얻은 것도 있다. 어떤 것이든 감사하다. 그 감사함으로 나는 지금도 꿈을 꾼다. 젊은 날의 꿈과는 분명 다르지만 나는 여전히 꿈을 꾼다. 밤하늘의 별을 따는 꿈이 아니라, 어둠속에서 빛나는 별을 이해하며 꾸는 꿈이다. 욕심 부리기보다는 받아들이는 꿈, 그래서 더욱 소중한 꿈이다. 혹시 여러분이 길을 가다가, 고개를 빳빳이 들고 걷는 여자를 보면... 마흔 살의 저 여자 꿈꾸고 있구나, 하고 너그러이 봐줬으면 좋겠다.
2005. 12. 18. 淸顔愛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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