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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구상 종합한 '하모니즘' 창안… 43세 연하 아내와 로맨스 화가 김흥수​

鶴山 徐 仁 2026. 6. 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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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구상 종합한 '하모니즘' 창안… 43세 연하 아내와 로맨스 화가 김흥수

[신문에서 찾았다 오늘 별이 된 사람]

2014년 6월 9일 95세

이한수 기자

입력 2026.06.09. 05:00업데이트 2026.06.09. 05:44


오랜만의 인터뷰라며 한껏 멋을 부리고 나온 김흥수 화백. 뒤에 보이는 사진은 젊은 시절의 김 화백. photo 허재성 영상미디어 기자

1949년 5월 30세 서양화가 김흥수(1919~2014)는 서울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본관) 4층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제1회 국전 입상작 ‘호’ 등 50점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 구상이나 색조에 부자연함이 없고 광음(光陰)을 분명하게 나타내려고 애쓴 점도 훌륭한 솜씨였다. (..) 물질을 물질 본래의 자태 그대로 사실(寫實)하려는데 충실하면서도 예술적 풍미를 소홀히 하지 않음으로써 성공한 작품들이었다. 씨(氏)는 필법이 하나하나 각고(刻苦)하고 건실하다. 꾸준히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으로 보인다.”(1949년 5월 22일 자 2면)

1949년 5월 22일자 2면.

김흥수는 1944년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여러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1954년 프랑스 유학을 떠나기 전 다시 개인전을 열었다. 동료 화가 백영수(1922~2018)는 호평과 조언을 함께했다.

“이번에 도불(渡佛)할 화가 김흥수씨 개인전이 미도파백화점 오층에서 열리고 있다.(…) 김흥수씨는 힘찬 화가이다. 작품 하나하나가 그런 데가 보이고 무엇이든지 그릴 수 있는 기술을 지닌 작가(…) 그러나 작품 전체에서 힘차고 기술에 능숙한 김흥수씨가 회화 예술에 있어서의 예술성에 대해서 너무 쉽사리 생각하는 것 같다. 능숙한 재주와 힘찬 노력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슬픔과 감격하는 내용이 잊어지지는 않는가? 이런 생각도 느껴진다.”(1954년 10월 4일 자 4면)

1955년 3월 16일자 4면.

프랑스 유학 길을 떠나면서 조선일보에 그림을 곁들여 ‘파리 기행’을 연재했다. 1955년 2월 26일 홍콩에서 프랑스 여객선을 타고 출발하는 장면에서 시작한 ‘파리 기행’은 인도양과 홍해를 거쳐 수에즈 항을 지나 지중해를 항해하는 여정을 4월 22일까지 5회에 걸쳐 썼다. 당초 ‘파리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보아 이후 파리의 생활을 전할 계획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어떤 사정인지 연재는 중단됐다.

프랑스에서의 활동은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불란서 국전에 김흥수씨 출품’(1955년 11월 9일 자 4면) 기사를 비롯해 프랑스 잡지 ‘현대’가 김흥수 작품을 평했다는 소식을 ‘감동적 사실’(1956년 2월 18일 자 4면)이라는 제목으로 전했다. 파리에서 개인전(1957년 6월 7일 자 4면, 1960년 6월 28일 자 4면)도 열었다.

1956년 2월 18일자 4면.

김흥수 스스로도 파리에서 자신의 근황을 신문을 통해 적극 알렸다. 파리 유학생의 방만한 생활을 비판한 ‘L씨’의 글을 반박하며 6회 연재한 ‘작가와 인권’, 프랑스 현대미술관에 작품 출품 사실을 알린 ‘조국에 보내는 글’(1957년 5월 17일 자 4면), ‘화단은 문단의 식민지가 아니다’(1958년 1월 13일·14일 자 4면) 등을 잇달아 기고했다.

파리 체재 6년 만인 1961년 귀국했다. 귀국 개인전을 여는 한편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미술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1965년 유영국·권옥연·박서보 등과 함께 ‘현대 미술 7인전’에 초대된 김흥수는 “나는 나의 그림을 고정된 형식 안에 묶어 놓지 않고 자유 속에 두고 싶다” “오늘의 나와 내일의 나와 또 달라질 그날의 나를 위하여…”(1965년 3월 23일 자 5면)라고 했다.

1965년 3월 23일자 5면.

1967년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1973년 필라델피아에서 개인전을 열고 펜실베이니아 미술대학에서 강의했다. 미국 미술 수준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펜실베이니아 미술대학 교수로 있는 김흥수 화백을 만나봤다. 김 화백은 미국 욕부터 먼저 늘어놨다. 미국 미술은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문화가 고전기(古典期)를 거쳐야 하는데 미국의 문화는 고전기의 경험 없이 바로 바로크로 들어와서 썩기 시작했다는 것이 김 화백의 진단이다. (…) 미국 교수들은 자기파(自己派)의 그림을 주입식으로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개성의 시대에 개성 있는 것을 가르쳐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고 김 화백은 말한다.”(1976년 7월 15일 자 3면)

1976년 7월 15일자 3면.

1976년 일시 귀국해 전시회를 열기도 했지만 1970년대 내내 ‘재미 화가’로 활동했다. 1981년 4월 프랑스문화원에서 연 전시를 소개하는 기사는 “재미 화가로 활약하다가 귀국 후 가지는 작품전”(1981년 4월 5일 자 11면)이라고 했다.

김흥수는 “두 개의 화면을 하나의 캔버스로서 대칭시키는 특이한 기법”(1985년 5월 10일 자 7면), “사실과 추상을 한 화면에 조화시키는 독창적 작업”(1986년 6월 19일 자 7면)을 선보였다. 색유리를 이용한 가로 4m 70㎝ 대작 ‘스테인드글라스 벽화’(1987년 3월 1일 자 7면)를 제작하기도 했다.

1987년 3월 1일자 7면.

누드화도 많이 그렸다. 1987년 4월 ‘누드 드로잉’전을 열고 “누드에는 인간의 자유와 평화를 상징하는 수식어들이 내재하고 있어요. 여체의 균형미를 추구함으로써 보는 이들에게 평화와 안식처를 제공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자신의 작품 활동을 ‘조형주의(하모니즘)’로 규정했다. “동양의 음양 철학을 기초로 현대 회화의 추상과 구상,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시도한 지 15년 가까이 됩니다. 이제는 그동안의 창작품을 온 세상에 공개해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1990년 6월 6일 자 9면) ‘하모니즘’ 창안자로서 파리에서 연 특별전은 “파리 화단에 상당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1990년 7월 21일 자 13면)는 현지 평가를 받았다. ‘한국의 피카소’라는 별칭도 얻었다.

1990년 6월 6일자 9면.

1992년 1월 43세 연하인 당시 30세 제자 장수현씨와 결혼해 화제를 뿌렸다. 9년간 동거하다가 결혼식을 올렸다.

“-9년동안이나 동거를 하다가 갑자기 식을 올리기로 결심한 이유는 뭡니까?

▲오래 전부터 우리의 관계를 감추고 쉬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나이 차가 너무 많아 저 사람의 부모가 충격을 받을까봐 미뤄왔습니다.

-장인은 두분의 동거사실을 몰랐습니까.

▲장인은 저보다 6~7세 아래인데, 지난해 가을 우리 얘기가 어느 여성잡지에 날 때까지 몰랐습니다. 그 이후 결혼 문제로 약간의 마찰을 겪었습니다.”(1992년 1월 23일 자 15면)

1992년 1월 23일자 15면.

아내 장수현씨는 43세 연상인 남편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부부의 연을 맺고 20년 만인 2012년 11월 13일 난소암 투병 끝에 50세로 타계했다. 18개월 후인 2014년 6월 9일 김흥수 화백도 영면에 들었다. 부음 기사는 두 사람의 ‘로맨스’도 기록했다.

2014년 6월 10일자 A23면.

“대중에겐 작품보다 ‘43년 나이 차를 극복한 로맨스’로 더 알려졌다. 김 화백은 세 번 결혼했다. 첫 부인은 계약 결혼한 일본인이었고, 두 번째 한국인 부인 사이에선 3남 1녀를 뒀다. 마지막 결혼은 1992년 덕성여대 교수로 재직할 때 제자였던 43세 연하의 장수현(1962~2012)씨와의 결혼. 부인을 ‘수’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70대에도 한쪽 팔에 부인을 거뜬히 매달았을 정도로 애정을 과시했지만, 부인 장씨는 2012년 11월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떴다.”(2014년 6월 10일 자 A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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