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강력하게 추진한 ‘크고 아름다운 법안’에는 ‘미국 영웅들의 정원’이라는 조각 공원 설립에 예산을 배정한다는 조항이 있다. 감세와 정부 지출 확대가 핵심인 이 법안에는 특정 용처에 예산을 배정하거나 취소한다는 내용이 빼곡히 담겼다. 그중 하나인 이 조항은 내년 독립 250주년에 맞춰 미국의 영웅 250인을 기리는 공원을 만들겠다는 구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트럼프는 2020년 독립기념일 연설에서 이런 구상을 처음 밝혔다. 그해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하며 없던 일이 됐던 구상이 트럼프의 귀환과 함께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기념비의 시대가 저물어가는 지금 영웅의 조각상이라니. 그러나 트럼프 특유의 과시적 행보로 치부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국가에 공헌한 이들을 기린다는 취지 자체는 본받을 만한 것이다.
트럼프라는 이름이 주는 선입견을 빼면 미국에서 이런 발상은 사실 새롭지 않다. 가령 워싱턴 DC 국립 대성당 신도석 180개의 장궤틀(무릎을 꿇을 때 받치는 틀) 쿠션에는 미국인 180명의 업적을 기념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다. 아인슈타인 쿠션엔 상대성이론 공식, 그레이엄 벨 쿠션엔 전화기 그림이 수놓였다. 아인슈타인이나 벨이나 100년도 넘은 옛날 사람이다. 하지만 그동안 왕조의 멸망과 식민 지배, 분단이라는 역사의 질적 변화를 겪은 한국과 달리 미국은 그때나 지금이나 본질적으론 같은 국가다. 따라서 그들은 과거의 인물이면서 지금의 미국인과 같은 국민이다.
우리는 어떤 위인들을 기리고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가장 일상적인 자리에서 기념의 대상이 된 이들은 거의가 왕조 시대 아니면 식민지 시대 인물이다. 돈을 쓰고 만질 때마다 거기 새겨진 얼굴의 주인공이 왜 조선 전기 위인이어야 하는지 궁금해진다. 매일 ‘세종’대로로 출근했다가 ‘이순신’ 동상 앞에서 버스를 타고 ‘퇴계’로 입구와 ‘을지’로를 거쳐 퇴근할 때도 비슷한 의문이 든다. 서울역사편찬원에서 수도의 가로명(名)에 얽힌 인물 이야기를 엮은 책 ‘서울 길에서 만나는 인물사’(2023)는 조선의 한양 천도(삼봉로·무학로)에서 시작해 난세 영웅(서애로·충무로)과 예술의 대가(겸재로·추사로)를 거쳐 독립운동가(도산대로·백범로)를 조명하며 끝난다. 서울이 정도(定都) 600년이 넘은 역사 도시라지만, 대한민국의 인물은 대체 어디에 있는가.
그들을 조명하는 일은 알게 모르게 위험하다. 거기엔 으레 ‘친일’이니 ‘색깔’이니 하는 잡음이 뒤따른다. 그렇다고 방부 처리해 박제한 동물처럼 안전한 인물만 언제까지나 바라볼 수는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오늘의 이름을 발견하는 일은 결국 우리가 누구인지 돌아보는 일이기도 할 것이다.
트럼프는 첫 임기 종료 이틀 전인 2021년 1월 18일 행정명령을 발동해 ‘영웅 공원’ 조성을 공식화했다. ‘영웅’에 포함돼야 한다고 명령에 못 박은 명단이 흥미롭다. 미국 현대 보수주의의 대부 배리 골드워터 전 상원 의원과 뚜렷한 진보 성향으로 트럼프를 비판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전 연방대법관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 밖에 건국 초기 원주민 항쟁을 이끈 추장 테쿰세, 작가 헤밍웨이, 맥아더 장군, 농구선수 코비 브라이언트, 가수 휘트니 휴스턴 같은 이들도 있다.
각각의 인물에 대해서는 호오(好惡)가 다를 수 있고 논란도 불거질 수 있다. 그러나 활동 연대, 성별, 피부색, 진영과 분야를 아우르는 면면이 모이면 한 국가의 상(像)이 총체적으로 완성된다. 광복 80주년을 맞은 우리도 대한민국의 얼굴들로 그런 모자이크화를 그릴 때가 됐다고 생각한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에서 얻은 뜻밖의 힌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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