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2024.11.17. 23:52
가을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김종길(1926-2017)
일러스트=박상훈
가을에 이 시를 읽으니 사색에 잠기게 된다. 김우창 문학평론가는 김종길 시인의 시편에 대해 “절도 있는 리듬의 말”이라고 상찬을 했는데, 그런 특장도 잘 느껴진다. 가을에 이르러 사물의 밝음과 어두움, 테두리가 분명해지는 것은 쾌청한 날씨 때문이요, 또한 생명 세계가 꾸밈새와 지니고 있던 것을 버리고 덜어내는 때이기 때문일 것이다. 장식이 걷히면 대상의 홑몸이 확연하게 노출된다.
시인은 가을의 시간을 맞이하게 된 일에 대해 기쁜 소회를 털어놓는다. 동시에 노쇠해지는 몸을 쓰다듬듯 바라보아 그 변화를 순순하게 받아들인다. 늙어가는 몸은 가을날의 청량산을 빗대서 표현한 시구대로 “맑게 여위다 못해 이미/ 춥게 여위기 시작하는/ 초로(初老)”의 몸일 테다. 가을이 깊어지면서 생명들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낮의 시간은 점차 짧아진다. 시인은 이 사실 또한 담담하게 수긍한다.
시인의 후기 걸작들을 읽어보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다는 뜻의 ‘사무사(思無邪)’를 매우 귀하게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절제된 행간에서도 그런 궁구와 허심한 면모가 엿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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